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82화 (255/558)

제282화

산카가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가하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산페르 아저씨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라운드 제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어요.”

-대책 없는 성격은 변함이 없네. 눈독 들인 물건을 내버려 두는 걸 보면 말이야.

물건이란 말에 샬롯은 눈을 얇게 떴다.

“산카. 사람은 물건이 아니야.”

-그렇다고 치고, 꼬마야. 상태를 보아하니 넌 나를 기억하는 것 같은데.

산카가 가하란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금류 같았다.

저러다 부리로 공격하는 게 아닐까, 샬롯은 걱정이 됐다.

“네, 기억해요.”

-그때 봤던 오만한 정령하고는 어떤 관계지?

“사슴님은…… 친구예요. 적어도 저는 친구라고 여기고 있어요.”

-친구? 그놈에게 그런 개념이 있을까?

산카가 ‘오만’하다고 표현할 정도면 대체 어떤 사람이지? 아니, 정령이라고 했지.

정령.

친근한 단어이면서도 동시에 여전히 알 수 없는 단어였다. 산카는 자신을 소개할 때 정령 비슷한 것이라고 했다.

“정령 비슷한 게 뭐냐”라고 되물으면 “나도 몰라”라는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항상 곁을 맴도는 바람도 정령의 일부라고 배웠다. 하지만 모든 바람이 살갑게 구는 건 아니었다.

정령에게도 개성이 있었고 몇몇 정령은 산카처럼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산카는 조심하라고 말했다. 층이 다르면 모든 게 다르니 성급하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그날 안원에 간 건 네 의지였니?

산카가 가하란에게 말했다. 샬롯은 눈앞을 스쳐 날아가는 산카의 다리를 붙잡았다.

“아까부터 안원이라고 말하는데, 대체 안원이 뭐야?”

-정령세계. 그 층의 출신들은 그곳을 안원이라 불러. 더 궁금한 건?

“일단은 없어.”

-그러면 놔줄래? 난 저 꼬마에게 물어봐야 할 게 남았으니까.

“적당히 하면 안 돼? 가하란 자체는 나쁘지 않다며.”

-안 돼.

단호하게 대꾸하는 산카였다.

“제가 가고 싶어서 간 적은 없어요. 정신 차리고 보면 정령세계에 있었어요.”

-가고 싶어서 간 적은 없다? 그 말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거야?

“네. 몇 번 더 갔었어요.”

-……너, 정령술사에게 의식을 배운 거야?

가하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영혼을 유지한 채 안원을 들락날락했다고? 그 거북 녀석이 뒤를 봐준다고 해도 안원의 정문을 넘는 건 불가능한데.

산카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고민할 거리가 생기면 산카는 항상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말했다.

안원에 가는 것이 그토록 대단한 일인가? 산카가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로?

-혹시 너…….

산카가 가하란의 얼굴 앞으로 다가갔다. 부리가 눈에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샬롯은 손을 뻗을 준비를 했다. 산카를 말릴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눈이 뜨인 자. 아니, 조금 달라. 이건 뭐지?

산카가 작은 날개로 가하란의 눈가를 쓸어올렸다. 가하란은 움찔했지만 아프지는 않은지 가만히 서 있었다.

-이 눈은 대체 뭘 보는 거지?

“눈이 뭘 보긴. 앞에 있는 걸 보지.”

샬롯은 산카 뒤쪽에 서서 가하란의 눈을 바라봤다. 흐린 하늘색 눈동자에 세상이 비치고 있었다.

-산페르가 왜 너한테 관심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아. 재미난 눈이야. 알 수 없기에 흥미가 생겨. 너, 이 눈을 거북 놈에게 빌려준 적이 있지?

“어떻게 아셨어요?”

-그놈이라면 해봄 직하니까. 그래, 눈을 빌려주고도 버텨냈다 이거지?

“즐거운 경험은 아니었어요. 그거 때문에 곤란하기도 했고.”

-아주 좋아. 꼬마야, 그 눈으로 날 살펴봐.

“지금요?”

가하란이 머뭇거렸다. 눈빛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샬롯은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뭐야? 나 때문에 그래?”

“꼭 그런 건 아니고.”

“설마, 내가 어디 가서 말하고 다닐까 봐 그래? 지금 여기서 들은 말을?”

“아니야. 그런 건 아닌데…….”

“아리엘 언니가 그랬어. 아니라고 둘러대는 사람들은 대개 찔려서 그런 거라고.”

샬롯은 몸을 돌리고 양손으로 귀를 막은 뒤 눈을 감았다.

“자! 둘이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모르는 일이야. 이러면 됐지? 나도 의심받는 거 싫어.”

-어차피 다 들리면서.

“안 들려! 진짜야!”

세상에는 알아봤자 쓸모없는 이야기가 절반이라고 한다. 남은 절반조차 대부분 ‘재미없는 이야기’로 구성돼 있고, 쓸모 있고 재미난 이야기는 한 줌밖에 안 된다고 한다.

문제는 그 한 줌의 이야기 안에 ‘영원히 몰랐으면 하는 이야기’가 드문드문 박혀 있다는 점이다.

샬롯은 알고 있었다.

진실은 무섭다는 걸. 진실은 끔찍하고, 역겨우며 때론 지독하게 슬프다는 걸.

만약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라면, 산카가 바람으로 차단해버릴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샬롯은 산카를 믿었다. 산카가 절벽을 가리키며 뛰어내리라고 한다면, 한 10초 정도 고민한 뒤에 뛰어내릴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산카와 가하란이 나눌 얘기가 궁금하긴 하지만, 무참하게 들이밀어질 진실은 무서웠다.

악몽은 한 번이면 족했다.

아버지란 이름의 악몽에서 겨우 깨어났는데, 또 다른 악몽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뒤쪽이 조용해졌다. 산카가 대화 소리를 막은 걸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발꿈치를 떼며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았다.

언제쯤 대화가 끝나는 거야?

“저기, 다 했어? 나 이제 돌아본다?”

목소리를 냈으나 반응이 없었다.

샬롯은 한쪽 눈만 살며시 뜨고 뒤를 쓱 바라봤다.

가하란이 멍한 눈으로 산카를 보고 있었다.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입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버린 느낌이었다.

“가하란?”

걸음을 떼며 다가섰다.

산카 역시 공중에 뜬 채 멈춰버렸다.

샬롯은 손을 들었다. 가하란의 눈앞에서 휙휙 흔들고, 산카 앞에서도 열심히 저었다.

둘 다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몸만 여기다 두고 영혼은 다른 곳에 가버린 것처럼.

“뭐야? 둘 다 뭐 하는 거야?”

가하란의 옷깃을 붙잡고 살짝 흔들었다. 인형처럼 몸이 앞뒤로 움직였다.

샬롯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지붕에 걸터앉았다.

“심심하니까 빨리 돌아와.”

산카가 곁에 있을 테니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단지, 혼자 남겨진 게 외로울 뿐.

“……저녁에 뭐 먹지.”

발장구를 치며 작게 말했다.

* * *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어둠이 공간을 뒤덮고 있었다.

가하란은 손을 움직였다. 인식하니 흐릿했던 손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차례대로 몸이 생겨났다.

하지만 여전히 어둠 속이었고 달라진 건 없었다.

-익숙해 보이네.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카의 음성이다.

가하란은 어둠을 향해 말했다.

“몇 번 경험해 봤거든요. 여긴 심상세계인가요?”

-그래. 네 자그마한 세계 안쪽이야.

“산카…… 님은 산페르 아저씨와 어떤 사이인가요?”

-사이? 그런 단어로조차 묶이고 싶지 않은 관계. 설명됐겠지?

가하란은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내가 모르는 눈을 가졌어. 아마 산페르도 알아보지 못했겠지. 어쩌면 ‘눈이 뜨인 자’라고 오해했을지도 몰라.

“그 얘긴 들어본 적 있어요. 눈이 반쯤 뜨였다고.”

-나 역시 과거에 널 봤다면 똑같이 생각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인식의 폭이 넓어졌지. 층이 아닌 계의 관념으로 널 볼 수 있으니까.

“‘계’요?”

-지금은 이름만 알아둬. 넌 어차피 알게 될 것 같으니. 미래에 사는 아이의 냄새가 너한테서 나. 이미 만났겠지?

“그게 누구죠?”

-너희들 표현에 따르면, 그래. 오크족 주술사.

오래전, 임종 직전의 할아버지 곁을 지킬 때가 떠올랐다. 신비로운 초록색 눈동자를 지닌 여자와 병실에서 만났었다.

할아버지의 기록지를 보며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산카의 입을 통해 확실시됐다.

“그분이 주술사셨군요. 산카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아이가 널 만나러 갔다는 건 운명이란 얄궂은 녀석을 봤다는 거겠지.

“운명. 운명이란 게 정말 있는 건가요?”

-있었어. 한때는 말이지.

“네?”

과거형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운명이란 게 없다는 건가?

-복잡한 이야기야. 넌 지금 알 필요도 없고, 알게 되더라도 그건 내 입을 통해서가 아니겠지. 난 내 딸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벅차. 신이 운명의 붉은 끈을 놓아버린 순간 모든 게 변해 버렸으니까.

“신이 끈을 놓다니요?”

-너희는 이제 인형이 아니라는 뜻이야. 그래서 관측하기 어려워졌지. 산페르 역시 계의 흔적을 좇아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테고. 궁금한 건 봐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니까.

말을 듣긴 들었는데, 이해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신이라니. 고차원적 담론은 반갑지 않은 주제였다. 현실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지칠 정도니까.

그럼에도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묻고 싶었다.

계는 무엇인지, 신은 무엇인지, 이 세상은 왜 변한 건지.

물음이 머리를 뚫고 올라와 전신으로 발산될 때였다.

하늘이 열렸다.

추상적인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뭉클한 어둠이 갈리며 빛이 스며들었다.

가하란은 고개를 든 채 굳어버렸다.

하늘을 가린 건 거대한 날개였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날개.

세상을 덮었던 날개가 움직이는데 기분 나쁠 정도로 조용했다.

-산페르의 근원도 본 적 있겠지.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하얗게 빛나는 눈동자가, 하늘에 닿을 것 같은 거대한 눈이 그곳에 있었다.

-보고도 허물어지지 않는 걸 보면, 네 자그마한 세계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단하네. 안원에서도 형태를 잃지 않은 건 질긴 영혼 때문인가?

머릿속에 목소리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모든 사고를 정지시키는 음성이었다.

몽롱한 상태로 앞만 보고 있다가 고개를 휙휙 털었다.

-놀랍네. 근원을 보고도 여전히 정신을 유지하고 있어.

“조금 어지럽기는 해요.”

-인간족이라면 정신을 놓아야 정상이야.

“전 비정상인가요?”

-내가 보기엔.

“좋은 비정상이네요. 기절하는 것보다 나으니.”

흐리멍덩했던 머리가 점차 맑아졌다. 가하란은 조금씩 움직이는 날개를 올려다봤다.

“이게 산카 님의 본래 모습인가요?”

-몰라. 네 눈에 내가 어찌 비치는지, 나는 알 수 없으니까. 형태는 인식하는 자의 자유야.

“제 눈에는 거대한 새로 보여요.”

-그렇게 보인다면 괜찮네. 나도 그 모습을 좋아하니까.

산페르, 산카.

문득 안원에서 처음 만났던 고마운 정령이 떠올랐다.

“혹시 산테 님과도 안 친하신가요?”

-너 그놈하고도 만난 거야? 어떻게?

“처음 정령세계에 떨어졌을 때 절 구해 주셨어요.”

-그놈이라면 방황하는 인간족을 두고 보지 못했겠지. 인간을 좋아하는 놈이니까.

산페르를 언급할 때보다는 그나마 정겨운 말투였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이름이 비슷한데, 혹시 가족…….”

-주둥이가 찢기고 싶다면 더 말해도 좋아.

“아니에요.”

얼른 입을 닫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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