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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81화 (254/558)

제281화

바람은 곁에 항상 머무는 친구였다. 때론 토라져서 말을 안 들을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미리 속삭여 주었다.

나 지금 화나서 네 얘기를 안 들을 거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라고.

하지만 지금 ‘바람’은 화난 게 아니었다. 상냥하게 말을 들어주고 있고,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단지 빗나가고 있을 뿐.

샬롯은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켜 가하란을 똑바로 마주 봤다.

발치에 맴도는 바람은 굳건하게 몸을 지탱해주고 있었다. 가하란 주변에 모여든 바람도 뜻에 따라 움직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바람의 의지가 가하란의 몸에 닿지 않았다.

“어째서?”

샬롯은 다시금 왼손을 까닥거렸다. 손끝에 밀집한 바람이 부드럽게 나아가 가하란에게 향했다.

다른 물건, 다른 사람이었다면 번쩍 들려야 했다.

“이렇게 정밀한 마법도 가능하구나. 제어는 어떻게 하는 거야? 아니, 설명하기 힘들겠네. 심상세계의 발현이니까.”

가하란이 관심을 보이는 건 좋았지만, 여전히 꿈쩍 않는 몸에 슬슬 조바심이 났다.

샬롯은 왼쪽 벽에 놓인 빗자루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바람이 가볍게 빗자루를 들어 올렸다.

“이거 봐, 되잖아!”

가하란이 고개를 돌렸다. 둥실 떠올라 복도를 누비는 빗자루를 보며 박수를 연이어 쳤다.

“몸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물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네. 시야가 닿는 범위 내에서 물리력 행사가 가능한 건가?”

속삭이듯 말하는 가하란이었다.

샬롯은 창틀에 발을 올렸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안 되는 거지?

“가하란, 왜 안 뜨는 걸까?”

“혹시 나를 띄우려 한 거야?”

“맞아.”

“저기, 도시 내에서는 마법을 제한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어. 특히 사람을 대상으로 한 마법은 공문이 필요하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바람이 널 피하고 있어.”

“바람?”

“내 친구들.”

샬롯은 오른손 손가락을 차례대로 접었다. 등 뒤에서 날아든 바람이 복도를 휘감았다.

먼지가 일고 문들이 덜컹거렸다. 덩치 큰 사람도 휘청거리게 할 강풍이었다.

“시원하네.”

샬롯은 눈을 찡그렸다. 매서운 바람이 가하란 앞에서 잦아들고 있었다. 촘촘한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가하란 주변만 가면 바람이 힘을 못 썼다.

“잠깐만. 이 정도 발현이면 마나파장이 느껴져야 하는데, 그런 게 없네? 이거 마법이 아닌 거야?”

“바람은 그냥 바람이야. 그보다 왜 넌 안 뜨는 거냐고!”

창틀을 넘어 가하란 앞에 섰다. 왜 그러냐고 되묻는 가하란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일단 올라가자.”

바람이 가하란을 거부한다면 직접 데리고 올라가면 될 일이다.

모여든 바람에게 부탁했다. 몸을 들어 올려 달라고. 머뭇거리는 느낌이 들지만, 이내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오.”

가하란이 작게 감탄했다. 샬롯은 손아귀에 힘을 바짝 줬다.

“지붕으로 올라갈 거니까 꽉 잡아.”

느릿하게 창문을 빠져나왔다. 평소였다면 손가락질 한 번으로 새처럼 비상해 옥상에 안착했을 텐데.

“옛날 생각이 나네.”

가하란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샬롯은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너 생각보다 무겁네!”

“떨어트리진 말아줘. 여기서 떨어지면 팔 하나 부러지는 거로 끝나진 않을 거 같거든.”

여유 넘치는 목소리였다.

장난삼아 사람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랐던 적이 몇 번 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쳤었다.

반면 가하란은 익숙하다는 듯이 주변 풍경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 침착함에 괜스레 열이 받는다.

살짝 겁줄 생각으로 몸을 흔들었다. 표정을 확인하려고 시선을 내렸는데, 가하란은 눈 하나 깜짝 않았다.

“안 무서워?”

“무서워해야 해?”

“조금은.”

그러자 가하란이 재미없는 목소리로 무서워, 라고 말했다. 기운이 쭉 빠지는 반응이었다.

지붕 끝자락에 가하란을 내려놓았다. 너부죽한 삼각형 모양이라 걸터앉기 편했다.

자리를 확인하고 앉으려고 하는데, 가하란이 상의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펼쳤다.

“고마워.”

샬롯은 어릴 적 기억을 끄집어냈다. 예법을 배울 때 이런 사례를 들은 적 있었다. 근데 그건 귀족들의 오래된 매너였을 텐데?

손수건 위에 앉으며 물었다.

“귀족이었어?”

“내가? 아니.”

“그래?”

하긴, 매너가 귀족의 전유물은 아니니까. 유행처럼 따라 했을지도 모른다.

“창문을 통해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긴 하네.”

가하란이 말했다.

“방 안에서 보면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건물 벽이 시야를 틀어막잖아. 하지만 여긴 그런 게 없지.”

샬롯은 둥실 떠올라 한 바퀴를 돌았다. 확실히 스파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도시였다.

“나도 올려줄 수 있어?”

밑에 있는 가하란이 물었다.

“몇 번을 해봤는데, 이상하게 널 바람들이 싫어해.”

“날 싫어해?”

“어. 이유를 모르겠어. 이런 적은 처음이야.”

살포시 내려가 가하란 곁에 섰을 때였다.

눈꺼풀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잠을 끌어당기는 부드러운 바람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갑자기 왜…….”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비틀거렸다. 두려워할 일은 아니었다. ‘산카’가 나쁜 짓을 할 리 없으니까.

쏟아지는 졸음을 간신히 버텨낼 때였다. 눈앞에 하얀 새, 산카가 나타났다.

-잠깐 자고 있어.

“싫어.”

눈을 부릅뜬 채 산카를 노려보다가 길게 하품했다. 물에 젖은 옷처럼 머리가 무거워졌다.

“샬롯.”

가하란이 조심스럽게 일어나 다가올 때였다. 산카가 한쪽뿐인 날개를 펼쳤다.

가하란이 비틀거리는 게 보였다. 가하란 주변에서 바람이 날뛰고 있었다.

산카의 의지였다.

“산카, 그만해.”

-잠깐 자고 있어. 그러면 다 정리돼 있을 거야.

“싫다니까.”

-내 말 들어.

산카는 욕심쟁이에 고집불통이지만, ‘나에게’ 해를 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들은 정말 신경 안 쓴다는 것이다.

때론 위협하는 수준이 아니라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한다.

온화하게 곁을 스쳐간 바람이 가하란 옆에서 사나운 들개처럼 변했다.

옷이 펄럭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저러다 발을 헛디디면 지붕에서 떨어질지도 모른다.

샬롯은 볼살을 꽉 씹었다. 흐리멍덩했던 정신에 불꽃이 튀었다. 희미한 피 맛을 느끼며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내가 그만 하랬지!”

산카를 붙잡고 좌우로 흔들었다.

매섭게 불던 바람이 한순간 멎었다. 자세를 낮추고 중심을 잡던 가하란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샬롯은 산카를 꽉 붙든 채 가하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다친 곳 없어?”

“멀쩡해.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놀라긴 했지만.”

“미안해. 산카가 종종 이래. 처음 보는 사람을 싫어해. 아니, 몇몇 인간을 빼면 죄다 꺼림칙하게 생각해.”

“……산카? 그 새의 이름이 산카야?”

가하란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시선은 산카에게 닿아 있지만, 눈앞에 있는 산카가 아닌 다른 곳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샬롯, 샬롯! 아! 기억났어. 어쩐지 귀에 익은 이름이라고 생각했어. 그래, 그때 그 애! 오래전 일이라 잊고 있었는데, 그게 너였구나.”

반가워하며 다가오는 가하란이었다. 동시에 발밑에서 바람이 솟구쳤다.

가하란이 기우뚱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또 산카였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다시는 산카 안 볼 거야.”

-그런 협박 안 통해.

“협박인지 아닌지 정말 해볼까?”

-……인간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하지.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고.

“엄마 이름은 올리비에야. 산카가 아니라. 뭐, 키워준 거는 인정해줄게.”

산카를 품에 안은 채 가하란에게 다가갔다.

“정말 날 기억해?”

“기억하지.”

“어떻게?”

꿈에서 본 일이었다. 만나고는 싶었지만, 막상 얼굴을 보자마자 입이 굳어버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널 꿈에서 봤는데, 이게 어떤 의미일까?

의미는 무슨.

개꿈이지.

누구나 다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샬롯도 반쯤은 장난이었다. 재미난 우연이 겹쳤는데, 한번 확인해보면 어떨까? 딱 이 정도 수준의 호기심이었다.

애초에 도시를 빠져나갈 수많은 이유를 찾던 중 얻어걸린 것에 불과했다.

내가 널 꿈에서 봤는데 현실 모습과 얼추 비슷한 거야, 웃기지? 이런 우연이 다 있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대화는 이런 흐름을 타고 끝났어야 했다.

“기억 못 하는구나.”

“정말 날 만난 적이 있어?”

가하란의 눈동자가 슬그머니 내려갔다. 산카를 보고 있었다.

순간 알아챘다. 둘 사이에 뭔가 비밀이 있다는 걸.

샬롯은 산카를 뒤집었다.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꿈에서 본 거, 그거 꿈 아니었던 거야? 산카는 이걸 알고 있었어?”

-기억해서 좋을 거 없는 일이야.

“그 말은…….”

-안원(安原)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품은 자그마한 세계가 부서질 수 있어. 그런데 넌 봤을 뿐만 아니라 안원에 직접 찾아갔어. 아니, 찾아간 건 아니지. 빨려 들어갔을 뿐이니까.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위험한 장소에서 놀고 있던 널 데리고 왔어. 당시 기억을 떠올리면 네 심상세계에 타격이 갈까 봐 내가 덮어둔 거고. 이게 끝이야.

턱없이 부족한 설명이었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었다. 산카는 어디까지나 날 돕기 위해 움직였다는 것.

“왜 여태 숨겼어? 지금은 말해줘도 괜찮잖아. 나, 옛날처럼 아프지 않아.”

-알아. 넌 자랑스러운 내 딸답게 잘 이겨냈지. 하지만…….

산카가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머리 위에 살며시 내려앉은 산카는 가하란을 향해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저것과 어울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야. 그래서 구태여 말하지 않은 거고.

“가하란이 왜?”

-저 인간 자체로는 문제가 없지. 그날 봐서 알지만, 심성도 고와. 곁에 둬도 안심이 될 만한 인간족이지.

툴툴대는 듯하지만 산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의문이었다.

‘인간 자체’에 문제가 없다면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지?

-역한 냄새가 나. 배워먹지 못한 놈의 냄새. 가까이 두면 피곤하기만 한 그 냄새 때문에라도 넌 저 인간족 꼬마를 멀리해야 해.

얌전히 듣고 있던 가하란이 머쓱한 표정으로 손등을 들어 올렸다. 코에 가져다 대고 냄새를 맡는다.

“체취가 심한가요?”

-웃기려고 한 말이라면 끔찍하니까 그만둘래? 네 몸에서 무슨 냄새가 나든 상관 안 해. 하지만, 네 옆에 맴돌던 놈이 내뿜던 악취는 아주 고약해.

가하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산페르 아저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너한테 근본에 각인된 이름까지 알려줄 정도라면, 꽤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네. 샬롯! 저 인간족 꼬마와 되도록 떨어져 지내. 부정한 기운이 옮겨 붙을지도 모르니까.

산카가 날갯짓을 했다.

벽을 세우듯 바람이 샬롯과 가하란을 갈라놓았다.

샬롯은 양손을 번쩍 들어 머리 위에 있는 산카를 붙잡았다.

“또 멋대로 그러면 안 볼 거라고 했지?”

-내 말 좀 들어. 나중에 귀찮아지지 말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난 가하란하고 얘기하고 싶을 뿐이야.”

산카를 째려보며 말했다. 지지 않고 노려보다 산카가 부리를 휙 돌리며 작게 말했다.

-정말 키워봐야 소용없다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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