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0화
“아저씨는?”
“몰라.”
“오빠는?”
율은 대답 대신 샬롯을 지그시 바라봤다. 눈빛을 받자마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척하는 샬롯이었다.
“심심한 건 이해하겠는데 자꾸 방해하면 다시는 대답 안 해줄 거야.”
“나는 그냥…….”
시무룩하게 눈동자를 내리던 샬롯이 돌연 입을 비죽 내밀었다.
“며칠째 여기 있는지 알아? 나 진짜 얌전히 있었어. 하지 말라는 거 안 하고,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렸고.”
율은 서류에서 눈을 뗐다. 샬롯이 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가하란을 만나고 싶었는데 지금은 안 된다며? 그래서 참았어. 아저씨랑 오빠도 바빠서 만날 수 없다며? 그래서 기다렸어. 근데 이제는 율도 가만히 있으라고만 해.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그런 게 있어’라고만 하고.”
씩씩대며 쏘아대듯 말하던 샬롯이 점차 목소리를 누그러트렸다.
“이러면 집에 있을 때와 다를 거 없잖아. 이럴 거면 ‘이네빌’ 언니 따라가겠다고 했을 때 왜 말린 거야?”
이네빌.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몇 번 들었다.
“내가 말린 거 아니야. 난 그때 스파우에 없었고, 너를 알기 전이었어.”
“알아. 알지만…….”
샬롯이 엄지손톱을 깨작깨작 만지며 대답했다. 율은 한숨을 내쉬려다가 멈칫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방치해둔 건 사실이니까.
“가하란은 조만간 만날 수 있을 거야.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됐다고 하니까.”
“정말?”
“그래. 그리고 타챠 씨와 에단은 나도 어디서 뭘 하는지 정확히 몰라서 대답해줄 수가 없어. 아리엘 언니가 따로 말해둔 게 있을 테니까.”
율은 의자에서 일어나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샬롯 곁으로 갔다. 힘없이 처진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난 지금 스파우에 보낼 배터리와 의수를 점검하고 있고. 이걸 제때 마무리 짓지 못하면 도시 사람들이 불편해져. 샬롯은 사람들이 불편했으면 좋겠어?”
“……아니.”
“요 며칠간 신경 쓰지 못한 건 미안해. 언니가 잘못했어. 하지만 이제 마냥 어리광 부릴 나이는 아니잖아? 그렇지?”
샬롯이 눈을 살며시 치켜떴다. 우울했던 표정 위로 익살스러운 기운이 퍼져 나갔다.
“그러게. 나도 어른인데 너무 내 생각만 했네.”
“그래. 너도 다 컸잖아.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할 때도 됐지, 안 그래?”
샬롯이 무릎을 매만지다가 벌떡 일어섰다. 얼굴에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나도 다 이해해. 정말이야. 그냥, 잠깐 화가 나서 그랬어. 언니도 알지? 사람들은 다 화를 내잖아.”
“그래. 알지.”
이걸로 한동안 칭얼대지 않겠지.
물론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샬롯은 얌전히 있을 아이가 아니니까.
“말이 나온 김에 나 좀 도와줄래?”
“뭔데? 뭐든 도와줄게.”
책상에 쌓아둔 봉투를 가리켰다. 거창한 걸 시킬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저 작은 손에 중요한 일을 맡겼다간 불안해서 잠도 못 잘 테니까.
“지금부터 중요한 회의가 있어. 저 안에 중요한 서류가 있고.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건데, 들고 와줄 수 있겠어?”
“당연하지!”
샬롯이 뛰듯이 책상으로 가 두 손으로 봉투 더미를 들어 올렸다. 율은 의수 샘플이 든 상자를 들고 문을 열었다.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서 따라와.”
“응!”
샬롯과 함께 루드 팩토리를 찾았다.
“2층에 자리를 마련해 뒀어요.”
제니의 안내를 받으며 계단을 올랐다. 율은 제니 옆에 바짝 붙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회의에 샬롯도 참석시키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샬롯을요?”
“발언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참석만.”
제니가 눈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을 이해했다는 듯이.
“무슨 얘기 해?”
샬롯이 뒤따라오며 말했다.
“네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율 씨가 말해주고 있었어.”
“정말?”
제니의 말에 방긋 웃는 샬롯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제니가 율을 보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혹시 루드 팩토리 그만둘 생각 없어요?”
“스카우트 제안이라면 정중히 거절할게요. 전 아직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많거든요.”
“더욱더 탐이 나네요. 시장님께서 찾아 헤매던 인재상이랑 정확히 부합하거든요. 그리고 마음 맞는 동생이 있었으면 하고.”
“저도 언니가 좋긴 하지만, 지금 여길 떠날 순 없어요.”
제니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회의실 문을 열었다. 안에는 이전에도 봤던 회계부 쪽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 테리도 보였다.
“시제품을 전부 가져가서 살펴보신 거예요?”
의수가 담긴 상자를 보며 테리가 말했다.
“네. 저희 도시가 운영중인 분배소 용량에 맞추려면 어떤 게 최선일지, 아주 꼼꼼히 살펴봤죠.”
“가지고 다니기 번거로우셨을 텐데.”
“그 정도 수고도 안 들이고 좋은 물건을 받아 갈 수 있나요. 공장으로 오면 편히 볼 수 있다고 제안해 주셨는데, 제가 거절했어요. 진득하게 보고 싶어서.”
테리가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품질은 마음에 드나요?”
“사실 공장에 시제품 받으러 갔을 때부터 이미 결정한 상태였어요. 애초에 루드 팩토리 물건에 하자가 있을 리 없죠.”
“그거 다행이네요.”
루드 팩토리에서 생산된 제품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물량 확보만 안정적으로 가능하다면 최고의 선택지리라.
테리가 서류를 내밀었다.
“전에 말했던 겁니다. 스파우에 들어서게 될 지원 시설 규모가 상세히 표시돼 있죠.”
율은 개요를 눈으로 훑었다.
“반드시 유치해야 할 사업이네요.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건가요? 저희가 지원해야 할 금액이 적게 책정돼 있는데.”
“말씀드렸다시피 학회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충당할 겁니다. 대신 시설 관리를 시에서 맡아주시는 거죠. 이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깐깐하게 보거든요.”
“깐깐해야죠. 그만큼 중요한 사업이니.”
장을 넘기며 나머지 내용도 살펴봤다.
“세부 조정은 현지 도착 후 이뤄지겠지만, 저희가 제시한 것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겁니다.”
“네, 그럴 것 같네요.”
루드 팩토리의 지원 시설이 스파우로 들어온다. 삶의 질이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다.
마법공학을 적대시하며 기피하는 사람들도 개선된 의수와 의족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테고.
“그러면…….”
정확한 일정을 잡기 위해 입을 열 때였다.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죄송합니다. 회의 중이었네요.”
문밖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율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가하란, 오랜만이야. 나 알아보겠어?”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가하란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 들었어, 율 누나도 같이 왔다는 걸. 내가 먼저 찾아갔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었네.”
“됐어. 이렇게 봤으면 됐지 뭐.”
둔에 도착한 날, 가하란과 가장 먼저 만난 밀레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던 애가 아니라고.
아, 한마디 더 하긴 했었다.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다고.
그 말대로 면상을 후려친 건지, 아니면 상냥한 말로 다독인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가하란은 소문처럼 피폐한 상태가 아니었다.
“회의실은 왜? 쓰려고?”
테리가 물었다. 가하란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놓고 간 물건이 있어서 잠깐 올라온 건데, 이따가 가져가도 돼.”
가하란은 문을 슬며시 닫았다.
“말씀 나누세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이었다.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샬롯이 허둥지둥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잠깐만!”
샬롯이 문을 확 잡아당겼다. 벙벙한 얼굴로 바라보는 가하란을 향해 샬롯이 다가섰다.
“나, 나 기억 안 나?”
“네?”
“그러니까…… 그게…….”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율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망설이는 샬롯은 오랜만에 본다.
워낙 거침없는 아이라 눈치 보는 법을 모르는데, 가하란 앞에서는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가하란. 혹시 바빠?”
율이 말했다.
“아니, 바쁘진 않아.”
“그러면 걔하고 잠깐 놀아줄 수 있을까?”
말이 끝나자마자 샬롯이 째려봤다.
“언니. 놀아주다니, 무슨 표현을 그렇게 해. 나 애 아니야.”
“말이 잘못 나왔네. 놀아주는 게 아니라 얘기를 들어줄 수 있어? 샬롯이 할 얘기가 있거든.”
가하란이 방 안 분위기를 살핀다. 사정을 알고 있는 테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따가 봐.”
율은 쭈뼛거리며 나서는 샬롯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 저희는 일 얘기를 마저 해볼까요?”
테리가 주의를 환기하며 회의를 이끌어갔다.
율은 닫힌 회의실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 * *
정작 얼굴을 보고 나니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꿈에서는 몇 번이고 봤다.
불의 산과 얼음의 바다가 뒤엉키는 곳에서 한창 방황하고 있을 때 가하란이 나타났다.
굴러다니는 거대한 바위 같은 것도 보였는데,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았다.
확실하게 떠오르는 건 흐릿한 하늘색 눈과 가하란이란 이름. 그리고 날 도와줬다는 거.
“우리 어디서 만났나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가하란이 물었다. 샬롯은 아주 작게, 정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꿈이라고.
“네? 꿈이요?”
“……어.”
말하는 게 왜 이렇게 어렵지?
이상할 정도로 버거웠다. 슬며시 손을 올려 입술을 툭 때렸다.
평상시처럼 말하면 되는데. 입술이 벌에 쏘인 것처럼 퉁퉁 불어서 잘 안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잠깐만요.”
계단 끝에서 가하란이 멈춰 섰다. 1층 복도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기능 점검이 있나 보네요. 위로 올라가죠. 거긴 조용할 테니.”
입을 꾹 다문 채 가하란의 등만 보며 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3층이었다.
“……어. 잠겼네요.”
문고리를 잡고 당기던 가하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제가 1층에서만 일하거든요. 위로는 잘 안 올라와서.”
머쓱한 표정을 짓는 가하란이었다.
“밖에 가게로 갈까요? 앞집에서 파는 주스가 꽤 맛있어요. 차도 괜찮고요.”
샬롯은 물끄러미 가하란을 바라봤다. 꿈에서 본 모습과는 확실히 달랐지만, 눈매는 똑같았다.
목소리도 마찬가지고.
생글생글 웃는다면 정말 비슷할 텐데.
“웃어보면 안 돼?”
“네?”
“이렇게 말이야.”
샬롯은 입꼬리를 있는 힘껏 끌어 올렸다. 어정쩡했던 가하란의 얼굴에 금방 웃음이 잦아들었다.
똑같다.
그 웃음을 보고 나니 안심이 되고, 마음이 놓이니 돌덩이처럼 무겁던 입술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어색해.”
“네?”
“그렇게 말하는 거 어색하다고. 편하게 말해. 우리 비슷한 나이잖아?”
“아, 네. 그렇죠. 근데 일하다 보니 버릇이 됐어요.”
가하란이 숨을 살짝 들이켰다.
“할 말이 있는 거지? 여긴 어수선한데 가게로 갈까?”
“아니. 가게보다 좋은 곳이 있어. 나만 갈 수 있는 특등석이야.”
두리번거리며 창문을 찾았다. 반대편 복도 끝에 큼지막한 창이 보였다.
멀뚱히 서 있는 가하란을 데리고 창가로 갔다.
“짧은 얘기라면 여기서 말하는 것도…….”
샬롯은 도리질로 가하란의 말을 막았다. 창문 걸쇠를 올리고 커다란 창을 밀었다.
“올라가자.”
“어? 올라가자니? 어딜?”
“어디긴!”
샬롯은 손가락을 세워 위를 가리켰다.
“가장 좋은 자리지.”
그리고 왼손을 살짝 흔들었다. 친근한 바람이 모여들었다. 속삭이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몸이 둥실 떴다.
“가자. 오늘은 날씨도 좋아서 지붕에 앉으면 기분이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창문 밖으로 몸을 뺄 때였다. 이끌려 와야 할 바람이 제자리에 맴돌았다.
샬롯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하란을 바라봤다. 가하란을 들어 올려야 할 바람이 말을 듣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다.
“마법이야?”
가하란이 놀란 듯이 되물었다.
“넌 왜 안 떠?”
샬롯도 놀라며 되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