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9화
“그게…… 옛날이었다면 절대 안 믿었을 거예요. 시간은 절대적인 거잖아요. 그런데 다르게 흐르다니.”
권력가들이 한 번쯤은 꿈꿨을 영원한 삶. 입으로 전해지는 얘기는 물론, 역사서에도 버젓이 기록된 불로불사를 위한 기행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황금을 녹여 마신 왕, 천년 고목의 뿌리를 달여 몸속에 투여한 왕, 기괴한 마법에 손을 댄 왕.
개중에는 오크족 주술사를 협박해 영생의 비밀을 알려고 한 왕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다들 말년에 개고생하다가 죽었다.
간절히 바라지만 결코 이룰 수 없는 꿈.
시간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원이었다.
“근데, 요즘 일들을 생각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해요.”
인식을 초월한 거대한 힘, 뿌리의 마나가 세상을 바꿔버렸다. 이제는 물고기가 물 밖으로 튀어나와 입을 뻐끔거리며 숨을 쉰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었다.
민 교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만 해도 정신이 없어서 멍하니 있었어. 틈새를 빠져나오니 눈앞에 둔이 보이질 않나,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니 미친 사람 취급당하질 않나.”
“5년이란 시간을 건너뛰었다고 하면 일단 정상으로 보이진 않겠죠. 아, 전 교수님 믿어요. 진짜로.”
밀레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 표리영역이란 곳에 어쩌다가 갇히신 거예요?”
“내 발로 걸어 들어갔으면 그나마 덜 억울했을 거야. 그야말로 사고였어. 그냥 휩쓸려 버렸지.”
엘리가 불뚝 솟은 배를 쓰다듬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귀신 들리다, 도깨비에게 속아 넘어가다. 이런 말 들어봤어요?”
“어릴 때 들어본 것 같기는 하네요.”
“이 말의 의미가 뭘까요?”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미쳤다는 뜻 아니었나요?”
“보통 그렇게도 쓰이죠. 하지만 이유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을 향해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하죠.”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근데 자주 쓰이는 표현은 아니에요.”
“그렇죠. 잊힌 것들의 이야기니까.”
“잊힌 것들?”
“밀레나라고 했죠?”
“네.”
엘리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밀레나는 도깨비를 믿어요?”
“도깨비요?”
“월 오브 더 위스프, 잭 오 랜턴. 이런 것들 들어본 적 있죠?”
“네. 동화에 주로 나오는 애들이잖아요. 축제 때 기괴한 모형으로 만들기도 하고.”
말을 꺼냈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밀레나는 동떨어진 두 단어를 하나로 엮었다.
“표리영역이란 게 도깨비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딱 그 정도.”
“뭐가요?”
“딱 그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요. 더는 알 필요 없어요. 알아봤자 서로 피곤해질 뿐이고요. 물론 청소꾼이 될 생각이 있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줄게요. 어때요?”
강압적인 눈빛이었다. 강렬하게 요구하는 눈동자에 밀레나는 반사적으로 목을 뒤로 뺐다.
“청소꾼이요?”
“정말 보람차고 신나는 일이에요. 테스트를 해봐야 알겠지만, 밀레나라면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어때요? 세계 평화를 위해 청소꾼이 되지 않겠어요?”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포만감에 절여져 흐리멍덩했던 눈인데.
밀레나는 시선을 민 교수 쪽으로 옮겼다. 엘리와 눈을 마주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마음에 들었다니 고마운 일이네요. 청소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어. 지금이야 약간 관심이 생겨서 엘리와 동행할 생각이지만.”
“동행이라면…… 도시를 떠나실 건가요?”
“당장은 아니고. 정보를 수집한 다음에.”
밀레나는 ‘복귀’라는 단어를 혀끝에 올렸다가 안으로 삼켰다.
제국이 사라졌다. 교수란 직함 역시 과거의 산물이 됐다. 스콜라도 뿔뿔이 흩어졌고.
잠깐의 침묵이 뭘 의미했는지, 민 교수는 다 이해한 모양이었다.
“돌아갈 자리가 없어졌잖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세상의 비밀이나 들춰보려고.”
“아까 말씀하신 퀼이란 분을 찾아가는 건가요?”
“어. 일단은 그 사람부터 찾아야 해. 표리영역의 권위자라고 하니까 가서 물어봐야지. 내가 뭘 겪은 건지, 그리고 앞으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함께하시는 건 어때요?”
“함께?”
“어머니가 용병단을 만들었어요. 마수 사냥이 메인인 용병단이에요.”
민 교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필렌도 둔에 있는 거야?”
“네. 아까 저와 만났던 바겐에 엄마, 아니, 어머니가 계세요. 어머니도 교수님을 만나면 좋아하실 거예요.”
민 교수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필렌은 만나봐야지. 오랜만에 얼굴도 보고. 하지만 용병 일은 안 할 거야. 지금은…….”
엘리를 바라보며 말을 잇는 민 교수였다.
“이쪽에 더 흥미가 생겼거든.”
시선을 받은 엘리가 방긋 웃었다.
민 교수는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뜻을 굽힐 사람이 아니니 권유는 여기까지.
“정보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들은 게 많아요. 뭐든 물어보시면 답변해 드릴게요.”
“퀼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리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모르겠네요. 애초에 퀼이란 이름은 너무 흔해요. 둔에도 몇십 명은 있을걸요?”
“퀼이 아니라 퀼비언이라면요?”
“퀼비언? 흔한 이름은 아니네요. 퀼비언, 퀼비언…….”
이름을 몇 번 되뇌다 보니 이질감이 들었다. 낯선 이름인데 왜 이리 친숙하지?
그리고 듣다 보니까 ‘퀼’이란 이름도 아는 사람을 통해 들어본 것 같았다. 어디서였지…….
고민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돼서 추모길을 알아낼 수도 없어요. 퀼비언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퀼이라면 여기저기 소문이 났을 텐데.”
추모길.
밀레나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지금 말한 퀼이란 사람이, 마도사 퀼비언을 말하는 건 아니죠?”
“왜 아니겠어요? 맞아요.”
엘리가 주변을 훑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무슨 문제있나요? 퀼이 미쳐서 사람을 죽였다거나, 도시를 전복시켰다거나.”
“아, 아니요. 그런 일은 없어요.”
“휴, 다행이네요. 밀레나가 놀라는 표정을 지어서 혹시나 했어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퀼이 뭔 짓을 저질렀구나,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일인군단.
마도사 퀼비언.
추모길을 돌아다니는 위대한 마법사.
인세(人世)와 관련 없는, 방랑 중인 초월자를 찾고 있다는 건가?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엘리의 말투였다.
“퀼비언을 잘 아시나요?”
급하게 말하느라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갔다. 겸연쩍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는 있지만, 잘 알지는 못해요. 아니, 잘 안다고 해야하나? 아니지. 퀼을 잘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안다는 건 심오한 거잖아요? 그렇죠?”
두루뭉술한 표현이었으나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다.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죠.”
“맞아요, 그거예요. 그래도 나름은 친하다고 생각해요. 퀼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음, 다들 퀼을 좋아해요. 그래서 돕고 싶고요.”
“도와요? 그 마도사를?”
‘일인군단’이란 말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무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대.
젊은 무장이 객기를 부리며 마도사의 앞을 막았다가 개처럼 땅을 기면서 도망친 사건은 꽤 유명했다.
그것 말고도 마도사의 이름을 드높인 일화는 셀 수 없이도 많았다.
개중에는 거병을 손가락으로 쓰러트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믿기지는 않지만.
압도적인 무력으로 뭐든지 손에 넣을 수 있는 인간.
그런 마도사를 돕는다?
“퀼도 사람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도움이 필요하죠.”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엘리였다.
“아무튼 퀼이 말썽 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안심이에요.”
안도하는 엘리를 보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마도사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겠구나. 만약 엘리의 걱정대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뒷수습은 누가 할 수 있지?
“저기, 마도사……님께서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죠?”
미친 건 아니죠, 라고 물으려다가 황급히 말을 바꿨다.
질문을 받은 엘리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퀼이 가끔 짜증 부릴 땐 위험하긴 하지만, 그럴 때를 제외하고는 괜찮아요.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안 벌어질 거예요. 아마도. 음, 아마도.”
굉장히 불안하게 들리는 ‘아마도’였다.
“아무튼 퀼비언에 관해 들은 얘기 없어요?”
“그라운드 제로 이후 마도사를 목격한 사람은 없어요. 아니, 봤더라도 소문이 퍼질 환경이 아니에요.”
밀레나는 변한 환경에 관해 설명했다.
득실거리는 마수, 제국이 해체되고 등장한 도시국가, 도시 간 이동을 위해 개발된 소형 거병 등등.
예전처럼 통행량이 많아 소문이 자연스럽게 퍼지던 시대가 아니었다.
“아까 시장에서 보긴 했지. 작은 거병을 말이야. 두 달 전, 아니, 6년 전에 양산 계획을 잡아놨는데 이렇게 실현될 줄이야.”
민 교수가 허탈하다는 듯이 말했다.
“덴스 교수가 소형화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된 건가? 올란트 씨도 같이 참여했고?”
올란트.
예상 못 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밀레나는 차로 입 안을 적신 후 말했다. 둔에서 덴스를 중심으로 한 학회가 세워졌으며, 그 안에 올란트는 없다고.
“돌아가셨어요. 5년 전에.”
“……그랬구나.”
민 교수가 안경을 끌어 올렸다.
“사망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감히 잡히질 않았어. 나는 그날을 목격하지 못했으니까.”
고개를 돌리는 민 교수였다. 밀레나도 민 교수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밖에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기계인형이 가게 홍보를 위해 머리 위로 간판을 들어 올렸고, 그 옆으로 작은 자동수레가 지나갔다.
“의수와 의족으로 대체한 자들이 저리도 많아. 마나 보급 문제로 예산안조차 받아낼 수 없었던 기계인형이 작은 가게를 홍보하고 있어. 정말 말도 안 되게 달라졌어.”
“네, 너무 많은 게 변했죠.”
“바뀌었지만 여전히 둔은 활기차. 사람들도 많고. 그래서였을까? 희생자가 많았다는 말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와닿지 않았어. 생판 모르는 남의 죽음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말끝을 흐린 민 교수가 앞을 바라보았다.
“가하란은? 그 꼬마는 살아 있겠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
“가하란은 무사해요. 오른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빌어먹을 세상이네.”
세월이 지나서 잊고 있었다.
올란트를 대신해 가하란을 맡았던 사람이 민 교수라는 걸.
“꼬마는 지금 어디 있어?”
밀레나는 살짝 웃으며 가게 안 손님을 가리켰다. 왼쪽 의수로 자연스럽게 포크를 움직이는 여자를.
“가하란은 이제 꼬마가 아니에요. 둔에서도 이름난 개발자가 됐어요. 가하란이 제작에 참여한 의수와 의족은 품질이 뛰어나서 다들 좋아하죠.”
“애가 똘똘하긴 했지.”
“지금 보면 깜짝 놀랄걸요? 부쩍 컸어요. 키도 저보다 좀 큰 거 같고.”
“그건 네가 작아서 그래.”
“……민 교수님은 여전하시네요.”
“당연하지. 난 몇 달 전에 널 봤으니까. 몇 달 만에 사람이 바뀌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거야.”
밀레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제 어쩌실 거예요?”
“일단은 필렌하고 인사해야지.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볼지 모르니까. 그리고, 가하란도 봐야 하고.”
잠자코 있던 엘리가 말문을 열었다.
“퀼을 찾는 것도 잊지 마요.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할 수도 있어요.”
“알았어. 안부만 전하고 떠날 생각이야. 그때까지만 참아.”
“닦달하는 건 아니에요. 민이 슬퍼하는 거 다 보이니까 천천히 시간 들여도 돼요. 다만, 퀼을 빨리 찾아야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그래.”
밀레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어머니부터 만나러 갈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