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78화 (251/558)

제278화

“잠깐만요!”

밀레나는 서둘러 걸음을 뗐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민 교수였다.

5년 전 소식이 끊긴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

연락 두절은 곧 사망을 의미하는 시대였다. 민 교수 역시 안타까운 사고로 삶을 마감했다고 생각했다.

“민 교수님!”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외쳤다. 온갖 장비들의 시연 소리로 북적거리는 바겐. 목소리가 닿지 않았는지 민 교수는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밀레나는 눈을 씰룩이고는 신체술을 사용했다. 몸을 휘감는 마나를 느끼며 좌측에 있는 간이 매대로 뛰어올랐다.

“죄송해요!”

벙찐 얼굴로 바라보는 상인에게 재빨리 사과한 후 저 멀리 보이는 민 교수를 향해 뛰었다.

발아래로 수십 명의 사람이 지나갔다.

“민 교수님!”

있는 힘껏 소리치자 민 교수가 반응했다. 안경을 쓴 모습이 5년 전과 똑같았다.

민 교수가 왼손을 뻗었다. 밀레나는 그 손에 몸을 맡겼다. 품에 안기듯 떨어진 밀레나가 민 교수를 바라봤다.

“밀레나?”

민 교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흐르긴 흘렀네.”

인사치고는 미묘한 말이었다. 밀레나는 민 교수 곁에서 한 걸음 떨어졌다.

누더기나 다름없는 망토와 이음새가 헐거워진 상의. 폭이 좁은 하의는 무릎 쪽이 잘게 찢어져 있었다.

“민 교수님, 대체 어디 계시다가…….”

질문을 끝맺기도 전에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누구예요? 아는 사람이에요? 친분이 두텁나요? 아니, 모르는 사람이라도 상관없어요. 밥 좀 사줘요, 네?”

말을 쏟아내는 여자였다. 나이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인다. 단발머리인데 유달리 앞머리가 길어 눈을 살짝 가렸다. 그게 불편한지 몇 번이고 앞머리를 넘기고 있었다.

“엘들리아. 진정해.”

“전 진정하고 있어요. 그리고 엘들리아가 아니라 엘리라고 불러 달라고요.”

민 교수의 지인인가?

‘엘리’라는 여자의 몰골도 썩 좋지는 않았다. 몇 주 동안 같은 옷만 입고 지낸 것처럼.

“왜 그렇게 봐요? 설마 냄새나요? 아니지. 냄새날 만도 하지.”

소매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엘리였다.

“밀레나. 많이 컸네. 예상했던 것보다 더.”

“그야 5년이나 지났으니까 커야죠. 근데 민 교수님은…….”

뭐라고 해야 할까.

옷이 누더기인 걸 제외하면 5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마흔 중후반에 들어섰을 텐데, 변화가 전혀 없었다.

민 교수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지금도 이해되질 않아.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워. 근데 네 얼굴을 보고 나니까,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네.”

심각한 어조로 말하는 민 교수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민 교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민, 너무 많은 걸 말하면 안 돼요.”

엘리가 끼어들었다. 눈웃음 짓고 있지만, 이쪽을 경계하는 게 느껴진다.

“이걸 말해봤자 믿을 사람도 몇 없을뿐더러, 또 믿더라도 크게 문제 될 게 있을까? 세상이 이 꼴로 변했는데.”

민 교수가 눈 사이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엘리는 입을 크게 벌려 무언가 반박하려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저기, 민 교수랑 잘 아는 사이죠?”

“네, 뭐. 아는 사이긴 해요.”

“그러면 일단 밥 좀 사줄래요? 제대로 된 밥을 먹고 싶어요.”

“네?”

“농담 아니에요. 정말, 정말 제대로 된 밥이 먹고 싶어요.”

얼떨떨한 눈으로 엘리를 바라봤다. 웃어야 할지 정색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그래도.

“밥은 중요하죠. 따라오세요.”

* *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기, 일단 먹고 말씀하시죠?”

고개를 끄덕인 엘리가 분주히 포크를 움직였다. 주문한 음식이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덕분에 한숨 돌렸네.”

민 교수가 냅킨으로 입을 훔쳤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그라운드 제로 이후 소식을 못 들어서 걱정했어요.”

“그라운드 제로. 다들 그렇게 부르더라.”

민 교수가 차로 목을 축였다.

“내 꼴을 보면 알겠지만 한동안 길을 헤맸어.”

밀레나는 민 교수가 벗어둔 망토를 바라봤다.

“고생하셨겠네요. 요즘 도시 간 여행이 쉽지는 않죠.”

“여행, 그래. 어찌 보면 여행이긴 했지.”

민 교수가 엘리를 쓱 쳐다봤다. 구운 바게트에 파스타 소스를 듬뿍 찍어 먹던 엘리가 눈을 깜빡였다.

“얘한테는 어느 정도 설명하고 싶은데. 입이 가벼운 아이도 아니고.”

“그래도…….”

“온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아니면 돈 있어?”

“……뭐,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까요. 퀼도 이해해 주겠죠. 아니, 자기가 이해 못 하면 어쩔 건데요!”

갑자기 성질을 부리는 엘리였다.

퀼?

사람 이름인 거 같은데.

“밀레나, 잘 들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농담도 아니고 미쳐서 헛소리하는 것도 아니야.”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그렇게 겁을 주세요.”

밀레나는 살짝 웃었지만, 민 교수의 표정은 굳은 채 변함이 없었다.

이거, 상당히 무거운 이야기다.

자세를 고치고 귀를 열었다.

“성도에서 헤어졌을 때 기억나?”

“헤어졌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네요. 민 교수님이 갑자기 사라지셨으니까요.”

“꼼꼼하긴. 그땐 황제의 부탁으로 국경으로 갔었어. 볼로스 쪽이었지.”

“볼로스요?”

5년 전 볼로스.

이제는 알고 있다. 그곳에 엄마가 있었다는 걸.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얼 하러 거기까지 간 건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어떤 일을 처리하고 복귀하는 길이었어.”

“혹시 저희 어머니를 만나셨나요?”

“필렌에게 얘기를 들은 거야?”

“정확한 이야기는 못 들었고, 5년 전에 어머니가 그곳에 계셨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렇구나. 네 말대로 필렌과도 관련 있는 일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별 의미 없는 거래가 됐지만.”

민 교수는 목이 타는지 연거푸 차를 마셨다.

“볼로스에서 돌아오는 길에 난 어떤 일에 휘말렸어.”

“어떤 일이요?”

모호한 표현이었다.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네. 이쪽 세상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해야 하나? 내 설명이 답답하겠지만 그래도 이해해줘. 알지 못하는 걸 설명하려니까 나도 머리가 아프네.”

이쪽 세상과 관련 없는 일이라니.

민 교수가 서두에 꺼냈던 ‘농담’과 ‘헛소리’가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그라운드 제로와 연관이 있는 건가요?”

“그것도 확신할 수 없어. 상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정확한 원인을 규명하려면 전문가를 찾아가야 할 것 같은데…….”

민 교수가 엘리를 바라봤다. 엘리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퀼을 찾아가면 대강은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 퀼을 찾는다면 말이지.”

“이제 막 빠져나왔잖아요. 저한테도 약간의 시간을 줘요. 그리고, 민. 그렇게 째려보면 좀 무서운 거 알죠?”

배시시 웃던 엘리가 다시 음식에 손을 댔다. 저 많은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 건지.

“빠져나왔다는 게 어떤 의미죠?”

“다른 장소에서 이곳으로 나온 거야. 아까 말했지? 헤맸다고.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사실이야. 우린 어제만 해도 이곳과 다른 장소에 있었어.”

“기존의 표리영역과는 달랐어요. 제가 알던 틈새는 그런 곳이 아니었거든요.”

엘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표리…… 뭐라고 하셨죠?”

“다른 세계라고 생각하세요. 민이 말한 대로 얻어먹은 게 있으니까 어느 정도는 말해줘야죠. 물론 말한다고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민 교수가 으깬 감자를 숟가락으로 퍼 엘리 입에 넣었다.

“넌 그냥 먹고 있어.”

“알겠어요.”

민 교수는 창밖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믿기지 않아. 여기가 둔이라는 게.”

“저도 그래요. 5년 전에 봤던 거리 풍경을 떠올리면, 같은 곳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5년 전이라.”

실없게 웃는 민 교수였다.

“밀레나. 난 8개월 만에 보는 거야.”

“네?”

“8개월 만에 보는 둔의 풍경이라고. 5년 전에 본 게 아니라.”

“무슨 말씀이세요? 1년 전쯤에 여기 오셨어요?”

“아니.”

민 교수는 이마를 짚으며 멍한 눈으로 찻잔을 보았다.

“왜곡하지 말고 들어줘. 난 표리영역 안에서 두 달 동안 헤매다가 돌아왔어.”

“표리영역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두 달 동안 고생하신 건 알겠어요.”

엉망인 옷이 그간의 고난을 설명해주고 있었으니까.

“뭔가 이상한 걸 못 느끼겠어?”

“네?”

“난 두 달 전에 표리영역으로 들어갔고, 어제 거길 벗어났어. 끔찍한 경험이었지. 하지만 나오고 나니까 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

문맥상 이상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두 달 전’이란 표현이 거슬렸다.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교수님과 함께 둔을 떠나 성도로 간 게 6년 전이었죠.”

“맞아. 그리고 다음 해 여름쯤 난 볼로스로 갔지.”

“볼로스로 떠나신 건 5년 전이잖아요. 복귀하실 때 그 표리영역이란 곳에서 헤맸다고 했으니…….”

“네 기준에는 5년 전이지만, 난 아니야. 나한테는 두 달 전 일이야.”

“교수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5년 전이 아니라 두 달 전이라니?

그리고 둔을 8개월 만에 다시 찾은 거라니?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이 머리를 때렸다. 5년 전과 별 차이가 없는 민 교수의 외관.

사람은 늙는다. 마나로 육체를 단련해온 민 교수도 시간의 엄숙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이에 비하면 젊어 보인다고는 하나 민 교수는 마흔이 넘었다.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면 인상이 변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민 교수는 그대로였다.

성도에서 봤을 때와 별 차이가 없다.

밀레나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성장기인 만큼 부쩍 자랐다. 시간은 멀쩡히 흐르고 있었다.

근데 민 교수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요? 민 교수님에게 그라운드 제로는 5년 전이 아니라 두 달 전…….”

“맞아. 그래서 어제 막 이곳으로 나왔을 때 내가 미친 줄 알았어. 모든 게 바뀌어 있었으니까. 없던 산이 생겨났고, 길가에는 거대한 균열이 자리를 잡고 있었어. 마나 밀도는 무슨 사고라도 난 것처럼 높아져 있었지.”

민 교수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나는 그 안에서 두 달간 갇혀 있었을 뿐인데, 나와 보니까 5년이 지나 있었어. 아니지, 이제 6년째인가?”

그때였다. 엘리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좋게 생각하자고요. 남들보다 젊어진 거잖아요? 음, 그래요.”

싱글벙글 웃던 엘리가 금세 울상을 지었다.

“아니야, 이건 말이 안 돼. 이씨!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가게 안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다. 민 교수가 손을 뻗어 엘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원래 좀 더 얌전한데, 지금 상태가 안 좋아.”

“교수님 말이 사실이라면……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이상하죠.”

“그래, 사실이라면 말이지.”

민 교수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내 말이 안 믿기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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