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7화
“일찍일찍 좀 다니시죠.”
하우스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일찍 왔잖아.”
엄마는 상큼한 눈웃음으로 하우스의 잔소리를 무마하며 줄을 섰다.
밀레나는 서류 봉투로 어깨를 툭툭 치며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바라봤다.
“둔은 역시 둔이네요. 사람이 이렇게나 많고. 삼촌은 익숙하시겠어요, 둔에서 생활하셨으니.”
“아니. 나도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본다.”
“그래요?”
“내가 둔에 있었던 건 2년 전이야. 그때도 사람이 많긴 했지만, 이렇게 바글거리지는 않았지. 2년 사이에 도시가 완전히 달라졌어.”
쿠웅, 육중한 소리가 뒤쪽에서 들렸다. 해더트럭이 방지턱을 넘어 경매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트레일러 위에 각종 모듈이 실려 있었다. 부분 조립을 끝낸 거병도 몇 기 보인다.
“배터리 효율이 올라가도 거병 크기는 예전처럼 커지지 않네요.”
“아무리 좋아졌다고 한들 소모량이 어마어마하니까. 국가 단위에서 굴리던 걸 개인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지.”
해더트럭이 한 대 더 들어왔다.
상단에 현수막을 달아놓았다.
-당신이 찾던 그게 여기 있습니다.
“진부한 광고 문구네요.”
“진부해도 읽혔으면 성공이지. 그리고 저긴 진부해도 돼.”
하우스가 손가락을 들어 해더트럭 옆면을 가리켰다.
철갑을 두른 말이 그려져 있었다. 은빛으로 번쩍거린다.
“어디서 본 마크네요.”
“봤겠지. 내 기체가 저 상회에서 받아온 거니까.”
“공방 클랜이 아니라 상회에서요? 상회에서 거병도 직접 제작하는 거예요?”
“둔에 거점을 둔 상회는 몸집이 하나같이 커. 상회 밑으로 온갖 시설이 몰려 있지.”
“둔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저만한 덩치의 상회가 옹기종기 붙어 있다고요? 이권 다툼이 장난 아닐 텐데.”
밀레나는 드넓은 공터 곳곳에 자리 잡은 해더트럭과 전시대를 보며 말했다.
하우스가 코를 찡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거대상회가 있지. ‘롱캣’ 상인연합회. 그쪽에서 분쟁 조정을 맡고 있어. 그 덕분에 둔은 삼파전 구도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롱캣’이란 이름을 들으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밀레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말했다.
“상인연합회, 군벌, 그리고 학회. 들은 기억이 나네요.”
“둔 역시 도시국가 체제를 택하고 시장을 뽑긴 하지만, 시장의 권위가 그리 강하진 않아.”
“그렇다고 해서 무시할 수도 없겠죠? 그 강하지 않은 시장이 어디에 입김을 불어넣느냐에 따라 양상이 달라질 테니. 세상이 바뀌어도 고리타분한 정치는 그대로네요.”
“사람은 바뀌면 죽는다잖아.”
나열된 모듈을 바라보며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밀레나는 고개를 빼 앞을 바라봤다. 검붉은색 정장으로 멋을 낸 중년 남자가 지팡이를 쥔 채 대중 앞에 섰다.
옆에는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두 손을 모은 채 대기 중이었다.
남자가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쳤다. 여자가 앞으로 나서며 두 팔을 들어 올리고 눈을 감았다.
은은한 마나파장이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귀한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바겐의 진행을 맡은 에콜입니다. 옆에 귀여운 숙녀분은 확성 마법을 도와줄 카산 양입니다.”
자신을 에콜이라 소개한 남자는 작게 헛기침한 후 말문을 다시 열었다.
“저희 롱캣 상인연합회는 귀빈들의 원활한 경매 참여와 구매를 위해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롱캣 배지를 달고 있는 직원에게서 경매 참여 방법을 상세히 알 수 있으며, 기타 문의 역시 가능합니다.”
같은 옷을 입은 남녀가 경매장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왼쪽 가슴에는 꼬리가 긴 고양이 배지가 달려 있었다.
“일반 판매 물품은 우측, 경매 물품은 좌측에 배치해 뒀으나 상호 협의로 구매 방식을 변경할 수도 있습니다. 모쪼록 바겐을 즐겨주시길 바라며, 문제가 생길시 언제든 저희를 찾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두 팔을 치켜들고 있던 여자가 서서히 팔을 내렸다. 상당히 지쳐 보였다.
“가자.”
줄 서 있던 사람들이 경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지붕 없는 시장, 바겐.
중요 거래 물품은 대부분 경매로 진행돼 경매장이라 부르지만, 일반판매 물품도 꽤 많았다.
“어디부터 갈 거예요?”
밀레나는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하우스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 딱 봐도 마수 사냥을 업으로 삼은 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개중에는 밀레나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눈인사하며 몇 명 지나치자 경매대가 보였다.
“오늘도 저희 코안 공방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공방 역사에 관해 긴 설명을 이어 나가고 싶지만, 여러분들의 시간을 뺏을 순 없죠. 그러니 이 물건으로 우리 공방의 설명을 대신하겠습니다.”
4미터 길이의 자동수레에 상부 외장갑이 실려 들어왔다. 보자마자 오, 하는 소리가 나왔다.
“아시는 분들은 아주 잘 아시고, 모르시는 분들은 이제부터 잘 아시게 될 코안 형식의 외장갑입니다. 범용성은 물론 다양한 오토마타와의 적합률도 뛰어납니다.”
높이 3미터 정도 되는, 건설용으로 보이는 거병이 자동수레 옆에 섰다.
“설명하면 입만 아프죠. 보여 드리겠습니다.”
성인 몸뚱이만 한 날이 박힌 곡괭이를 거병이 들어 올렸다.
사람들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보시죠!”
외침과 동시에 곡괭이가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했다.
카아앙!
외장갑에서 불꽃이 튀었다. 정확히 내려친 곡괭이가 비스듬히 미끄러지며 바닥을 내리찍었다.
그 뒤로 세 번 정도 곡괭이가 움직였다. 찍을 때마다 요란한 불꽃이 튀었다.
“가까이 와서 확인해 보시죠.”
하우스가 움직였다. 밀레나도 뒤따라갔다.
매캐한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곡괭이가 훑고 지나간 외장갑 표면에 검은 그을음이 생겨 있었다.
훼손됐지만 뚫리지는 않았다.
“안쪽도 보여드리죠.”
상부 외장갑 덮개를 열었다. 체임버가 들어갈 자리에 사슬로 연결된 인형이 있었다.
“마법적 처리를 안 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충격 흡수율이 좋습니다. 이 상태로 한 번 더 진행해보죠.”
거병이 손으로 외장갑을 내리쳤다.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사슬의 반동은 적었다. 연결된 인형도 출렁거리지 않았다.
“사용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한 공법입니다. 르도석과 유타 모래의 배합률이 기술의 핵심이죠. 청철을 베이스로 해서 단가도 기존 제품과 비교하면 그리 높지 않습니다.”
기능이면 기능, 가격이면 가격.
자부심 넘치는 말이었고, 코안 공방이라면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밀레나도 마수 사냥을 해오며 몇 번이고 코안 공방의 외장갑을 봐왔다.
격전을 치른 뒤에도 우그러짐만 있을 뿐 찢기거나 갈라짐은 없었다.
용병들 사이에서는 입소문을 타고 꽤 유명해진 공방.
“그랑겔 툴의 개량으로 제조 기간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주문 물량을 소화해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쉽게도 모여주신 분들 중, 두 분만 계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계약규모는 거병 다섯 기 분량의 외장갑입니다.”
허, 하우스가 허탈한 소리를 냈다. 뒤에 서 있는 엄마도 혀를 찼다.
“하우스. 예상보다 빡빡하겠는데.”
“그러게요. 두 팀만 받는 거면…….”
“저번에 낙찰금이 얼마였지?”
“옛 제국 금화 다섯 개였을 겁니다. 계약금만요.”
제국이 멸망했지만 제국 중앙은행이 발행했던 금화는 여전히 쓰이고 있었다. 그것도 꽤 높은 가치를 형성한 채로.
“우리 예산으로 비벼볼 수 있으려나.”
“예전과 같은 수준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힘들어 보이네요.”
“일단 다섯 개로 적어내고, 따로 자리를 만들어 봐야겠네.”
밀레나는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자리?”
“가격 조정을 해봐야지.”
“우리한테 카드가 있어? 코안 공방이 혹할 만한 재료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엄마가 빙긋 웃었다.
저 자신감 넘치는 얼굴.
“내 전용기에 홍보 마크를 다는 조건으로 가격을 낮춰 봐야지.”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웃어넘기겠지만, 엄마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른 고개의 푸른 기사 필렌이 사용하는 외장갑!
“대장도 이제 한물갔어요.”
하우스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모르지. 내 팬이 있을지도. 손 놓고 있는 것보다야 낫잖아?”
“그렇긴 하죠. 일단 적어서 냅니다.”
사전에 받은 서류에 금액을 적어 공방 사람에게 건넸다.
다른 용병단들도 금액을 적어서 내거나, 따로 모여 얘기를 하고 있었다.
“블루아이만 찾아낸다면 그거 팔아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을 텐데.”
엄마가 말했다.
“엄마, 매번 그 소리 하는데 진짜로 팔 거야? 블루아이를?”
“안에 든 오토마타만 따로 빼내고 나머진 전부 처분할 거야. 요즘 전고 20미터 거병을 굴리려면 허리가 휘어. 배터리를 몇 개를 달아야 할지, 가늠도 안 돼. 그리고 이젠 블루아이도 구형이 됐어. 그 상태로 기동하는 건 손해야.”
“난 싫은데.”
“미안하지만, 블루아이는 엄마 거라는 거 잊지 마.”
“내가 물려받을 거였어.”
“누구 마음대로?”
엄마가 손가락을 들었다. 밀레나는 이마를 꾹 누르는 엄마의 손가락을 치워냈다.
“블루아이가 이 말을 들었으면 실망해서 대답도 안 했을 거야.”
“걘 나랑 함께하는 걸 바라지, 덩치 큰 쇳덩어리에 처박혀 있길 바라지 않아. 몰라도 한참 모르네, 우리 딸.”
반박하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말했다. 엄마 말고 그 누가 블루아이의 심정을 대변할 수 있을까.
“어디로 간 걸까.”
밀레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엔첸세의 본가가 있던 방향이다.
그라운드 제로가 벌어지던 날, 저택 격납고 안에 있던 블루아이가 스스로 움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아. 마나응축로를 제거한 거병이 스스로 움직이다니.”
“세상이 이 꼴이 된 건 믿어지나 봐?”
엄마의 말에 밀레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실제로 봤으면 당연히 믿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사건 당일 저택에 있던 관리인들이 제 발로 걸어 나가는 블루아이를 목격한 것이다.
아니, 그냥 움직인 것뿐만 아니라 균열에 빠질 뻔한 정원관리사를 구해 주기까지 했다.
탑승자가 없는데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인다?
시범 기동이면 가능할 수도 있다. 모든 제한을 풀어두면 오토마타가 탈로스에 직접 명령을 내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블루아이는 제한된 상태였다.
개인 저택에 놓아둔 전략 병기. 당연히 국가의 감시 아래 여러 잠금장치를 해놓았다.
그런데도 움직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평상시라면 부풀려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덮었던 반쪽뿐인 날개, 단신으로 괴생명체를 가르던 총수, 하늘을 부수던 검, 지상을 뒤엎어 버린 뿌리.
이미 상식 저편의 일이 여러 번 일어났다.
마나응축로 없이 움직이는 거병 정도야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뭐 하세요! 얼른 와요, 얼른!”
한껏 들뜬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불쑥 솟아난 얀스가 하우스와 엄마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평소에는 더없이 침착한 언니인데, 거병 모듈이 늘어선 매대를 보자마자 눈이 돌아가 버렸다.
“오늘 바꾸는 거 맞죠? 새로운 기체 구비하는 거 맞죠? 또 저한테 수리 떠넘기면 진짜 용병단에서 나갈 거예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놓고 말해.”
엄마도 흥분한 얀스는 버거운지 진정하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얀스는 거침없이 엄마와 하우스를 끌고 시연 중인 공방을 향해 나아갔다.
덩그러니 홀로 남은 밀레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거병도 좋지만 다른 마법공학품은 뭐 없나?
사근사근 말하는 기계인형 앞을 지나칠 때였다. 밀레나는 걸음을 멈추고 인파 속을 걷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민 교수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