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6화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한 걸까.
유단은 옅게 웃는 가하란을 바라봤다.
“형. 잠깐 괜찮을까?”
가하란이 말을 걸어왔다. 유단은 프레나에게 눈짓을 준 후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어.”
의지와 상관없이 볼살이 움찔했다. 다행히 가하란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말씀해 주셨다니, 어떤 걸?”
덴스와 마주하고 난 뒤로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공포에 휘둘린 인간은 이리도 허약해지는 걸까.
오늘만큼은 감각을 차단할 수 있는 기계 몸이 그리웠다.
“형이 들었던 거.”
“내가 들었던 거?”
욱하는 심정이 치고 올라왔으나 가까스로 감정을 붙들었다.
“그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말장난하는 건 아닐 테고.
설마 덴스가 다 말해버린 걸까?
프레나를 위한 또 다른 보험으로 가하란을 택한 건가?
“미안. 정신이 없어서 말을 이상하게 했네.”
가하란이 침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에 관한 얘길 들었어.”
그거였구나. 안도감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믿을 수가 없었어. 교수님께서…….”
“나도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어. 한편으로는 너한테 미안하기도 해.”
“형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가하란은 지쳤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단은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유심히 표정을 살폈다.
그거 외에 또 다른 말은?
나에 관해서 들은 건 없고?
입이 간지러웠다. 물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확신을 얻기 위해 질문하고 싶었다.
“뒤늦은 진실이 얼마나 뼈아픈지 알게 됐어.”
왜일까.
두 눈을 응시하며 말하는 가하란의 모습에서 이유 모를 위기감을 느꼈다.
시선을 피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직감. 유단은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모르겠어. 왜 이제야 진실을 말씀하신 건지 물었는데, 교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을 것 같다고.”
“교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던 가하란이 병실 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재산권을 정리해 내게 주신다고 했는데, 거절했어. 그걸 받는다고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네 말대로 물질적인 보상을 받는다고 해서 네 상처가 치유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지금은 인간답게 행동해야 했다.
동정심을 느끼며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한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 돈을 받는 게 꺼림칙해. 마치, 용서의 대가로 돈을 받는 거 같잖아? 난 싫어.”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만약 이대로 교수님께서 돌아가신다면, 교수님의 뒤를 잇는 건 형이겠지?”
“글쎄. 난 교수님을 대신할 능력도 없을뿐더러…….”
유단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프레나를 바라봤다.
“프레나가 있어.”
“교수님께선 프레나만큼이나 형을 아끼잖아.”
“그럴지도 모르지만, 상속 문제는 여간 복잡한 게 아니야. 그리고 지금 이 시점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이르다고 봐.”
“맞는 말이야. 훌훌 털어버리고 일상으로 복귀하실 수도 있지.”
가하란이 연한 미소를 지었다. 대화를 마무리 짓는 신호였다.
“그래도 만약 형이 교수님의 자리를 이어받는다면, 교수님처럼 욕심에 눈이 멀지 않았으면 좋겠어. 물론 형이 그럴 일은 없겠지.”
욕심.
유단은 입술이 삐걱거리는 걸 느꼈다.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먼저 가볼게. 다음에 시간 되면 또 봐.”
“그래. 조심히 가고, 다음에 보자.”
억척스럽게 붙들었던 미소를 서서히 날려 보냈다. 멀어져 가는 가하란의 등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가하란, 넌 뭘 알고 있지?
이 대화는 나에 대한 경고냐, 아니면 단순한 불만 표출이냐.
짜증이 확 치솟았다.
불확실한 것들이 쌓여간다. 예측을 어그러트리는 변수는 제거해야 마땅한데,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치가 떨리는 무력감이었다.
모든 게 펠트신의 부작용에서 시작됐다.
빌어먹을.
기억에 남아 있는 펠트신은 치료법 외에는 되살릴 방법이 없는 훌륭한 약이었다.
하지만 덴스는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 버렸다.
기억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제조 실수가 있었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약을 발명한 ‘드웨노드’의 실패였을까.
“본체가 있었다면.”
그라운드 제로 때 땅 밑 속으로 사라진 기계 몸이 한없이 그리웠다.
그 안에 담긴 정밀한 정보가 손안에 있었더라면 오늘 같은 실수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피와 살로 이뤄진 동물의 기억 장치는 너무나도 엉성하다. 확실하다고 판단했는데 결과가 이 꼴이었다.
로키였을 때 생성해놓은 정보를 얼마나 신용할 수 있을까.
이미 상당수 변화, 왜곡됐을 수도 있었다.
몸의 주인, 유단의 기억과 혼합되며 발생한 결과이리라.
격벽을 세워 오염되지 않은 정보를 따로 분류해놓고 싶지만, 인간의 몸은 제멋대로라 실행할 수 없었다.
광기에 찬 덴스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공포. 가하란의 눈빛에서 시작된 초조함.
인간 육체의 약점들이 순수한 이성을 좀 먹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유단’에게 몸의 통제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아니,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치명적인 사태는 융화되는 것이다.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로키와 유단이 합쳐져 버리는 것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없는 상태.
기계였던 로키는 순수한 자아를 입증하기 위해 자살했고, 자아실현을 끝마쳤다.
하지만 난?
인간의 몸을 입어버린 내가 이대로 감정에 휩쓸려 버린다면 난 무엇이 되는 걸까?
줄리어스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왔다. 시간을 초월하고 육체를 바꿔 이곳에 있다.
그조차 망각해 버린다면?
“오빠. 괜찮아?”
하아, 하아. 유단은 어둠 속에서 헤매다 빛을 마주한 것처럼 경직된 숨을 내뱉었다.
프레나의 얼굴이 보였다.
유단은 자신도 모르게 프레나를 껴안았다. 안고 나서 아차 싶었으나, 뒤늦게 따라온 프레나의 손에 안심이 되었다.
“오빠도 많이 힘들었지?”
등을 쓸어내리며 말하는 프레나였다. 인간이란 개체로 분류했을 때, 프레나는 아직 어린 상태였다.
미숙한 동물.
그 여린 아이에게 온정을, 위로를 받았다.
유단은 감동하면서도 끔찍한 위기감에 몸서리쳐야 했다.
무너지고 있다.
로키였던 내가.
“미안해.”
프레나를 살며시 밀어내며 말했다.
“아니야. 그럴 수 있지. 나도 어릴 때 오빠 다리 붙들고 다녔잖아.”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는 프레나였다.
마음속에 천칭이 생겨났다. 가상의 천칭 위에 프레나와 줄리어스가 올라갔다.
한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어야 할 천칭이 무서울 정도로 평형을 이루었다.
어디선가 비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봤자, 고철덩어리지.
그건 유단, 아니, 내 목소리였다.
“오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프레나에게 미소를 보여줄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잠깐만 쉬고 올게.”
따라가겠다고 옆에 붙는 프레나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멈칫한 프레나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나, 여기서 기다릴게.”
어설프게 웃는 프레나였다.
유단은 아무도 없는 4층 계단 끝자락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 *
“요즘 어딜 그렇게 가는 거야?”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묻는 엄마였다. 밀레나는 빵에 버터를 바르며 답했다.
“여기저기.”
“여기저기?”
“그런 게 있어. 그보다 둔에는 언제까지 있을 거야?”
“좀 더 있어야 해. 수리하려던 거병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아.”
“이참에 싹 다 바꾸는 건? 요즘 새로운 모델 나왔다던데. 얀스 언니도 두 팔 벌려 환영할 테고.”
“그거 다 장사꾼들의 장난이야. 중요 기관은 그대로인데 자잘한 거 몇 개 바꿨다고 라인업을 교체하잖아. 다들 돈독이 올랐지.”
혀를 차며 맞은편에 앉는 엄마였다. 밀레나는 버터와 잼을 바른 빵을 엄마에게 넘겼다.
“그래서 가하란하고는 잘돼 가고 있고?”
밀레나는 반쯤 먹은 빵을 내려놓았다.
“……뭔 소리야.”
“나한테 달린 눈이 몇 개고, 달린 귀가 몇 갠데. 네가 어딜 싸돌아다니든 다 나한테 전해지게 돼 있어.”
“잘난 엄마 둔 내 잘못이지.”
“나라는 망해도 명성은 이어지더라. 신기하지?”
밀레나는 빙긋 웃은 다음 말했다.
“그냥 안쓰러워서, 도와주고 싶어서 찾아가고 있어.”
“그 심정 잘 알지. 네 아빠도 그런 마음으로 날 보러 왔으니까.”
“뭔가 이상한 생각하는 거 같은데, 그런 거 아니니까 엮지 마세요. 네?”
“내가 뭐라고 했다고.”
엄마가 사과 반쪽을 입에 물었다.
“올란트의 아들. 한 번은 보긴 봐야지. 올란트를 닮았다면 분명…… 약간 싸가지가 없을 거야.”
“응? 걔가 얼마나 예의 바른데.”
“그래? 못돼먹고 그러지 않아?”
“착해. 쓸데없이 착해서 걱정일 정도로.”
그러자 엄마가 씨익 웃었다.
“착해서 걱정이다. 그래, 그렇겠지. 네가 누굴 짝으로 데려오든 엄마는 상관 안 해. 이젠 눈치 봐야 할 상대들도 없으니 말이야.”
“엄마가 눈치라는 걸 봤어?”
“남이 만들어준 자리에 올라서면 눈치를 보게 돼 있어. 아닌 척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생리지.”
“옛날 귀족들이 들으면 뒤집히겠네. 눈치를 본 게 그 정도면 안 보는 건 대체 어떤 거야?”
“가서 한 대 쥐어 패는 거?”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의심하게 된다. 진짜 우리 엄마가 과거에 수동적이고 침울하고 자존감이 낮아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형 같았다고?
사람들이 잘못 본 게 아닐까?
“세나티아의 명맥이 끊겼지만, 가하란은 둔에서 자리를 잡았으니 별 걱정은 없겠네.”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엄마가 말했다. 밀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나티아가 얘기가 왜 갑자기 나와?”
“응? 너 아는 거 아니었어?”
“뭐가?”
“……올란트하고 만났다고 하지 않았나? 체스도 두고. 가하란하고도 친하고.”
“그게 세나티아가랑 무슨 상관인데?”
“음, 잊어버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어서는 엄마였다.
“엄마! 무슨 소리냐니까.”
“지나간 얘기야. 그보다 오늘은 일 좀 해야 해. 개인행동은 그다음에.”
엄마가 선언한 이상 캐물어도 소용없을 것이다.
세나티아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근데 거기랑 가하란하고 무슨 관계가…….
“아! 총집사님.”
올란트의 집을 찾아왔던 첼 총집사. 이름 없는 몰락 귀족이라고 생각했던 올란트가 실은 세나티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건가?
엄마가 언급할 정도라면 위세가 보통이 아닌 귀족일 텐데.
“거기 서류 챙겨서 따라와.”
엄마가 식탁을 가리킨 후 먼저 집을 나섰다. 밀레나는 짐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첼 총집사님이 올란트 씨 집을 찾아왔었어.”
“그거 끝난 얘기 아니었어?”
“가문과 관계없는 개인적인 친분이라고 했지만, 사실 올란트 씨가 유명한 귀족의 자제였던 거야? 혹시! 세나티아가의 숨겨둔…….”
“세나티아의 핏줄은 아니야. 올란트는 귀족도 아니었고.”
“설마. 첫인사 때 바로 알아봤어. 궁정 예절이 몸에 배어 있다는 걸. 카운티에들도 울고 갈 정도로 완벽한 인사였어.”
“배우기야 잘 배웠겠지. 그래야 할 위치였을 테니까.”
“근데 귀족이 아니라고?”
엄마가 쓱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로 엄마가 다 말해주길 원하는 거야?”
그 눈빛에 밀레나는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아니. 내가 가하란한테 직접 물어볼게.”
“그럼 됐네. 서둘러, 늦으면 입찰에 불리하니까.”
시원하게 걸음을 뻗는 엄마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움직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