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기억나는 건 이게 전부입니다.”
말을 마친 학회장이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올리고 지그시 눌렀다.
루카는 수첩에 닿아 있던 펜촉을 뗐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그보다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확답을 드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죠. 최선이란 단어가 쓸모없는 세상이 됐지만, 그래도 이 말 외엔 꺼낼 말이 없군요.”
루카는 수첩을 들여다봤다.
바쁘게 옮겨 적은 학회장의 증언은 결국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사건 당일까지 별다른 증상은 없었다.
둘째. 사건 발생 전 일주일간 행동반경에 변화는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귀갓길에 만났다던 여자아이. 그 아이를 찾아야지만 그나마 진도가 나가겠군요.”
취한 상태로 귀가하던 학회장은 거리에서 여자아이를 만났다고 한다.
나이는 칠 세 전후. 복장은 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복이라 특징을 잡아내기 어렵다고 했다. 연갈색 상의, 살구색 바지. 색상조차 흔했다.
“그 아이가 준 꽃을 받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겠죠?”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그 꽃이 원인인지, 아니면 밝혀내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는지.”
“그 아이 외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네요. 말씀드렸다시피 제 일상은 변함이 없었던 터라.”
루카는 주억거리며 수첩을 덮었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학회장과 인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던 부하가 곁으로 다가왔다. 정리한 정보를 전하자 부하가 눈을 찌푸렸다.
“단서라고도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네요. 이걸로 뭔가 건질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지.”
“거물을 노린 사건인데 범행 성명도 없고, 이렇다 할 움직임도 없어요. 잠잠해도 너무 잠잠해요.”
“학회장은 여기저기 엮인 사람이야.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손익 계산서가 지금도 손에서 손으로 이동 중일 수도 있어.”
부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 사고로 마무리 지어지나 싶었는데,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골치가 아프다. 머리를 콕콕 찌르는 신경통을 느낄 때였다. 통제선을 넘어 복도로 들어서는 사람이 있었다.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오빈과 가하란. 오빈이 자리를 비운 건 가하란을 데려오기 위함이었나?
“아저씨.”
가하란이 아는 척을 해왔다.
“학회장님의 호출을 받았구나.”
“네.”
연이 깊은 사이이긴 하지.
“실례하겠습니다.”
오빈이 옆을 지나쳤다. 가하란도 뒤를 따라갔다. 지켜보던 부하가 말했다.
“저 가하란이란 친구, 어제부로 용의선상에서 제외됐어요.”
“그렇군.”
친분이 있기에 가하란의 조사는 다른 부대가 맡게 됐다. 의심하는 것 자체가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사건 정황만 보면 가하란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렇기에 수사를 맡은 팀장에게 적극적으로 말했다. 철저하게 조사해서 의심의 터럭 하나 남기지 말아달라고.
문득 과거에 올란트가 겪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 녀석이 살아 있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길길이 날뛰었을까, 아니면 침착하게 조사를 부탁했을까.
“2반 쪽 정리 끝나는 대로 보고서 올려. 밥은 알아서 해결하고.”
“같이 안 드십니까?”
“친구 좀 보고 오려고.”
루카는 창밖 공동묘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 * *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오빈이 자리를 비웠다.
가하란은 품에서 노트를 꺼내며 덴스 곁으로 다가섰다.
“찾았구나.”
“네.”
덴스는 복잡한 시선으로 노트를 바라봤다.
“내용물은 확인했고?”
“대충 살펴봤습니다.”
“올란트가 널 위해 준비해둔 거였다. 내가 그걸 가로챘지. 정말…….”
가하란은 덴스의 말을 잘랐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됐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서로에게 불필요한 말이니까요.”
“그랬었지.”
“가족하고는 말씀을 다 끝내셨나요?”
“네가 시간을 허락해준 덕분에 잘 마무리 지었다. 그래, 잘 마무리 지었지.”
“그러면 이제 말씀해 보시죠. 교수님께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덴스가 두 손을 모았다.
“범인을 알게 된다면 넌 어찌할 생각이냐?”
“아직은 대응책을 정해두지 않았어요.”
“이런 말을 내가 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너한테 피해가 간 일이 아니다. 어차피 죽는 건 나니까. 왜 네가 이 일의 범인을 찾는지, 그걸 알고 싶다면 욕심이려나?”
이틀.
교수의 목숨은 곧 꺼지게 된다.
미주알고주알 떠들 이유도 없지만, 그렇다고 침묵을 고수할 이유도 없다.
“혹시 모를 가능성.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 범인을 알아둬야 합니다.”
“가능성?”
“저도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단지,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 약간의 정보나마 알아두고 싶은 겁니다.”
“최악의 사태라.”
덴스가 팔을 뻗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랍 위에 있는 펜과 메모지를 잡았다.
손이 천천히 움직인다.
“나는 거래를 했다. 내 딸을 지키기 위해서. 어쩌면 악마와 손을 잡은 걸지도 모르지.”
덴스가 펜을 놓았다. 글씨가 적힌 메모지를 반으로, 다시 반으로 접어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가하란. 너는 완벽한 거짓말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냐?”
“모르겠습니다.”
“그래, 누구도 알 수 없겠지. 그저 거짓말이 영원히 지속되길 기도할 뿐.”
덴스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가하란의 시선은 접힌 메모지에 꽂혔다.
“네가 알고 싶어 하는 답이 이 안에 있다. 내게 약을 쓴 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손을 뻗어 메모지를 잡으려 하자, 덴스가 주먹을 살며시 쥐었다.
“이건 내 딸을 위한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마음 같아선 이걸 먹어버리고 너한테 비밀로 한 채 죽고 싶어. 하지만 그래선 안 되겠지. 나는 결국 괴물이 되지 못한 한낱 미물이니까.”
구겨진 메모지가 손가락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하란. 나는 네게 거짓말을 해왔다. 이 종이에 적힌 이름도 거짓일 가능성이 있겠지.”
“그럴지도 모르죠.”
“어쩌면 이걸 안 보는 게 정답일 수도 있어.”
가하란은 손을 뻗었다.
덴스의 말대로 덮어두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면식만 있는 제삼자가 범인이라면 교수가 이렇게 망설일 리 없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 범인인 것이다.
또한 범인은 프레나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고.
무엇보다.
“제가 아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파악해둬야 해요.”
“……너를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어.”
덴스의 말을 들으며 조심스럽게 메모지를 펼쳤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두 눈을 찔렀다. 이름을 보자마자 머리가 멍해졌다.
의심조차 하지 않은, 아니, 의심해서는 안 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절 놀리시는 건가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구나.”
“유단 형이…… 정말로…….”
덴스가 상체를 숙였다.
“그놈이 앞으로 뭘 할지, 무엇을 원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유단마저 무너진다면 내 딸은 버틸 수 없다는 거다.”
덴스는 메모지를 가리켜 안전장치라고 했다.
“덮고 넘어갈 생각이셨군요.”
“내가 살 수 있었다면 다른 수를 썼겠지. 시간이 더 있었어도 분명 다른 방법을 찾아봤을 거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난 대비할 시간이 없다. 게다가…… 누굴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허탈한 눈으로 이불을 바라보는 덴스였다.
자식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아니, 자식하고도 공유할 수 없는 비밀마저 유단과는 나눴을 것이다.
거둬들인 친구의 아들이자, 후계자로 점찍어 놓은 아이가 암살을 시도했다.
덴스의 말대로 누굴 믿어야 할까?
가하란은 입을 다문 채 생각을 정리했다.
종이에 적힌 이름이 거짓일 경우, 덴스는 어떤 이득을 얻는가. 또한 사실이라면 어떤 편익을 취하게 되는가.
“거짓일 가능성은 없겠군요.”
모호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면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단은 용의자라 언급하는 것조차 위험한 이름이었다.
유단이 범인이라면 모든 게 설명된다. 특수한 약물 덕분에 빗겨 나간 혐의들이 딱딱 들어맞는다.
“오빈을 통해 재산권을 정리할 거다. 네가 누렸어야 할 마땅한 권리를 지금이라도 돌려주마. 너무나도 늦었지만…….”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뭐?”
“금전적으로 부족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그 재산은 교수님이 이룩한 거예요. 이 노트를 보니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아버지는 사업적으로 수완이 없었어요. 연구비만 잔뜩 쓰셨겠죠.”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지난 며칠간 심장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래서일까. 어느 정도 정리된 지금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
“저한테 돌려줄 필요 없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쪽으로 자금을 운용해 주세요.”
손에 쥔 노트를 내려다보았다.
“노트를 보셨으니 아실 테죠. 아버지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분배소의 기초 이론을 작성했어요. 그러니 그 뜻에 맞게 돈을 사용해 주세요.”
머니페니를 곁에서 지켜보며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다.
거대한 자금은 골칫덩이라는 점이다.
현물을 소지하는 것에서 만족감을 얻는다면, 큰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것이다.
가하란은 생각해봤다. 금덩어리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한 3분 정도는 기쁠 것이다.
그리고 곧 심드렁해질 테고.
지니고 있어봤자 골치만 아프고 행복해지지도 않는다면, 그걸 굳이 가져야 할 이유가 있을까?
돈 다루는 것도 기술이었다.
그러니 기술자에게 맡겨두는 편이 나았다.
“전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이게 있으니 만족합니다.”
낡은 노트 안에는 인식 저편의 지식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줄리어스가 도달한 세계를 아주 살짝이나마 들여다본 것이다.
지식의 보고가 눈앞에 존재하는데, 거추장스러운 돈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올란트도 같은 말을 했었지.”
가하란은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교수님. 노트 안에 그어진 선들을 보셨겠죠?”
“봤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셨나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며칠 동안 그 선에서 눈을 못 뗐지. 조금만 더 살피면 지금껏 내가 알아 온 것들이 쓸모없어지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내 눈에 들어온 건 난잡한 선뿐이었다.”
덴스가 몽롱한 눈으로 가하란을 바라봤다.
“설마…… 넌 그 안에 담긴 뜻을 이해한 거냐?”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어요. 이걸 만들어낸 아버지조차 이 체계가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겠죠.”
마력선 짜맞춤.
줄리어스가 도달한 이상향.
“교수님은 뛰어난 분이세요. 아버지와 방향성이 약간 달랐을 뿐이죠. 질투심. 그걸 느꼈을 때, 교수님은 약간의 용기를 내셨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많은 게 달라졌겠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기하게도 말끔한 기분이었다.
물론 병실을 벗어나게 되면, 색다른 문제와 마주하며 다시 우울해질 것이다.
유단.
양부나 다름없는 덴스를 죽이려 한 남자.
형의 웃는 얼굴 뒤에 대체 무엇이 있는지, 가하란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바로 밝힐 생각이냐?”
병실을 나서기 전 덴스가 말했다.
“아니요. 제 나름대로 알아본 후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판단될 때, 그때 정리할 겁니다.”
“프레나는…….”
“더는 아픈 사람이 없길, 저도 바라고 있어요. 괴로운 건 저희 둘이면 되니까요. 하지만 유단 형이 제가 생각한 일과 맞닿아 있다면, 전 그걸 막아야 해요.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덴스가 벙긋거리는 모습을 봤지만 더 듣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건너편에 있는 유단과 프레나가 보였다.
어렵다, 정말 어렵다.
어렵지만, 가하란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