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74화 (247/558)

제274화

프레나는 먼발치서 병실 문을 바라봤다. 안에서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을까.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리를 비켜달라고 할 때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밖으로 나왔지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아빠는 이제 괜찮은 거겠죠?”

옆에 있는 의술사에게 물었다. 이름은 리올라. 담당 의술사라 병원에서 자주 만났다.

다른 의술사들이 연명 치료 외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했을 때 유일하게 포기하지 않고 곁을 지켜준 고마운 사람.

“긍정적인 말을 해주고 싶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어. 정밀 검사를 해봐야 해.”

프레나는 양손을 맞잡았다.

부디 아무 일 없길.

아빠가 훌훌 털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오길.

십여 분이 지났을 때 병실 문이 살며시 열렸다.

“먼저 가봐.”

리올라가 손짓했다. 배려해주는 것 같았다. 프레나는 들뜬 걸음으로 다가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편안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는 아빠가 보였다.

프레나는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분위기였다.

별일 없었구나.

다행이다, 속으로 생각하며 침대로 다가섰다.

“둘이 무슨 얘길 한 거야?”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저것 말했다. 물론 네 장래에 대해서도.”

아빠가 종종 던지는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밖에 사람들이 많든?”

“안쪽 복도는 막아놔서 괜찮은데, 바깥은 바글바글해. 행정처랑 군에서도 온 것 같고.”

“바쁜 분들을 계속 붙잡아 둘 순 없지.”

아빠가 유단에게 눈짓을 줬다. 유단이 아빠를 부축했다.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어때?”

아빠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보기보다 멀쩡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어른의 사정. 아빠는 멋대로 아파서도, 마음대로 쉬어서도 안 되는 걸까.

“금방 끝날 테니 밖에서 조금만 기다리렴. 유단, 프레나를 부탁한다.”

“예, 교수님.”

유단이 손을 내밀었다. 프레나는 웃으며 그 손을 잡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손을 붙잡는 것에 거부감이 사라졌다. 손의 크기와 온도, 그 모든 게 마음을 안정케 한다.

“그리고.”

병실을 나서기 직전 아빠가 말했다.

“오빈도 밖에 있겠지?”

오빈.

아빠와 업무적으로 가장 밀접한 사람이었다. 집에도 몇 번 왔었고.

“예.”

유단이 대답했다.

“오빈을 먼저 들여보내라. 다른 관계자들은 그다음에 만날 테니.”

“알겠습니다.”

병실을 빠져나왔다. 동시에 리올라를 비롯한 의술사들이 다가왔다.

“죄송합니다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유단이 점잖게 말했다.

“환자 상태를 봐야 합니다만.”

“의식도 차리셨고 거동에 불편함은 없으십니다. 무엇보다 교수님께서 강력하게 요구하신 사항이라…….”

의술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책임 소재에 관해 몇 마디 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 워낙 빨라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부장님.”

유단이 복도 끝에서 기다리던 오빈을 데려왔다. 손짓을 받은 오빈이 병실로 들어갔다.

프레나는 옆에 선 유단의 손을 붙잡았다.

“걱정하지 마. 다 괜찮을 거야.”

유단이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오빠 말은 틀린 적이 없었어. 그러니 이번에도 정말 괜찮겠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단이었다.

* * *

“그다음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알겠습니다.”

오빈은 학회장에게 인사를 올린 후 병실을 나왔다. 밖에서 대기 중인 유단과 프레나에게 눈인사한 뒤 복도를 가로질렀다.

“부장님.”

유단이 뒤따라왔다.

“교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미안하지만 네가 알 일은 아니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오빈은 표정을 살짝 누그러트리며 말했다.

“그 심정 잘 안다. 나도 말이 너무 직설적이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이 거칠어지는구나.”

저 멀리 프레나가 보였다. 호기심과 불안함을 담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 넌 프레나를 돌봐라. 학회장님도 그걸 바랄 테니.”

“알겠습니다.”

“그래.”

유단의 어깨를 툭툭 쳐줬다.

복도를 벗어나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변을 살피니 학회장의 말대로 서성이고 있는 가하란이 보였다.

“가하란.”

“부장님, 오셨네요.”

“그래. 오랜만에 보는데 이런 자리라 씁쓸하구나. 잘 지냈고?”

“저야 뭐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요.”

어리지만 야무진 아이였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기도 했고. 학회 내에서도 이 아이를 탐내는 자가 많았다.

“따라와라.”

가하란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학회장과 얘기가 끝난 듯했다.

병원을 떠나 학회장의 집으로 향했다. 보조 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전달받은 건 널 2층 서재로 안내하라는 것뿐이었다.”

오빈은 계단 끝에 서서 말했다. 가하란이 위로 올라가다 도중에 멈춰 섰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교수님이 제게 뭘 부탁했을지.”

“궁금하지만 딱 거기까지지. 네가 2층에서 무엇을 하든, 난 관여하지 않을 거다. 묻지도 않을 거고. 그게 내가 부장이 된 이유니까.”

“괜한 질문을 했네요. 죄송해요, 제가 지금 속이 좀 뒤틀려 있거든요.”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지.”

발소리가 멀어졌다.

철제 케이스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조용히 집 밖으로 나와 불을 붙였다.

“단순한 게 좋은데 말이야.”

오빈은 호기심을 억누르고 멀거니 거리를 바라봤다.

* * *

검은 책을 찾아 뽑아냈다.

덴스의 말대로 안쪽에 홈이 보였다. 손가락을 넣어 살짝 당기니 딸깍, 소리와 함께 덮개가 열렸다.

가죽 덮개가 삭아서 누렇게 변질된 노트.

손끝이 떨렸다.

가하란은 조심스럽게 노트를 꺼내고 책장 덮개를 닫았다. 책도 다시 꽂아 넣었다.

의자에 걸터앉아 멍하니 노트를 바라봤다. 이상하게 넘길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실로 칭칭 감아 맨 것처럼 답답해졌다. 가하란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세게 쳤다.

답답한 기운이, 울음의 전조가 그치질 않았다.

“아버지.”

노트를 붙든 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흐느낌이 멎은 건 눈물을 다 쏟고 난 후였다.

가하란은 눈가를 소매로 훔치고 노트를 펼쳤다.

아버지의 글씨였다.

가장자리에는 무심하게 휘갈긴 글씨가, 노트 중심에는 기초 이론이 적혀 있었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분배소의 근간을 이루는 이론이었다.

커넥터 연장의 한계를 극복할 방법. 마나의 고유파장을 이용한 마법공학품 사용법.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는 실용화 가능성이 지극히 낮았지만, 마나 분포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지금은 아버지의 이론이 빛을 발하게 됐다.

가하란은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단순한 구상뿐만 아니라 적용 가능한 논리회로도 작성해놓은 상태였다.

물론 완벽한 건 아니었다. 단일 사용은 문제가 없으나 복합적으로 구성하려면 충돌이 발생할 구조였다.

연결점이, 교두보가 필요한 상황.

“교수님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셨어야 했어요.”

아버지의 발상은 놀라웠으나 현실의 틀 안으로 이론으로 정리한 건 덴스였다.

방향성이 달랐을 뿐, 가하란이 보기에 둘 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것이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이 말을 몇 번이나 떠올리게 될까.

가하란은 계속해서 장을 넘겼다.

노트는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었다. 단순회로를 사용한 마법공학품부터 거병에 들어갈 정밀소자까지.

가하란의 눈길이 멈췄다.

거병의 외형을 스케치해 놓은 페이지였다.

아버지는 조형에도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디자인 내용을 눈으로 훑던 중, 하나의 문장이 눈동자를 붙들었다.

-언젠가 아들과 함께.

글귀를 보는 순간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더는 쏟아낼 눈물이 없어서 그런지, 그 말이 반갑기만 했다.

가하란은 엄지로 문장을 쓸어내렸다.

“아버지. 실용성은 좋은데 멋은 없네요.”

곳곳에 새긴 메모를 다 읽은 후 한 장을 더 넘겼을 때였다.

글씨로 꽉 들어차 있어야 할 페이지가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가운데 점이 찍혀 있었다.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노트 끝단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응집. 도달해야 할 이상향.

하나의 점.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하란은 재빨리 다음 장으로 넘겼다. 무수히 많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대칭도 아니고 질서를 갖춘 것도 아니었다.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듯 그어져 있었다.

어떤 선은 짧고 얇았으며, 어떤 선은 굵고 길었다.

-우리가 지금 머문 곳. 하지만 아직 이해하지 못한 곳.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요동쳤다.

이 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하란은 알 수 있었다.

교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노트 안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고.

가하란은 호흡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떴다. 정보의 세계로 한 발짝 들이밀자, 무질서하게 그어져 있던 선들이 꿈틀대며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좀 더 집중해야 했다.

거센 불길 안으로 걸어 들어간 것처럼 안구가 뜨거워졌다. 눈에 가해지는 통증이 심해질수록 아버지가 그려놓은 선은 보다 뚜렷한 형태로 변했다.

이윽고 노트와 손, 주변 모든 것들이 선으로 화했을 때 아버지가 그은 선들은 하나의 물체로 변했다.

불안전한 형태의 삼각뿔.

보자마자 카트시의 본체가 떠올랐다.

줄리어스가 마력선 짜맞춤으로 형상화한 카트시의 본체는 형태가 변하는 구의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만든 건 엉성하긴 했지만, 분명 체계는 비슷해 보였다.

가하란은 손을 뻗었다. 정보의 선으로 변한 손이 삼각뿔을 움켜쥐었다.

카트시의 본체는 외부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상태였다. 지독하게 독립적이라 들여다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만든 삼각뿔은 달랐다.

친절한 녀석이었다.

정보 공유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안에 담긴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시간을 들인다면 대부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너를 위해 남긴 재미난 숙제다, 라고.

눈을 살며시 감았다. 삼각뿔은 사라지고 주변을 날뛰던 선들도 현실의 모습을 되찾았다.

“질투심.”

교수는 선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지 범위 바깥에 존재하는 지식이니까.

그럼에도 교수는 이 선을 보며 무한한 가능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뛰어난 인간이기에 편린을 보고 거대한 지식을 감지했으리라.

가하란은 노트를 품에 넣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완성된 시스템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개발 도구.

이걸 어떻게 사용할지, 지금부터 결정해야 한다.

자리를 정리하고 집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고 있는 오빈이 보였다.

“다 끝난 모양이구나.”

“네.”

“그럼 돌아가자. 학회장님께서 전할 얘기가 있다고 했으니.”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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