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3화
“부정조차 안 하는구나.”
유단은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 너머로 무슨 생각 중인지, 덴스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내가 가하란에게 진실을 말하겠다고 고백한 날, 너는 주저함이 없이 내게 수를 썼지.”
유단의 눈동자가 문 쪽으로 굴러가는 걸 보았다. 덴스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 날 죽이고 연기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우연이 겹치면 빠져나갈 구멍도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그렇겠죠.”
유단의 입이 열렸다.
“난 너를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봐왔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구나.”
“그게 중요합니까?”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말투가 달라졌다.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수년간 봐온 그 아이가 맞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로.
“너는 욕심을 부린 적이 없었다. 내 곁에서 몇 년간 한결같은 모습을 보였지.”
“완벽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당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 비위를 맞춰야 했죠.”
“……네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 내 실수였군.”
무심하게 말하는 유단을 바라봤다.
“진실을 밝히겠다고 너에게 말했을 때, 넌 흔들릴 지위와 자산을 걱정했겠구나.”
“떠보는 건 그만하시죠. 이미 다 알고 계신 거 같은데.”
“예전처럼 살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쌓아둔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니요. 전 이제 막 시작점에 섰을 뿐입니다. 가야 할 길이 멀어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연구비와 시설이 필요하죠. 그걸 위해서라도 당신은 무결한 상태로 있어야 했습니다.”
담백한 자백이었지만 모순이 있었다.
“내가 가진 것이 탐났을 뿐이라면, 왜 그날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거지?”
“……잠깐의 동요였습니다.”
유단의 눈 밑 살이 살짝 떨렸다.
이마저도 연기인가, 아니면 진심인가.
비참하게도 저 마음만큼은 진실이길 기도했다.
“내가 쓰러지고 나서 온갖 검사가 시행됐을 텐데, 별다른 조치가 없는 걸 보면 특별한 약을 사용한 것 같구나.”
“완벽한 약은 없죠. 효과는 확실하나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 몰랐습니다.”
“아쉽겠군. 내게는 천운인데, 네게는 부작용이니.”
“예, 정말 아쉽습니다.”
유단이 어깨에 힘을 뺐다. 상체를 앞으로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하나 마나 한 얘기는 그만두고, 이제 본론을 말씀하시죠. 어쩌실 생각입니까?”
“내가 거둔 아이가 날 죽이려 했다. 웃음만 나오는 이야기야. 그러니 되묻고 싶구나. 너라면 어떻게 할지.”
“엇나간 가지는 쳐내야죠. 그래야 뿌리가 살 수 있으니까요.”
“널 심판대에 세우면 모든 게 깔끔해지겠지.”
“그러면 전 도박수를 던져야겠군요.”
유단이 일어섰다. 공허한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덴스는 목 언저리가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날 죽이고 나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 특별한 약과 달리 온갖 흔적이 남을 텐데.”
“자해하려 했다고 말할 겁니다. 그걸 말리다가 생긴 상처라고 하죠.”
“그걸 믿을까?”
“당신의 증언으로 도망칠 수 없는 심판대에 오르는 것보단 나을 겁니다.”
왜일까.
안구가 터질 정도로 치솟던 화가 어느 순간 흩어져 버렸다.
저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기이한 생각마저 들었다.
왜 그런 걸까.
덴스는 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 달간 쓰러져 있었더니 뇌마저 굳어버린 모양이군.
체념에 가까운 감정이 드는 이유야 뻔했다.
밖에 프레나가 있다.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딸은 나를, 그리고 유단을 의지하고 있다.
덴스는 떨리는 손을 들어 가슴께에 얹었다.
이틀. 두 번의 밤이 찾아오면 모든 것과 작별해야 한다.
기적이 뒤따라 건강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들었다. 가하란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며칠 내로 죽을 목숨이라는 걸 인지했을 것이다.
지금도 머리가 멍해지고 있었다.
이러다 픽 숨이 끊길지도 모른다.
내가 없어지고 나면, 프레나를 돌보는 건 누구지?
덴스는 고개를 틀어 유단을 바라봤다.
결심을 굳히지 못한 채, 늘어트린 두 손에 힘조차 주지 않는 아이를.
“하려면 빨리 하는 게 좋을 거다. 더 늦어지면 사람들이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할 겁니다.”
“말만 하지 말고 어서 해.”
“할 거예요, 할 거라고요!”
격한 감정을 내비치는 유단이었다.
덴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독하게 냉정한 것 같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여린 모습이 보인다.
사람은 경향의 동물이라 한쪽으로 치우치면 반대쪽 성향은 옅어지기 마련이었다.
일이 엇나갔음을 인지하자마자 암살을 준비했으면서, 마지막 순간에 눈물을 보였다.
지금도 실행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처럼 주저하고 있었다.
이 아이의 속은 대체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
“내가 여기서 무사히 걸어 나가면 네가 맞이할 건 파멸뿐이다.”
“압니다.”
“아는데도 그러고 있어? 왜 멍청히 보고 있는 거냐!”
덴스는 윽박지르며 유단을 바라봤다. 도자기 같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보면 볼수록 모르겠구나. 네 행동 원리가 이해되질 않는다. 왜 망설이지?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덴스는 이불을 치워냈다.
끊어질 것 같은 허리에 힘을 주며 다리를 침대 바깥으로 뺐다.
발바닥이 지면에 닿았다.
유단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 모습에 자취를 감췄던 분노가 다시 형태를 드러냈다.
바들거리는 무릎으로 몸을 지탱했다. 일어서서 천천히 유단을 향해 걸었다.
유단이 한 걸음 더 물러섰다.
그렇게 한 걸음씩, 다가가고 멀어졌다.
이윽고 유단이 벽을 등졌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넌 대체 무엇이냐? 어째서 날 죽인 그날처럼 행동하지 않는 거지? 결심했으면, 끝이 예상되면 움직여야 사람이고 인간이다!”
몸이 비틀렸다. 고통이 전신을 때렸다. 하지만 덴스는 주저앉지 않았다.
두 손을 뻗어 유단의 어깨를 붙잡았다. 유단의 몸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냐?”
* * *
사고 활동이 원활하게 되지 않았다. 머리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제멋대로 움직였다.
의식은 명료하나 몸이 통제에서 벗어났다. 아니, 이제는 의식마저 일그러지고 있었다.
이게 뭐지?
대체 이 감정은 뭐지?
유단은 혼란스러웠다.
눈앞에 있는 건 툭 치면 쓰러질 남자였다. 허약하고 안쓰러운, 불안함 끝단에 서 있어서 살짝만 밀면 끝날 인간.
그런데 건드릴 수가 없었다.
증오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찬 눈을 보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안쪽에 들어찼던 희미한 슬픔도, 후회도 저 눈을 바라보는 순간 말끔히 사라졌다.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아!
유단은 떨리는 몸을 연신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깨달았다.
이것이 인간을 옥죄는 공포라는 거구나. 이성적으로 파악했다 한들 풀어낼 수 없는 족쇄.
감정의 동물이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
프레나의 목을 꺾지 못한 것도, 덴스에게 약을 먹이며 눈물을 흘린 것도, 지금 벌벌 떠는 것도 모두 인간이기에 짊어져야 할 오류였다.
기계의 몸을 벗고 인간의 몸을 입었다.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완전히 녹아들었다고 생각했다.
오판이었다.
인간은 그리 쉬운 동물이 아니었다.
몸의 주인인 ‘유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둘은 뒤섞이고 있다고.
로키와 유단.
기계와 인간.
합치를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극단적인 감정 앞에서 인간의 몸은 끔찍하리만치 무능력해졌다.
유단은 다가오는 덴스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사고가 정리되질 않았다. 무얼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사건은 벌어졌고 결과는 명확하다. 결과값을 바꾸려면 행동이란 변수를 집어넣어야 한다.
알고 있으면서도 행할 수가 없었다.
덴스가 소리를 질렀다.
그의 분노가 이해되질 않았다. 화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인간에게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소중한 걸 강탈당한 자는 화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덴스의 분노는 성질이 달라보였다.
무엇에 대한 분노지?
이윽고 벽에 몰렸다.
유단은 무서웠다. 덴스가 두려웠다. 눈을 감고 생각을 멈추고 피하고 싶을 정도로.
그때, 덴스가 말했다.
“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냐?”
덴스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악력이 형편없어서 살며시 움켜쥐는 정도였는데, 마치 뼈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유단! 날 똑바로 봐라.”
유단은 겁에 질린 채 덴스를 바라봤다.
“생각을 해라, 생각을. 그 좋은 머리로 멍청하게 있지 말고 살 궁리를 하란 말이다!”
살 궁리?
“여기서 날 죽이는 건 하책이다. 지극히 낮은 확률에 돈을 거는 거지. 그 좋은 머리로 그것밖에 생각 못 하는 거냐? 더 나은 수가 있을 텐데?”
기이한 다그침이었다.
덴스가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건지 더더욱 알 수 없게 됐다.
“유단!”
자근자근 씹듯이 부른 이름에 유단은 발작하듯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아니, 너무나도 간단한 거다. 네가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돼. 떠올려라.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좁아진 시야로 덴스의 얼굴만 바라볼 때였다. 주변시에 문이 걸려들었다.
문을 보는 순간 복잡했던 머릿속이 단숨에 정리됐다.
“……프레나.”
이름을 꺼내 들었다.
덴스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그래, 내 딸. 그 애를 어떻게 할 거지?”
“당신은 딸을 아낍니다. 그리고 프레나는 날 의지하고 있어요. 당신의 몸 상태는 좋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다시 식물인간이 될지도 모르죠.”
“그래. 불확실성이 다분한 상태지.”
“이런 상황에서 제가 가해자가 된다면, 프레나는 정신적으로 무너질 겁니다. 그 아이는 절대 버티지 못해요. 미쳐버릴 겁니다. 아니, 차라리 미치는 게 나아 보일 정도로 비참해질 겁니다.”
들끓던 인간의 감정이 서서히 물러났다. 빈자리를 채운 건 논리의 집약체였다.
“당신은 그걸 바라지 않아요.”
“그래. 어차피 난 무너질 인간이다.”
“당신은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겁니다.”
“그렇지.”
“저는 그걸 협박의 재료로 쓸 수 있고요.”
쿵, 덴스가 체중을 실어 밀었다. 벽에 부딪힌 채 덴스를 바라봤다.
“프레나는 너에게 무엇이냐.”
“……알지 못합니다.”
“내가 죽고 프레나에게 상속됐을 때, 너는 어쩔 생각이었지?”
“그 아이는 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아이 것은 제 것이 되겠죠.”
“단순한 소유물이냐?”
5년 전 그날, 유단은 프레나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얇은 목을 꺾는 대신, 죽지 않도록 건물더미에서 이끌어내 품에 안았다.
어미를 잃은 슬픔에서 무너지지 않게 다독였고, 슬퍼할 때마다 웃을 수 있도록 하찮은 농담도 했다.
그 모든 게 덴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였던가?
편의를 위한 밑작업이었을까?
“……소중합니다. 적어도 당신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유단은 덴스의 얼굴을 보며 악마를 떠올렸다. 동화 속에나 존재한다던 신적인 존재.
밀려드는 두려움에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마주한 건 악마가 아닌 서글퍼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넌 거짓된 존재다. 그런 면에서 나와 똑같지. 하지만 난 도중에 포기해 버렸다. 달콤한 진실 앞에서 모든 걸 내려놔 버렸지.”
덴스가 눈을 부릅떴다.
“들키지 마라. 네가 악이라도 괜찮다. 프레나를 끝까지 속여라. 죽는 그날까지 속여. 들키지 않으면 위선은 진실한 선이 된다.”
모든 기운을 다 쓴 사람처럼, 덴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괴물이 될 거면 확실한 괴물이 돼라. 나처럼 어정쩡한 인간으로 남지 말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