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72화 (245/558)

제272화

교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증은 침묵으로 인해 확신으로 변했다.

가하란은 온몸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교수님. 이번 사건의…….”

구태여 ‘사건’이란 단어를 써서 말문을 열 때였다.

“가하란. 내게 허락된 시간이 이틀뿐이랬지?”

교수가 말꼬리를 잘랐다.

“예.”

“묻고 싶은 게 많겠지. 사건이라 칭하는 걸 보면 너 역시 내 몸이 이렇게 된 이유를 파악한 것 같고.”

가하란은 교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정밀하게 만든 기계인형을 보는 듯했다.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증오도, 후회도, 체념도. 감정이란 색이 완전히 탈색된 인간.

“이틀. 이 시간을 너에게 할애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가하란. 네가 허락한다면 잠깐의 시간이나마 빌리고 싶구나.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걸 알면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날 용서…….”

교수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입을 다물었다. 기계처럼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왔다.

용서.

잔잔해졌던 가슴에 삭풍이 잠깐 불었다. 오른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대로 내지르고 싶은 욕구가 치솟았다.

하지만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 5년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에서 등을 돌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에만 몰두하던 내 모습이.

“교수님.”

“경칭이 이리도 무거운 말이었구나. 날 그렇게 부를 필요 없다. 나는 죄인이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교수님, 지난 5년간 어떤 심정이었나요?”

덴스가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올란트를 구하지 못한 그날, 난 홀로 남는 게 두려워졌다. 잠은 끔찍한 것이 됐고, 고독감은 날 좀 먹는 것이 됐지. 그래서 매일 연구에 몰두했다.”

교수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괴로운 건 아니었다. 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위대했고, 난 그 위대함에 기대 찬사를 받았다. 즐거웠지. 즐겁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하지만 그 뒤에 항상 불안함에 떨어야 했다.”

“근데 왜 마음이 바뀌신 거죠?”

“더는 못 버틸 것 같았으니까. 비겁한 놈의 비겁한 수작이었다. 내가 살고 싶어서 털어놓고 싶었다.”

“5년간 버티셨으니 더 버티실 수 있었을 텐데요.”

“……이제는 매장당해도 가족의 안위 정도는 지킬 수 있게 됐으니까.”

“재산. 그렇죠. 돈이 중요하죠.”

5년간 진실을 감춘 교수였지만, 모순적이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진실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뭐든 대답해주마.”

“그날, 교수님께선 정말 아버지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나요?”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면 잡을 수 있었다.”

“확실한가요?”

잠잠했던 교수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온갖 것이 뒤섞인 격정의 감정이 얼굴 위에서 날뛰었다.

“가능과 불가능이 문제가 아니었다! 틈새 사이로 올란트가 떨어졌고, 난 그걸 봤고, 동시에 올란트가 남긴 노트를 발견했다. 숨 한 번, 눈 몇 번 깜빡거릴 시간이었다고 한들 난 구렁텅이에 빠진 그 친구보다 노트에 시선을 줬어! 그게 사실이다. 그게 전부야.”

교수가 힘이 탁 풀린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가장 끔찍한 건 올란트의 마지막 순간조차 못 봤다는 거다. 노트에서 시선을 거두고 올란트가 매달려 있던 지면을 바라봤을 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난…… 네 아버지를 질투했다. 빛나는 천재성을 시기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할 걸 그랬어. 이 추악한 감정을 제대로 설명했다면, 올란트는 분명 이해하고…….”

앙상하게 마른 교수의 팔이 움직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애처럼 우는 교수였다.

가하란은 고개를 들었다.

감정들이 차례대로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지난 5년간의 시간이 한순간 들이닥쳤다가, 조용히 빠져나간 것이다.

공허해진 머리에 또렷한 목소리 하나가 남았다.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해.

희한하게도 그 말이 위로가 됐다.

“교수님. 전 교수님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애초에 그럴 자격이 없어요.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건, 위로하지 않는 겁니다.”

“미안하다, 가하란.”

“사과하지 마세요.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요.”

작아 보인다.

어릴 때부터 봐왔던 교수가, 지식계의 거인이 오늘은 정말 작아 보인다.

안쓰러울 정도로 말이다.

“교수님 덕에 그래도 깨달은 게 있네요. 악한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죄책감이 들 만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

교수가 차라리 악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죄악감 따윈 안중에도 없는, 손에 들어온 이득만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인간이었다면…….

속 편하게 욕하고 마음껏 패버렸을 텐데.

기이한 일이었다. 괴로움에 발버둥 친 5년의 세월 때문에 교수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차라리 끝까지 악인으로 남으셨다면 서로에게 편했을 겁니다.”

“미안하구나. 사과 외에 꺼낼 말이 없는 날…….”

교수가 고개를 숙였다.

가하란은 잠시 창밖을 보았다.

흐릿한 하늘이 보인다. 아버지의 눈동자를 닮은 흐릿한 하늘이다.

아빠, 그냥 보고 싶네요.

“더 하실 말씀 없다면, 가족분들을 부를까요?”

“염치없지만 그 애들을 보고 싶구나.”

“교수님이 쓰러지고 나서 프레나는 말이 없어졌어요. 몇 번밖에 안 본 사이이지만, 그럼에도 눈치챌 정도로 사람이 달라졌죠. 유단 형은 평소와 다름없는 것 같지만 속은 문드러졌겠죠.”

가족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덴스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교수님. 진실은 여기서 끝내죠. 그 사람들 앞에서는 좋은 아버지가 되세요.”

“가하란.”

“지옥에서 뒹구는 건 저희 둘로 족하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우습게도 전 교수님이 이해돼요. 어떤 심정일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가하란은 교수의 눈을 바라봤다.

“그렇다고 오해하시면 안 돼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용서도 아니고 위로도 아니에요. 단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말자는 거예요. 안고 가세요. 안고, 조용히 마무리 지으세요.”

차분해졌다.

밀레나와 만나기 전이었다면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움직이지 못하는 교수에게 달려들어 목을 졸랐을지도 모른다.

누나가 보고 싶어졌다. 제니와 테리가 보고 싶어졌다.

삭막한 병실을 빨리 떠나고 싶었으나, 처리해야 할 것이 남았다.

“지나간 일은 그렇게 마무리하시고, 이제 당면한 문제를 처리하죠. 교수님. 알고 계신 거죠?”

“……어느 정도는.”

많은 걸 생략한 문장이었지만 교수는 알아들었다.

“범인은 누구죠? 누가 어떤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

“아직 확언할 단계는 아니다. 내 실력으로 오른 자리는 아니지만, 이런 자리에 있으면 적이 많아진다.”

“그럴지도 모르죠.”

“다 말해주마. 하지만 그 전에 아이들에게 할 말이 있다. 네 말대로 곧 사라질 목숨, 마무리 지을 수 있게…….”

“그게 낫겠네요. 마음을 정리해야 말이 쉽게 나올 테니.”

가하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을 불러 올게요.”

“이해해줘서 고맙다.”

밖으로 나가기 직전이었다.

“집 2층 서재 오른쪽 책장을 보면 나란히 꽂혀 있는 검은 책이 세 권있다. 그 책을 빼내고 뒤쪽 면을 만져보면 손가락 끝에 걸리는 홈이 있을 거다. 그 안에 올란트가 남긴 노트가 있다.”

교수가 두 손을 맞잡았다.

“분배소의 기초 아이디어도 그 안에 들어 있다. 그 외에도 내가 이해 못한 지식들이 그 안에 있지. 네게 갔어야 할 자산이다.”

“……진실은 묻혔고 그걸 아는 건 우리 둘뿐이에요. 교수님만 침묵했다면 그 모든 게 프레나한테 전해졌을 텐데, 왜 말씀하시는 건가요?”

“편히 죽고 싶어서 그런 거다. 속물의 비겁한 심보지.”

가하란은 교수를 응시했다.

“마수 뼈 가공을 통한 배터리 양산도 아버지의 아이디어였나요?”

“……그건 내 발상이었다.”

탁한 한숨이 나온다. 왼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말했다.

“교수님. 그거 아십니까? 교수님은 아버지를 질투할 필요가 없었어요.”

고개를 떨군 교수를 잠시 지켜보다가 병실 밖으로 나왔다.

진실을 알았지만 과거는 달라지지 않는다. 지나간 건 건들 수 없다.

지금은 벌어질 일에 집중해야 한다.

누가 교수에게 약물을 쓴 걸까.

그것으로 무슨 이득을 얻으려 한 걸까.

나아가, 줄리어스의 아이 중 누가 깨어나 인간 사회에 관여하고 있는 걸까.

“교수님이 깨어났습니다.”

앞을 지나가는 의술사를 붙잡고 말했다.

이제 곧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 * *

조용하다.

북적거리던 병실이 드디어 조용해졌다.

덴스는 멍한 눈으로 문만 바라봤다. 소식을 듣고 곧 두 아이가 찾아올 것이다.

“아빠!”

문이 벌컥 열리며 프레나가 뛰어 들어왔다. 조심하라는 의술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프레나는 달려와 침대 옆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덴스는 손을 뻗어 프레나의 뺨을 매만졌다.

“우리 딸.”

“아빠, 이제 괜찮은 거야? 괜찮은 거 맞지?”

“그래. 괜찮아. 이렇게 눈 떴잖아.”

죽는 순간까지 딸애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시선은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돌아갔다.

유단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침중한 표정에서 서서히 안도의 웃음으로 변하는 얼굴.

머리가, 마음이 차갑게 식는다.

하지만 티를 내서는 안 된다.

덴스는 반갑게 웃으며 유단을 맞이했다.

“유단. 나 없는 동안 네가 고생했겠구나.”

“아닙니다, 교수님.”

뒤쪽에 있던 의술사가 말했다.

“학회장님. 안정을 취하고 검사를 마저 해야 하니 되도록…….”

“알겠습니다. 짧게 얘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의술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문 옆에 서 있던 유단도 프레나 곁으로 다가왔다.

덴스는 차분한 눈길로 유단을 살폈다.

사실 두 사람을 따로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그러지 않았다.

유단이 프레나 옆에 섰을 때였다.

덴스는 보고 말았다. 프레나가 자연스럽게 왼손을 뻗어 유단의 손을 잡는 걸.

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끈이 탁 하고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랬었지.

“아빠 이제 술 마시지 마. 몸에 안 좋은 건 아무것도 하지 마. 알겠어?”

“그래, 그래야지.”

손의 떨림을 감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아아, 내 딸의 버팀목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구나.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유단이 널 잘 돌봤나 보구나.”

넌지시 말해봤다. 딸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

프레나는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유단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오빠가 계속 괜찮을 거라고 말해줬어. 정말 힘들었는데, 오빠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 그랬더니 오빠 말대로 아빠가 일어났어. 정말…… 다행이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쓱 훔치며 이내 웃는 딸이었다.

“프레나.”

“응?”

“아빠가 유단한테 할 얘기가 있단다.”

“하면 되잖아.”

“남자 대 남자로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

프레나가 생긋 웃었다.

“유치하게 그게 뭐야. 그래도 알겠어. 잠깐만 나가 있을게. 잠깐이야.”

“그래. 우리 딸 착하네.”

프레나가 병실을 나섰다.

덴스는 문이 닫힐 때까지 웃음을 유지했다. 미소 짓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이었구나.

“유단.”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 교수님.”

“너는 어떤 결말을 기대하고 있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넌 영리한 아이야. 다 알아들었을 거다. 내가 왜 이런 말을 꺼내는지도.”

목석같은 녀석의 얼굴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덴스는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너답지 않은 실수였다. 일을 저질렀으면 감췄어야지, 내 앞에서 울다니.”

“……교수님.”

무슨 말인지 되묻지도 않는다. 부정도 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항전을 준비하는 얼굴이다.

“그래, 인간인 이상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누구나 실수하는 법이니까.”

덴스는 조용히 흘러가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할 거였다면 확실하게 했어야지. 확실하게 죽이고 내 걸 가져갔다면 뒤처리도 깔끔했을 텐데.”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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