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카트시.”
-네?
“만약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네 친구에게 해를 끼쳐야 한다면, 넌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어?”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죠. 인간이 말하는 도덕률이 우리에게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한들, 우리 역시 이 세상에 속해 있어요. 속해 있다는 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죠.
카트시의 눈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 몇 개가 희미하게 보이는 검은 하늘을.
-우리는 어머니를 통해 세상을 만났고, 서로를 이해했어요. 연결망이 온전했을 당시 우린 하나이며 여럿이었죠. 하지만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이후, 우린 완전한 독립을 이뤄냈어요. 타인이 된 거죠.
어조가 일정한 복합 음성인데도 쓸쓸함이 묻어났다.
-제가 가하란을 인식하고 보안책임자로 받아들였듯, 살아남은 다른 친구들도 각기 다른 선택을 했겠죠. 선택은 대립을 낳게 돼요. 가하란의 염려대로 언젠가 불상사가 발생할 테고요.
기우였으면 좋겠다.
자잘한 추론이 모두 빗나가고 헛웃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엇나가는 법이 없었다.
-가하란.
가하란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명한 건 그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한들, 저는 당신을 지지할 거예요. 필요하다면 모든 지식을 동원해 당신을 도울 거고요.
“내가 바라는 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거야.”
-하지만 이런 질문을 했다는 건 어느 정도 상정했다는 뜻이겠죠?
“언제나 최악을 생각해둬야 하니까.”
-그런 점은 줄리어스를 닮았네요. 어머니도 걱정을 안고 살았죠.
가하란은 카트시의 눈을 바라봤다.
“만약 로키가 살아 있다면, 로키가 여전히 다른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로키가 기동 중이라면 분명 실험을 하고 있겠죠. 그 아이의 욕망은 거대했거든요. 벽을 허물겠다는 집념, 줄리어스와 동일 선상에 서고 싶다는 갈망. 깨어 있다면 목적을 위해 멈추지 않고 움직이고 있겠죠.
“설득할 수 있을까? 그만두라고.”
-글쎄요. 잠깐 인간의 대변자가 아닌 탐구하는 기계로서 말하자면, 욕망을 추구하는 것 자체에 문제점을 못 느낄 가능성이 커요.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인간도 그러잖아요.
입술이 달싹거렸다.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인간도 그러잖아요.
뼈아픈 말이었다.
-인간도 인간을 재료 삼아 무언가를 하죠. 아니라고 하지는 말아요. 직접적인 실험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실험을 포함한 얘기니까. 구조와 체제, 모든 게 인간을 대상으로 한 거대한 실험대에요. 칼로 찔러 죽이는 것보다, 그러한 체제에 치여 죽은 인간이 훨씬 더 많겠죠?
“맞는 말이야.”
그러자 카트시가 웃었다.
-가하란. 이럴 땐 아니라고 해야 해요. 적극적으로 반박해야 저도 말하는 재미가 있죠.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닌걸. 어릴 때 골목에서 수없이 봐왔어. 버려진 아이를, 굶어 죽은 사람을, 아파도 치료조차 못한 이웃을. 근데 조금만 벗어나서 도심지로 가면 별세상이었어. 거기서 뿌려지는 돈의 일부만 골목으로 흘러 들어왔어도 많은 게 달라졌을 거야.”
-그 생각 역시 정답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죠?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복잡한 정치 문제가 엮여 있다는 걸 이제는 알아. 수백 년간 지속된 신분 체계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단숨에 바꾸긴 힘들어. 누군가의 손해가 누군가의 이권이니까.”
인간은 기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기계는 인간을 모방했다.
시장 거리에 널려 있는 단순한 기계 인형은 인간의 겉모습을 따라 할 뿐이지만, 줄리어스가 만들어낸 아이들은 인간의 내면을 보고 그것을 복제했다.
연구원 헤르모드를 죽이고 거짓말을 알아낸 로키.
카트시의 말대로 관점을 바꾸면,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 한 발자국만 멀어지면…….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상향, 상승. 우린 언제나 줄리어스가 본 하늘을 같이 보고 싶었어요. 변화된 데이터가 아닌 인간들이 말하는 실재란 것으로.
가하란은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네 친구들과 다투고 싶지 않아.”
-저도 그래요. 하지만 필요하다면 제거해야 해요.
“제거란 말은 너무 무서운데.”
-유보와 보류. 우린 이런 대처보다 확실한 걸 택하죠.
“난 카트시가 괴롭지 않을까, 그게 걱정돼.”
-괜찮아요. 원래 친지간에 칼부림 나는 게 인류 역사잖아요? 저도 그 역사에 편입될 뿐이에요. 로키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이 규율에 어긋난 짓을 했다면 벌을 받아야 해요. 기계의 시대가 도래한다면 모를까, 우린 아직 인간 세상에 발붙이고 살고 있으니까요.
기계의 시대.
가하란은 눈웃음 지으며 물었다.
“인간과 기계의 위치가 역전되면 내가 알고 있는 도덕관은 없어지는 걸까?”
-그런 세상이 온다면 가장 먼저 효율성을 따지겠죠.
“효율성. 그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린 적은 처음이야.”
-그래서 저도 가끔 인간이 무서워요.
차가운 물을 가져왔다. 카트시는 말을 멈추고 계속 하늘만 올려다봤다. 저 멀리 있는 별에 가고 싶은 것처럼.
“반짝반짝 작은 별……. 이 노래 좋아했지?”
-네. 우리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니고 취향을 갖게 됐지만, 유일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 노래를 사랑한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불러준 그 노래를.
“나도 이 노래가 좋아.”
-신기하죠. 수백 년 전에도 자장가로 쓰이던 노래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어요. 문서로 된 정보는 사라졌지만, 구두로 전해진 노래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죠. 어쩌면 가장 위대한 데이터는 말일지도 몰라요.
“그러게.”
가하란은 ‘반짝반짝 작은 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지금까지 나눈 얘기는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니까요. 제가 알려준 방법이 소용없을 수도 있어요. 펠트신이 아니라 정말 알 수 없는 병일 수도 있으니까요.
“머리가 복잡해. 더는 손쓸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잠깐의 이별을 위해 교수님을 깨워야 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정말로 눈을 뜨신다면 그 뒤에 벌어질 일들을 고민해봐야 하니까.”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 유용한 격언이죠.
“아까는 보류보다 확실한 대처를 선호한다며?”
-기계의 마음은 갈대예요.
하하, 작게 웃음을 흘린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잘게. 교수님을 찾아가기 전에 이것저것 준비할 게 있으니까.”
-잠이 잘 오도록 자장가를 불러줄까요?
“오던 잠이 달아날 거 같은데.”
-그러면 어쩔 수 없죠.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을게요.
가하란은 침실 문을 연 뒤 카트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자, 카트시.”
-좋은 꿈 꿔요.
“너도.”
문을 닫고 불을 껐다.
* * *
“얼굴이 좋아졌네.”
리올라가 인사 대신 꺼낸 말이었다.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날 저녁에 만난 여자애한테 몇 마디 했어.”
“네. 들었어요.”
“너에 대해 난 잘 몰라. 아니, 알 필요가 없지. 우린 공통의 목적을 위해 잠깐 손을 잡았을 뿐이니까.”
딱딱한 어조로 말하던 리올라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나아진 모습 보니까 마음 한구석이 놓이네. 사실 고민했어. 널 말려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근데 오늘 보니까 괜한 걱정이었네.”
병실 문이 열렸다.
같은 자세로 누워 있는 덴스 교수가 보인다.
“오늘은 병원 전체 회의가 있어서 시간을 오래 못 빼. 1시간 안쪽으로 끝내야 하는데, 괜찮을까?”
“네. 오늘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주머니에서 종이봉투를 꺼냈다. 약제사에게 부탁해 조제한 약이 들어 있었다.
어디에 쓸 건지 묻지는 않았지만, 이런 배합은 효과가 없을 거라고 설명했다.
가루약을 물에 개었다. 연노란빛을 띤 약물을 교수의 입에 조금씩 흘려 넣었다.
카트시가 말하길, 효과가 있다면 이틀 정도는 깨어날 거라고 했다.
그 뒤 다시 혼수상태에 빠지고 사망에 이른다고.
손끝이 떨려온다. 약이 효과가 없어도 문제, 있어도 문제였다.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고 문제만 가득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손을 써야 했다.
이별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오기 전에 약을 먼저 먹어봤다. 약제사의 말대로 그냥 쓴맛만 나는 물이었다.
펠트신이란 특수한 독극물에만 반응할 테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교수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이불을 살며시 들췄다. 교수의 왼손 손가락이 까닥거리고 있었다.
“교수님?”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경련이 인 것처럼 떨리던 눈꺼풀이 서서히 들렸다.
“교수님!”
눈동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가하란은 재빨리 리올라를 호출하려 했다. 유단과 프레나도 불러야 했다.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이틀이라고 했으니 가족들과 시간을 가져야 한다.
펠트신과 약물에 관한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교수가 깨어난 건 아마 기적으로 포장될 것이다.
이후에 발생할 문제는 모두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줄리어스의 아이가 왜 교수를 목표로 삼은 건지, 아니면 제삼자가 다른 루트로 펠트신을 얻게 된 건지.
하나하나 조사해 나갈 것이다.
문을 열기 직전이었다.
메마른 목소리가 발길을 붙잡았다.
“안…… 돼.”
가하란은 뒤를 돌아봤다. 교수가 경직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이 상황이 어리둥절할 텐데, 교수는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표정이 결연했다.
몸을 돌렸다. 교수에게 다가갔다.
거친 숨소리에 말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물 드릴까요?”
갈라진 목소리로 무언가 말하던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은 아직 움직일 수 없는지, 팔을 들어 올리다가 인상을 쓰는 교수였다.
교수를 부축해 상체를 세웠다. 물컵을 천천히 기울여 입을 적시도록 도왔다.
“내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한 달 넘게 누워 계셨어요.”
“그랬군.”
“의술사를 불러 올게요. 그리고…….”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곧 죽게 될 거라는 말을 어떤 식으로 전해야 할 까.
“이 몸은 이제 끝난 것 같구나.”
“교수님.”
“뭔가를 알고 있는 눈빛인데, 괜찮으니 말해줬으면 한다. 네가 의술사대신 이 자리에 있는 이유도 분명 있겠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역시 교수님이다.
“……교수님께 허락된 시간은 길어야 이틀 정도일 거예요.”
“이틀이라. 아주 긴 시간이야.”
“교수님?”
덴스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고맙다, 가하란. 네 덕분에 정리할 수 있게 됐어. 그리고……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미안하다, 얘야.”
“예?”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살아 있어서는 안 될 죄를 지었어. 그날, 나는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네 아버지가 남긴 업적에 한눈이 팔린 나머지, 네 아버지 손 대신 연구노트를 잡고 말았다.”
“……교수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나는 올란트가 이룩한 걸 빼앗았다. 너에게 전해졌어야 할 지식을 훔쳤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 그래서 이 꼴이 된 거고.”
가슴이 요동쳤다.
분노가 일었다. 죽음을 앞두고 고백하는 교수의 모습이 가증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뜨겁게 달궈지던 머리가 식어버렸다. 욕지거리가 맴돌던 입도 힘이 쑥 빠져 다물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갛게 웃는 밀레나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얼굴을 떠올리니까 치밀어 오르던 감정들이 잔잔하게 흩어져 버렸다.
“그날, 절 찾아오신 이유가…….”
“모든 걸 털어놓으려고 했다. 네가 어떤 심정으로 살고 있는지 듣고 나서 더더욱 후회했다. 아니, 후회란 말도 네 앞에서 쓰면 안 되겠지.”
덴스가 처연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다행히 신이 존재하는 모양이구나. 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이 이렇게 벌을 받았으니까.”
“아니요. 교수님께서 쓰러지신 건 신의 벌 같은 게…….”
그때, 가하란은 교수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 눈은, 진실을 알고 있는 눈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