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0화
말을 끝내고 목을 축였다.
어제는 밀레나에게, 오늘은 카트시에게.
회고록으로 옮겨도 될 만큼 지난 5년의 시간을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밀레나 앞에서는 어렵게 꺼내놓았던 말들이 카트시 앞에서는 수월하게 나왔다.
역시 첫발을 떼는 게 가장 어려운 법이었다.
-자는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네요.
“응.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
-제가 깨어 있었으면 가하란에게 힘이 됐을 텐데. 아, 오만한 생각일까요?
“아니. 카트시가 있었다면 분명 지금보다는 나았을 거야.”
겉치레가 아니었다. 카트시는 훌륭한 이해자였으니까. 함께였다면 고난과 슬픔을 조금 더 쉽게 받아들였으리라.
-누구에게나 역경은 찾아온다고 해요. 이르냐 느리냐의 차이일 뿐. 가하란은 오랜 시간 한계에 몰렸지만, 그래도 포기하거나 무너지지 않았어요.
“반쯤 포기하고 살았어. 주변 분들에게 폐만 끼치고.”
-그 반이 중요한 거예요. 그 반 덕분에 다시 밀레나와 만날 수 있었고, 그 반 덕분에 저와 얘기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그런 걸까?”
-기계는 거짓말 안 하잖아요. 제 말을 믿어요.
“그건 거짓말 같은데.”
-약간의 거짓은 윤활유예요. 좋게 받아들여요.
카트시가 창밖을 바라봤다.
-제가 본 건 공방거리, 연구단지 안쪽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둔이란 도시가 어떤 구조인지 파악할 수 있었어요. 오밀조밀, 치밀하게 지어진 건물의 미로. 하지만 지금 둔은 옛 모습을 대부분 잃었네요.
가하란도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마법등이 도로를 비추며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 중이지만, 빛이 희미하게 닿는 곳곳에 균열과 아직 재건하지 못한 건물들이 보였다.
그라운드 제로가 할퀸 상처는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돼 도시에 남았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 그라운드 제로 직후에는 정말…….”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무너진 건물 터 같은 건 떠오르지도 않는다. 5년 전을 상기하면 가장 먼저 치우지 못한 시체가 어른거렸고, 그다음에 지워지지 않는 냄새가 뒤따랐다.
가하란은 무의식적으로 코를 매만졌다.
-저쪽이 공동묘지인가요?
카트시의 안구가 위쪽으로 움직였다. 서북 방향, 가장 높은 분배소 옆을 바라보고 있으리라.
“맞아.”
처음에는 묘지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였다. 길목 곳곳에서 썩어가는 시체를 황급히 옮겨 한쪽에 모아놨을 뿐이니까.
터를 닦고 비석을 세운 건 사건 이후 반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가하란의 아버지는…….
“저곳에 이름만 새겨놓았어.”
이름을 새긴 작은 돌을 공동묘지에 놓았다. 다른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공동묘지의 면적은 좁았고, 이름을 새겨야 할 사람은 많았으니까.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았어. 가면, 모든 게 끝나버릴 것 같았거든.”
-다 이해할 거예요.
이해.
밀레나는 말했다.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렇기에 더 많은 대화를 나눴어야 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버지가 아닌 올란트란 인간으로 어떤 삶을 살아오셨을까.
“카트시.”
-네?
“시시콜콜한 거라도 좋으니까 대화를 많이 하자. 그래야 할 것 같아.”
-어머니도 비슷한 말을 했어요. 남는 건 결국 추억뿐이라고. 우리가 나눈 모든 것들이 미래에는 소중한 자산이 될 거예요. 뭐, 감당 못 할 부채가 될 수도 있지만.
“빚은 싫은데.”
살며시 웃으면서 말했다.
-웃음, 역시 가하란은 웃는 게 가장 어울려요.
카트시의 안구가 가하란을 향했다.
-정황 파악은 끝났으니 이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보도록 하죠. 가하란이 우선적으로 해결하고 싶은 건 교수의 문제겠죠?
“다른 무엇보다 그걸 우선시하고 싶어.”
자유의지를 획득하고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카트시라면 무언가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일단 떠오르는 병명이 몇 개 있어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확연한 증상을 보인 후 혼수상태에 빠지죠.
“교수님은 아무런 징조 없이 당일 갑자기 쓰러지셨어. 전날 과음을 하시긴 했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라고 했고.”
-병이 아니라면 다른 쪽으로 생각해봐야 하는데…….
가하란은 팔짱을 끼며 답했다.
“그것도 루카 아저씨가 조사했어.”
-루카?
“아버지의 친구분이셔. 오랫동안 날 돌봐주신 분이기도 하고. 군 담당관으로 이번 일을 조사하시기도 했어.”
-외부 요인은 없다고 결론 났나요?
“어. 침입 흔적은 없었어. 의술사들의 검사에서도 시약에 반응하는 독극물은 없었고. 마찬가지로 몸에 상흔도 없었어.”
-깨끗하게 보낸 거네요. 아, 표현이 좀 과격했나요?
가하란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거친 표현 때문은 아니었다.
“깨끗하게 보내다니? 외부 소행을 의심하는 거야?”
-계속 대조 분석하고 있어요. 가하란이 말한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약품이 몇 개 있거든요.
“하지만 시약 검사에서 검출된 게 없다고…….”
-가하란. 검사는 만능이 아니에요. 현시대의 분석 기술로는 잡아낼 수 없는 약이 존재할 수도 있고요.
유능한 의술사와 행정처 조사관, 검사관에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검시관까지 참여한 합동 조사였다.
근 한 달에 걸친 조사로 타살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된 상태.
급발성 오블리비언으로 최종 마무리 짓고 자생력에 기대 후속 조치만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찾아낼 수 있을까? 그 약물이라는 걸.”
-어머니가 개발한 장치가 있다면 보다 면밀하게 인간의 몸 상태를 들여다볼 수 있지만, 현 상황에서는 불가능하겠죠. 장비가 마련됐다고 한들 기존 교수의 상태값을 알지 못하면 문제점을 찾아낼 수 없고요.
“카트시를 옮길 수도 없고.”
-맞아요. 그러니 가하란의 설명을 바탕으로 최대한 추려보는 게 현실적이겠네요. 기억나는 대로 말해 주겠어요?
기억력은 자신 있었다. 내친김에 펜을 들었다. 교수의 안면을 떠올리며 손을 움직였다.
-그림 실력은 여전하네요.
완성된 초상화에 펜을 들이밀었다.
“얼굴에 반점 같은 건 없었어. 혈색도 그냥 편히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좋았고.”
-목덜미나 귀 뒤쪽은요?
“그건 설명으로 들었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어.”
-감사했다는 의술사, 믿을 수 있나요? 검사관이 살해 흔적을 은폐하는 걸 수도 있어요.
“난 믿어. 교수님이 쓰러지고 난 후, 다른 의술사들은 손을 뗐지만 그분은 계속 원인을 알아보고 계시거든.”
-이유는요? 상부의 명령?
“아니. 화가 난다고 했어. 어수룩한 병명으로 이 상황을 넘겨야 하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음, 그런 동기라면 믿어보기로 하죠. 사실 계속 의심하기 시작하면 무엇 하나 해결할 수 없으니.
가하란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체온 변화와 심박수, 근육의 경직 정도, 반사 작용 등등.
이해는 못 해도 전부 기억해두고 있었다.
-그 리올라라는 의술사, 꽤 개방적이네요. 이런 정보들 하나하나가 의술협회를 지탱하는 자원일 텐데.
“예전 협회나 길드, 클랜들의 구속력이 약해졌어. 아예 사라진 곳들도 많고. 도시마다 각기 다른 체계를 택하고 있어서 예전만큼 결속력이 없는 것 같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타 시대 때는 의술은 국가 관리 등급 최고 수준이라 함부로 유출해서도, 실행해서도 안 되는 중요 자원이었어요.
“시대가 바뀌면 규율도 바뀌니까.”
가하란은 손에서 펜을 놓았다.
기억을 쥐어 짜내도 더는 나올 게 없었다.
-흥미롭네요.
카트시가 말했다.
“흥미롭다니?”
-일치하는 약품이 제 기억 창고 속에 있어요. 발현되는 양상이 같아요. 대상을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아주 편리한 약물로, 정적을 제거하는 용도로 개발됐죠.
독극물.
검출해낼 수 없는 약품이 교수에게 쓰였다?
가하란은 교수의 몸 안을 누비던 이질적인 선을 기억해냈다.
“약물이라면 치료법도 있는 거야?”
-있어요. 그 약이 맞는다면 말이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카트시에게 다가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조 방법도 알아? 구하기 쉬운 약재들이야?”
-진정해요, 가하란. 일단 제 말을 들어줘요.
카트시의 안구가 본체 위로 올라갔다.
-약명은 펠티신. 증상은 아까 말했다시피 대상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요. 당분간 살려둬야 하는 대상에게 쓰이는 약이죠. 가하란, 교수가 사건이 한 달 전에 일어났다고 했죠?
“정확히 41일째야.”
-그렇다면 늦었어요.
“늦다니?”
-정말 펠티신이 맞는다면, 교수를 원상복구, 그러니까 치료할 수 없어요. 치료법은 존재하지만 사흘 이내에 치료를 시작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고요.
맥이 탁 풀리는 대답이었다.
결국 하늘에 기도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
-물론 완치가 아닌 일시적으로 깨우는 거라면 가능해요.
“단순히 깨우는 것 말고 완치할 방법은…….”
-제 안에 그런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요.
가하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교수의 가족들이 떠오른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목소리를 듣고 싶다던 유단과 프레나.
“방법을 알려줘.”
-어렵지는 않아요.
카트시가 불러준 약재를 받아 적었다. 약제사에게 부탁하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고마워, 카트시.”
-아직 고마워하기에는 일러요. 교수의 몸에 투약된 게 펠티신이 아니라면 아무런 반응도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가하란. 아까 제가 흥미롭다고 말한 거 기억하나요?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펠티신은 우리가 활동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약이에요. 그리고 약 제조법을 알고 있는 건, 우리뿐이고요.
“…카트시가 독약을 만들었다는 거야?”
-만들지는 않고 구경을 했죠. 우리 중 하나가 그쪽 방면에 관심이 있었거든요. 시뮬레이션을 통해 안정화를 거치고 개발안을 어머니께 올렸어요. 어머니는 구조에 흥미를 느끼고 제조까지 마쳤지만, 그게 실험실 바깥으로 나간 적은 없어요. 어디까지나 탐구심을 위한 제작이었으니까요.
가하란은 약재가 적힌 메모를 바라보았다.
카트시가 한 말을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너의 친구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이 깨어났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죠. 제조법은 어머니도 알고 있지만, 어머니가 그걸 남겼을 리 없으니까요.
“연결망으로 그 친구를 찾아보는 건?”
-아쉽게도 연결망은 완전히 끊어졌어요. 이건 어머니가 만든 체계라 제가 복구할 방법도 모르고요. 그라운드 제로로 인해 마나 밀도와 고유파장까지 엉망이 됐으니 더더욱 어려워졌죠.
마법공학의 보고(寶庫).
카트시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정보들이 감춰져 있었다.
카트시의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리라. 축복이자 동시에 재앙이 될 수 있는 유사정령.
가하란은 얼굴을 찌푸렸다.
“왜 독약 제조법을 알려준 걸까?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란 걸 알고 있었을 텐데.”
-가하란. 미안하지만, 인간의 도덕과 선악의 잣대를 우리한테 제시하면 곤란해요. 물론 전 줄리어스를 사랑하고, 가하란을 좋아하는 만큼 인간의 방식을 따르기로 결정했어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것에 찬동한 건 아니에요.
잊고 있었다.
거짓말을 발견해내고, 나아가 연구원을 죽인 유사정령이 있다는 걸.
카트시의 우호적인 반응에 착각하고 있었다. 줄리어스의 아이들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들 역시 욕망이 있고, 욕심이 있고, 그렇기에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예전에 네가 말했던 ‘로키’란 애가 깨어났다면, 그 애는 펠트신을 만들었을까?”
-모르겠어요. 이제 우리는 완전히 단절돼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됐으니까요. 하지만, 그 아이가 깨어났고 만약 필요했다면 무엇이든 만들었을 거예요.
무엇이든.
그 말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