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69화 (242/558)

제269화

“기분은 좋네.”

밀레나는 떠듬떠듬 말하던 가하란을 떠올렸다. 어수선하던 모습이 웃기기만 했다.

장난삼아 몰아붙인 건데 정말로 말해줄 줄이야.

마법등 불빛을 따라 걸었다.

과연 둔이라고 해야 하나.

한적한 거리에도 마법등이 설치돼 있었다. 배터리로 관리하는 걸까, 아니면 커넥터로 마나를 공급받는 걸까.

저 멀리 분배소가 보였다.

저것도 시간이 지나면 설치가 쉬워지겠지.

분배소는 커다란 덩치와 달리 섬세한 기구라고 들었다. 까다로운 조건을 통과해야 겨우 설치할 수 있는데, 요건을 충족한다고 해도 자재 수급 문제로 공사가 어렵다고 했다.

그런 분배소가 사방에 박혀 있는 게 이곳 둔이었다.

마법공학의 첨단 도시 둔.

도시국가 중 가장 이름을 드높이고 있으니 언젠가 둔을 중심으로 새로운 연합국이 탄생하지 않을까?

어쩌면 둔을 성도로 한 왕국, 제국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문득 옛 황제가 떠올랐다.

야심을 포기하지 않은 그 남자가 제일 눈독 들이고 있을 도시가 바로 둔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 둔에 있을지도 모른다. 야영지에서 헤어질 때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둔에 가봐야 한다고.

밀레나는 걸음을 멈췄다.

가게 유리창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옆머리를 쓱 매만졌다. 예뻐서, 가하란 입에서 나온 말을 생각하며.

“보는 눈은 있네.”

괜스레 콧노래가 나왔다.

사교 파티에 참석한 적은 몇 없지만, 그때마다 입에 발린 소리를 지겹게 들었다.

관심 없게 지켜보던 사람들도 밀레나의 뒤에 엔첸세가 붙어 있다는 걸 아는 순간, 다가와 인사를 해왔다.

그때 깨달았다.

‘예쁘다’는 말을 대신할 형용사가 질리도록 많다는 걸.

새끼 고양이가 서로의 털을 핥으며 털 관리를 하듯,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온갖 단어를 사용해 서로를 꾸며댔다.

치장에 치장을 덧댄, 고루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물론 그게 예법의 일종이며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행하지는 않았다.

엔첸세는 그래도 된다는 아주 편리한 인식이 있었으니까.

“다 옛날 일이지.”

밀레나는 유리창에서 떨어졌다.

귀족은 쉰내 나는 단어가 됐다.

지금도 옛 귀족처럼 명성을 떨치는 사람이 존재하지만, 귀족 대부분은 고유했던 가치를 잃었다.

마법공학의 시대.

돈의 시대.

능력의 시대.

황제가 그리도 설파했던 능력주의가 그라운드 제로라는 재앙을 통해 확실하게 실현된 것이다.

아마 당분간은 능력 위주의 사회가 지속될 터였다. 물론 안정화가 시작되면 혓바닥만으로 자리를 보전하는 인간들이 나타나겠지만.

아니, 말 기술도 능력이라면 능력인가?

머리를 무겁게 만들던 포만감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밀레나는 기다리고 있을 가하란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낑낑거리는 가하란을 볼 수 있었다.

바퀴 달린 선반에 놓인 유사정령.

가하란은 안간힘을 쓰며 유사정령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얘 좀 옮겨주려고! 으!”

들긴 들었는데, 금방이라도 놓칠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 얼른 다가가 유사정령을 붙잡았다.

-고마워요, 밀레나. 안 그래도 조마조마했어요. 가하란은 나이를 먹었는데도 허약해요.

“지금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래. 가하란, 얘 어디에다 두면 돼?”

“내가 할 수 있어.”

“정말?”

유사정령 밑을 받쳐주던 손을 살짝 뗐다. 가하란의 몸이 휘청거렸다.

“너 아직 정상 아니야. 뒤로 물러나.”

유사정령을 번쩍 들어 올렸다. 가하란이 머쓱한 얼굴로 주방에 난 창문 옆을 가리켰다.

“카트시가 밖을 보고 싶다고 해서.”

“그러면 여기다 둘게.”

창가 옆에 유사정령을 놓았다. 받침대가 된 수납함이 살짝 불안해 보였지만, 다행히 부서지지 않았다.

-오. 훌겐의 야경 느낌이 나네요.

“훌겐?”

-야경으로 유명했던 도시가 있어요. 산을 깎아서 만든 도시인데, 중턱에서 밑을 내려다보면 별처럼 빛나는 전등이 예술적이었죠. 물론 직접 가서 본 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데이터로 접했죠.

“데이터라니?”

-정보의 단위라고 생각하면 편해요.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그래요. 사진으로 봤어요.

밀레나는 창밖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야경이 멋진 도시? 산을 깎아 만든 도시?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애초에 산을 깎아서 도시를 만든다는 개념 자체가 이해가 안 됐다.

가파르지 않은 산면에 농작물을 기르는 건 봤어도, 능선을 파헤쳐 거기에 도시를 세우다니.

막대한 자원과 인력을 써서 공을 들인다면야 만들 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어디에 있는 도시인데? 적어도 제국은 아닌 거 같고. 연합왕국 쪽인가?”

카트시의 안구가 밀레나를 향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아요. 지금도 그 형태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근방에 그런 도시는 없어.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도 마찬가지고.”

-옛 도시니까요.

“옛 도시? 얼마나?”

-가하란이 준 문헌을 참고해서 대략적인 연도를 계산해보면, 약 650년 전쯤?

“650년?”

터무니없는 숫자에 웃음도 안 나왔다. 650년이라니. 제국이 태동하기도 전인데?

“오래된 자료를 읽은 거구나?”

-아니요. 당시에 찍은 사진으로 본 거예요. 생생하게.

생생하다는 단어를 기계가 쓰니까 이질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카트시와 작별할 때 이런 말을 했다. 대화를 계속하면 거부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카트시라고 했지?”

-네.

“650년 전 일을 당시에 목격했다는 건 네가 만들어진 시기가…….”

-개발 시기까지 합치면 정확한 건 모르지만, 적어도 650년 전에 만들어진 건 확실하겠죠?

밀레나는 슬쩍 가하란을 봤다.

시시한 장난 같았다. 몇백 년 전 유사정령이 원형을 보존한 채 남아 있다? 게다가 작동까지 하고?

“카트시가 한 말에 거짓은 없어.”

입 안이 살짝 말랐다.

-창조주들은 그 말을 좋아하잖아요. 기계는 거짓말을 못 한다. 스스로 제창했으면서 왜 이럴 땐 의심부터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유창하게 말하는 카트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말했죠? 거부감이 들 거라고. 제작 시기를 알아낸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느껴지죠? 하지만 전 괜찮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

“이해한다고?”

-제 기준으로 수백 번은 반복해온 대화 주제가 또 튀어나오겠네요. 전 사람을 이해해요. 감정을 알고요.

“그럴 리가. 기계가 어떻게…….”

-괜찮아요. 믿음은 제가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리고 밀레나에게 믿음을 갈구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도 아니고. 전 가하란이 절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감정을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기계. 정말 가능한 일일까?

“카트시는 조금 특별한 방법으로 만들어졌어. 지금의 마법공학으로도 규명할 수 없는 방식이고.”

“정말로 650년 전에 제작됐다고 해도 과거의 기술이잖아. 현시대의 마법공학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건…….”

기술은 진보한다.

게다가 마법공학은 그라운드 제로를 기점으로 진일보했다. 패러다임 시프트가 찾아온 것이다.

심상세계를 다루는 마법이라면 모를까, 마법공학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을 텐데.

-시대를 관통하는 인물은 항상 나타나기 마련이죠.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었고요.

카트시가 말했다.

“어머니?”

제작자를 말하는 건가?

기계 안구가 스르륵 움직였다.

-가하란. 저는 보안책임자인 당신을 무한히 신뢰하지만, 그럼에도 조언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엔엔과 당신은 제 존재를 은폐하기로 했어요. 옳은 판단이었죠. 제가 위험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요.

독자적으로 위험을 판단하는 기계. 제작자가 지정해준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결론을 돌출했다는 건가?

-그러니 되물을 수밖에 없네요. 가하란, 저에 관한 정보를 밀레나와 공유해도 괜찮은 건가요? 지금이라면 적당히 무마할 수 있어요.

“지금도 무마하긴 힘들어 보이는데.”

가하란이 미소를 지었다.

-장난쳤다고 하면 돼요. 지금 이 모습도 저 여자한테는 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호칭이 바뀌었다.

밀레나는 깨달았다. 카트시가 의심하고 있다는 걸. 기계에게 의심받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난 누나를 믿어.”

믿는다.

밀레나는 카트시를 응시했다.

“아직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어. 너무 당황스럽거든. 네가 한 얘기를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면, 내 상식이 깨지는 거니까.”

-그러면요?

“방법은 하나뿐이잖아. 얘기를 해보는 거. 머릿속에 직접 정보를 주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간은 그게 안 되거든.”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다소 까다롭고 매우 위험할 뿐이죠. 정신체를 이용한다면 접근할 방법은 여러 가지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지만 내용을 곱씹으니 소스라치도록 무서운 말이었다.

눈앞에 있는 기계는 정말 무엇인가? 이걸 만든 어머니란 사람은 누구이고, 가하란은 어떻게 만난 걸까?

-과거를 되짚기 전에 해결해야 할 것이 하나 있어요. 가하란, 5년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줘요. 그래야 단절된 이유를 보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으니.

“그게 순서에 맞겠네. 누나, 지금부터 할 얘기는 조금 까다로울 수도 있어. 괜찮을까?”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해봐. 하나부터 열까지, 다 들어줄 테니까. 특히 카트시에 관한 건 모두.”

“조금 복잡할 수도 있어.”

“이해력이 부족하단 말은 들어본 적 없어. 그러니 염려 말고 말해봐.”

* * *

“저기, 누나. 괜찮은 거 맞지?”

“……어.”

맥없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밀레나였다. 항상 힘이 들어가 있는 눈동자도 지금은 축 처져 있었다.

“오늘 들은 거 말이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 같아.”

밀레나가 창가에 있는 카트시를 바라봤다. 카트시는 안구를 움직여 인사를 대신했다.

“아무튼, 금방 다시 올게.”

밀레나를 배웅하러 현관까지 나갔다. 흐느적거리며 걸어가던 밀레나가 도중에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무슨 생각 중일지 짐작이 된다.

“누나! 조심해서 가!”

“어, 어. 그래.”

밀레나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밀레나는 어때요? 납득한 거 같아요?

“내면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거 같아.”

-나중에 그 블루아이라는 친구를 만나보고 싶네요. 그나마 기계에 대해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걸 보면, 블루아이란 친구가 꽤 유능했나 봐요.

“제국에서 손꼽히는 거병 중 하나였으니까. 그걸 서포트하는 오토마타였으니 유능했겠지.”

-이 시대의 친구들은 어느 정도의 사고능력을 지녔을지 궁금하네요.

“크게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아.”

어떤 오토마타를 가져와도 카트시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가하란은 의자를 가져와 카트시 옆에 앉았다.

“아까 하던 얘기 마무리하면…… 카트시가 잠든 원인은 그라운드 제로로 인한 마나 밀도 증가였지만, 단절 상태가 지속된 건 내 고유파장 문제였다?”

-네. 가하란은 제 본체에 접촉, 그리고 이해를 끝마친 사람이에요. 마력선 짜맞춤의 개요를 아는 이 시대의 유일한 인간일 테죠.

“그래서?”

-그렇기에 모든 권한을 넘겼고, 보안책임자가 된다는 건 당신의 고유파장을 제가 받아들였다는 뜻이에요. 가하란이 안정된 상태가 아니면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단절을 시작해요.

“보안 유지를 위해서?”

-그런 거죠. 저도 이번에 깨달았어요. 사실 어머니가 있었을 땐 이런 시스템의 존재 자체를 몰랐어요. 어머니와 헤어졌을 땐 어머니의 의지로 우리가 모두 잠들게 했으니.

카트시를 비롯한 줄리어스가 만들어낸 오토마타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물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시대의 유사정령보다 구성이 조악하지만, 중요한 건 감춰진 회로와 마력선 짜맞춤이니까.

본체를 강탈당해도 속뜻을 알아볼 수 없고, 제작자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모든 기능이 잠겨버린다.

단순하지만 가장 안전한 보안책이 아닐까.

“나 때문에 긴 잠을 잔 거였네. 미안해.”

-아니에요. 어차피 단절 상태라 기억도 안 나는걸요. 대신, 앞으로는 멋대로 떠나지 마요. 파트너를 두 번이나 잃는 건 싫으니까.

가하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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