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68화 (241/558)

제268화

“조만간 다시 올게요.”

손에 들고 있던 외투를 입으며 말했다.

“아까 보니까 뭔가 떠오른 게 있는 것 같던데.”

셀베이아가 문 앞에서 물었다. 가하란은 밑 단추 하나를 잠그며 대답했다.

“아직은 가설일 뿐이에요. 설명할 수 있는 단계도 아니고요. 하지만, 틀이 갖춰지고 나면 브라인 님께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해.”

고개를 끄덕인 후 2층 다락을 올려다보았다. 열린 창을 통해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만 가볼게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카트시에게 말해줄 것도, 물어볼 것도 많았다. 밤을 지새워도 모자랄 정도로.

기억과 언어.

브라인은 심상세계 안에 기억을 관리하는 캐비닛을 만들어 놓았다. 만약 물리적인 영향으로 뇌가 손상된 게 아니라, 심상세계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했다. 신경학적 부분이야 연구 자료가 있어 정보를 찾아볼 수 있지만, 심상세계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기본 체계. 이것 외에는 심상세계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진 바 없었다.

자아와 비슷한 느낌이다.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게 어떤 식으로 구성돼 있으며 또 어떻게 생성되는지 알 길이 없다.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생각의 가지를 하나둘씩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집 앞 길목이었다.

집이 보였고, 앞에 서 있는 사람도 보였다.

가하란은 움찔하며 걸음을 멈췄다.

온갖 정보들이 난잡하게 돌아다니던 머릿속이 한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아.”

입을 통해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소리를 들었는지 집 앞에서 기다리던 밀레나가 웃으면 다가왔다.

위기감을 조성하는 웃음이었다.

“아?”

“누나, 그게…….”

밀레나가 눈을 씰룩였다.

“어제 생각해 보니까 몇 시에 만날지 시간을 안 정했더라. 그래서 일단 루드 팩토리를 찾아갔어. 거기서 널 보면 되니까. 근데 제니가 그러더라, 한참 전에 나갔다고.”

가하란은 입을 꾹 다물고 밀레나의 말을 들었다.

“제니 표정이 아주 좋아 보였어. 직감했지. 네가 잘 설명했구나, 하고. 제니랑 수다 떨면서 네 욕을 좀 했어. 애가 너무 고지식하니, 사람에게 기댈 줄 모르는 인간이니 등등.”

“그, 그랬구나. 누나, 일단 안으로…….”

밀레나가 고개를 저었다.

“제니랑 떠드는 게 그렇게 재미있더라. 시간이 금방 지나갔어. 시계를 봤지. 4시쯤 됐어. 네가 휴가를 달라고 했다며? 그래서 난 생각했지. 아, 집에 가서 쉬고 있겠구나. 나랑 오늘 보기로 약속까지 했으니까. 내가 강요한 약속도 아니고, 네가 꼭 와달라고 한 약속이었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가 나왔다. 오래전 밀레나가 보여준 시계였다. 스콜라 생도들이 갖고 다닌다던 시계.

“그 시계 기억난다.”

은근슬쩍 화제를 돌려보려 했지만, 밀레나는 넘어가 주지 않았다.

“시계는 시계고, 지금 몇 시지? 음, 9시네? 내가 여기에 도착했을 때가 4시 30분이었어. 나는 과연 몇 시간을 집 앞에 서서 기다린 걸까?”

밀레나가 손가락을 들어 하늘에 뜬 달을 가리켰다.

“……미안.”

“사과를 바란 건 아니지만 들으니까 기분이 좀 풀리네. 이제 설명해봐. 설마 까먹은 거야? 오늘 보기로 한 거?”

가하란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라도, 정말 한순간이라도 기억이 났다면 집으로 뛰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어제 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음식을 준비하며 착실하게 하루 계획을 정하는 동안, 밀레나와 한 약속이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가시방석도 아니고 공기 자체가 가시가 된 기분이었다.

어쩔 줄 몰라 멀거니 밀레나만 보고 있을 때였다. 밀레나가 한숨 한 번, 그리고 작은 웃음 한 번을 보여줬다.

“오늘 하루 어땠어?”

“어?”

“오늘 하루 어땠냐고.”

“……좋았어. 주변 분들한테 상황을 설명하고 인사드리고 나니까 모든 게 정리된 기분이었어.”

“잘됐네. 잘했고.”

밀레나가 문을 가리켰다.

“차마 저 문을 뜯어내고 들어갈 순 없어서 기다렸어. 주인이 왔으니 이제 열어주라.”

가하란은 쭈뼛거리며 밀레나 옆으로 갔다.

“화 많이 났어?”

“우중충한 얼굴로 돌아왔다면 얼굴에 대고 욕 한 바가지 시원하게 뱉고 갔을 거야. 근데 좋아 보이더라.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열쇠를 꽂아 넣고 돌렸다. 현관등에 불을 켜고 밀레나를 맞이했다.

“늦었지만, 들어와.”

“초대해줘서 고마워. 야밤이긴 하지만.”

목소리를 내기 무섭게 작은 방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가하란! 왔나요? 파장을 살피니까 밀레나도 같이 온 거 같은데. 얼른 와서 얘기해줘요. 심심해서 죽을 거 같아요. 물론 죽지는 않겠지만.

떠들썩한 음성에 밀레나가 풋, 하고 웃었다.

“저 친구는 항상 요란해?”

“저게 그나마 얌전해진 편이야.”

작은방을 열어 얼굴을 들이민 후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정확한 시간을 정해줘요.

“한 30분?”

-지금부터 정확히 30분 뒤에 소리 지를 거예요.

급하다 급해.

밀레나를 의자에 앉힌 후 외투를 벗었다. 보관함으로 걸어가며 물었다.

“저녁 아직 안 먹은 거지?”

“안 먹었지. 너랑 먹으려고.”

가슴을 쿡 찌르는 말에 방어적인 미소가 나왔다.

“아침에 준비해놓은 게 있어.”

재빨리 음식을 차렸다. 아침에 요리를 해놓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줄 수 있어? 싫으면 다른 얘기도 좋아. 난 먹을 때 시끌시끌한 게 좋거든.”

조금 덜어놓은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돌이켜 봤다. 살며시 미소가 나온다.

정제하지 않은 언어로 오늘 있었던 일을 전했다. 느꼈던 것들을 가감 없이 말하고 싶었다.

누나는 웃으면서, 가끔 애틋한 눈을 하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다른 사람에게 나의 하루를 공유한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즐거우면서도 아늑해진다.

“누나는 오늘 어땠어?”

“설마 그걸 지금 묻는 거야?”

“……아.”

“농담이야. 기다리는 게 그렇게 싫지는 않았어. 살짝 걱정되긴 했지만, 네가 웃으면서 오는 걸 봤을 때 모든 게 풀렸어. 잘 해결하고 왔구나, 이제는 정말 괜찮겠구나.”

애호박을 포크로 찍으며 말하는 밀레나였다.

대화가 잠시 끊겼다. 그동안 가하란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밀레나를 바라봤다.

약간 곱슬한 머리카락을, 나와 반대인 붉은 눈동자를, 예전보다 날렵해진 턱과 길어진 목을.

-30분! 30분! 30분!

정신을 일깨우는 요란한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평온했던 심장이 비정상적인 박자로 뛰었다.

얼굴도 뜨뜻하고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게 된다.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주 난리인데.”

작은방을 보며 말하는 밀레나였다. 가하란은 어설프게 웃으며 일어섰다.

-30분!

“알았어, 알았어.”

방문을 열며 말했다. 카트시의 안구가 뱀처럼 스르륵 움직였다.

-가하란.

“어?”

-평상시보다 심박수가 높네요. 고유파장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고. 잠깐만요, 저 이 패턴 변화 알아요.

듣자마자 불안감이 샘솟았다.

생각보다 몸이 빨랐다. 재빠르게 작은방 문을 닫았다. 닫자마자, 카트시가 말했다.

-가하란은 저 밖에 있는 여자에게 호감을…….

“워! 워워워!”

입 밖으로 이상한 소리가 나갔다.

동시에 바깥에서 밀레나가 질문해왔다.

“무슨 일이야? 방문은 왜 갑자기 닫고. 그리고 이상한 소리도 났어.”

“잠깐만! 기계에 오류가 생긴 거 같아.”

“큰 문제야?”

“그런 건 아니라서, 잠깐이면 돼.”

가하란은 카트시를 바라봤다.

“너 그 말 하면 안 돼. 알겠지?”

-알겠어요. 이유는 묻지 않을 게요. 호감 있는 여성에게 기이한 행동을 보이는 건 오랜 전통과도 같은…….

“카트시!”

-조용히 할게요. 하지만 가하란, 왜 숨기려는 거죠?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그리고, 아직 이 감정이 뭔지 제대로 모르겠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니까 이러는 거잖아요. 뭐, 바깥 상황을 자세히 모르니 입 다물고 있을게요. 줄리어스도 이럴 때 떠들면 싫어하긴 했으니.

“이해해줘서 고맙네.”

눈을 얇게 뜨며 카트시를 바라봤다.

-별말씀을. 근데 좋아하는 거 맞죠?

“모른다니까.”

-서툰 척하는 것도 매력이긴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해야 해요. 이건 제 안에 축적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가하란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더 듣고 있다가는 얼굴이 새빨갛게 변할 것 같았다.

“해결한 거야?”

밀레나가 물었다.

“어. 사소한 문제였어.”

“저 안에 있는 친구, 카트시는 네 표현대로라면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될 위험한 기계잖아. 그런 기계에 오류가 생긴 거면 큰일 아니야?”

거짓말은 이래서 해롭다. 자꾸 추가해야 할 설명이 늘어나니까.

그렇다고 온몸을 휘감은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었다.

5년 전에는 가까운 친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많은 게 달라졌다.

“유사정령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라서. 이제 해결됐으니까 괜찮아.”

“의심쩍은데. 왜 내 눈을 피하면서 말해?”

“내가 그랬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다가 슬그머니 돌렸다. 어제는 왜 몰랐지? 누나가 이렇게나…….

“말하기 곤란한 거라면 제대로 말해. 이건 말해줄 수 없다고. 그게 더 속 편해.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보다 훨씬 좋고.”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거짓말을 덧대면 누나는 분명 알아채고 씁쓸해 하리라.

“미안. 누나 말대로 거짓말을 했어.”

“그럴 것 같더라. 뭔데? 대체 뭐길래 그렇게 당황한 거야?”

“……내 심박수가 평소랑 다르대. 카트시가.”

“심박수? 몸에 문제 있는 거야? 오늘 쉬어야 하는데 너무 돌아다닌 건 아니고? 지금이라도 쉴래?”

걱정하며 묻는 밀레나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게…….”

“뭔데. 왜 그렇게 뜸들여. 정말 큰 문제 있는 거 아니지?”

숨을 한 모금 크게 삼키고 반쯤 포기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누나가 예쁘게 보여서 계속 봤어. 그랬더니 내 변화를 알아채고 카트시가 한마디 했고. 그게 부끄러워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댔어. 이게 끝이야.”

쏟아내듯이 말했다. 끝난 후 슬그머니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밀레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음식을 입에 넣었다.

“난 또 뭐라고. 나도 알아. 내가 꽤 괜찮게 생겼다는 거. 엄마한테 잘 물려받았지. 아, 물론 아버지의 눈매도 살짝.”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는 밀레나였다. 가하란은 아주 약간의 섭섭함, 그리고 극한의 안도감을 느꼈다.

어색해지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밀레나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잘 먹었어. 맛이 괜찮은데?”

“다, 다행이네.”

원래 이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거였나?

하긴, 누나는 귀족이었다. 사교회에 어울리며 고상한 대회를 수없이 나눴을 것이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이런 말도 심심찮게 들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귀족들은 어릴 때부터 약혼을 맺은 상대와 자주 만난다고 들었다.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아는 동생의 앙증맞은 칭찬 정도로 받아들였기에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닐까?

“치울게.”

“나도 도울까?”

“아니야, 누나. 쉬고 있어. 밖에서 계속 기다리느라 힘들었을 텐데.”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

그릇을 치우면서 고개를 살짝 털었다. 어쨌든 잘 넘겼다. 다시는 실수하지 말아야지.

“나 잠깐만 걷고 올게. 너무 많이 먹었나 봐.”

밀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가자는 말을 꺼낼 새도 없이, 그대로 집 밖으로 나갔다.

“카트시.”

-왜요?

“네가 처음으로 밉다.”

-고마워요.

킥킥 웃는 카트시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