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67화 (240/558)

제267화

오늘만 이런 표정을 몇 번째 봤더라.

문을 연 채 굳어 있는 셀베이아를 향해 손을 살짝 흔들었다.

“누나.”

“가하란, 네가 이 시간에 여긴…….”

“연락 없이 찾아와서 미안해요.”

그제야 얼떨떨하게 쳐다보던 셀베이아가 은은한 미소를 보여줬다.

“미안할 것까지야.”

셀베이아가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들어와. 마침 저녁 먹으려고 했는데, 밥은?”

“아직 안 먹었어요.”

“그래? 저녁으로 메르젠 해놨는데 어때? 바쁘지 않으면 저녁 먹고 가.”

“네, 그럴게요.”

주방을 향해 걷던 셀베이아가 제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믿을 수 없는 진실을 접한 사람처럼 놀란 표정이었다.

“양이 적으면 다음에 올까요?”

웃음을 섞어 말했다. 셀베이아가 곧바로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음식 많아! 내일까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했어. 그러니까 먹고 가. 그래, 꼭 먹어야 해.”

다시금 깨닫게 된다. 지난 5년간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신경을 써줬는지.

식사 자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남아 있었다. 한없이 고마울 뿐이었다.

“이거, 오는 길에 눈에 띄어서 가져왔어요.”

뒤에 감추고 있던 작은 화분을 내밀었다. 곧 찾아올 여름철에 만개하는 아름다리꽃.

지금은 줄기에 봉오리만 다닥다닥 작게 붙어 있지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자줏빛 꽃잎을 틔우리라.

셀베이아가 화분을 받았다.

“……정말 마음에 드는 선물이야.”

진한 웃음을 띠며 식탁 한쪽에 화분을 놓았다. 아름다리꽃에는 꽃말이 여러 개 있지만, 대표적으로 쓰이는 건 ‘치유’였다.

꽃말은 셀베이아가 알려줬다. 오래전 일이지만, 누나의 표정을 보니 단번에 알아챈 것 같았다.

“너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대령님을 위한 것이기도 하네.”

셀베이아가 꽃을 보며 말했다.

“오랫동안 민폐를 끼쳤어요. 죄송해요.”

“그렇게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아니, 솔직히 말하면 몇 대 쥐어박고 싶을 때가 있긴 했지.”

“지금이라도 한 대 때리실래요?”

“됐어. 다 큰 애 때려서 뭐 해. 내 손만 아프지.”

가하란은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브라인 님은 위에 계시나요?”

“올라가 봐. 지금은 괜찮을 거야. 그리고 올라간 김에 모셔 오고.”

“네, 그럴게요.”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을 밟았다. 원목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냈다.

위에 오르자마자 보인 건 의자에 앉아 있는 브라인이었다. 활짝 열린 창문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인 님.”

곁으로 다가가 작게 불렀다. 브라인의 고개가 움직였다.

“너구나.”

“네, 저예요.”

고개가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브라인은 무릎에 놓아둔 노트를 들고 펜으로 글을 썼다.

이 만남을 기록하는 중이리라.

“오늘은 어떤 걸 보셨나요?”

“많은 걸 봤지.”

몇 달 전 인사차 찾아왔을 때 왼쪽 벽은 텅 비어 있었다. 지금은 너덜너덜한 노트가 잔뜩 쌓여 있고.

그라운드 제로 이후 대령은 기억을 잃었다. 셀베이아가 말하길 ‘대가’라고 했다.

한 사람의 운명을 인위적으로 바꾼 대가.

“빗질해 드려도 될까요?”

가하란은 원형 탁자 위에 놓인 빗에 손을 댔다. 브라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쓱쓱, 빗이 윤기 잃은 털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예전에도 네가 이렇게 빗질을 해줬다고 했지?”

“네.”

“음, 예전에 나는 꽤 관대했나 봐.”

“왜요?”

“이 어설픈 솜씨를 참아낸 걸 보면 말이야.”

“제법 잘하지 않나요?”

“전혀. 지금도 꼬인 부분을 억지로 당기고 있잖아. 그럴 땐 결을 바꿔서 빗어야지.”

“예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죠.”

빗질을 끝냈다. 브라인이 정돈된 털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다음에는 더 잘했으면 좋겠네.”

“연습해 올게요.”

가하란은 브라인의 우측으로 이동했다.

“식사 준비가 됐어요.”

“먹을 필요 없어.”

“하지만 맛은 즐기시잖아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기록하기 바빠.”

펜을 향해 움직이는 손이었다. 가하란은 브라인이 낀 검은 의수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냄새가 굉장히 좋았어요. 브라인 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물끄러미 바라보던 브라인이 손목을 까닥였다. 검은 의수가 벗겨지며 토실토실한 손이 나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지 못해 안달이 난 인간족처럼 보였는데.”

“여러 사람 덕분에 지금은 나아졌어요.”

“재미없네. 아주 평범한 얼굴이 됐어. 기록할 맛이 안 나.”

“인상 쓰고 다닐까요?”

가하란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됐다. 웃음조차 안 나오니 그만해.”

브라인과 함께 밑으로 내려갔다. 감자와 버터가 만들어낸 고소한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브라인은 말없이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차려진 음식을 한 번씩 떠먹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해야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몫은 차릴 필요 없다. 난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

“다른 건 다 맞춰드릴 수 있어도 식사만큼은 포기 못 해요.”

셀베이아가 웃으며 대꾸했다.

“말 안 듣는 인간족은 정말 골치 아파.”

혀를 차며 다락으로 올라가는 브라인이었다. 가하란은 조금씩 떠먹은 음식을 바라봤다.

“이건 제가 먹을게요.”

“아니야. 따로 내줄게.”

“일 두 번 할 필요 없어요.”

자리에 앉아 옆에 가지런히 놓아둔 숟가락과 포크를 몸 앞으로 가져왔다.

“누나도 어서 앉아요.”

맞은편에 셀베이아가 앉았다.

식사는 조용히 진행됐다. 도중에 몇 번 말을 꺼내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누나는 빙긋 웃고는 다락으로 가는 계단을 바라봤다.

“나중에 누나한테 요리를 배워야겠어요.”

식후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셀베이아가 말린 과일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가정식뿐이라 배울 것도 없어. 재료만 좋은 걸 사면 나머진 알아서 되니까.”

셀베이아가 찻잔을 들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게 돼서 좋네. 이런 시간이 그리웠어. 기억나? 대령님 점심 준비하면서 주절주절 떠들었던 거.”

“다 기억해요. 제가 온갖 난해한 질문을 해도 누나는 피하는 법이 없었죠.”

대화 도중에도 셀베이아의 눈동자는 계단 쪽으로 슬쩍 움직였다.

가하란은 입술을 찻물로 살짝 축인 다음 말했다.

“브라인 님과 짧게나마 얘기해 봤어요. 기억은 아직…….”

“여전하셔. 5년 전 그날 이후, 대령님은 변함이 없으시지. 참 한결같으신 분이야.”

웃고 있는 눈이 슬퍼 보인다.

가슴 안쪽이 아려왔다.

스스로를 억압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때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누나 역시 고통스러운 시간 안에 살고 있다는 걸.

“누나는 괜찮아요?”

“나?”

셀베이아가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안 괜찮았어. 괜찮을 리가 없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령님이 희생한 거니까. 내 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이, 나 때문에 모든 걸 잃었어.”

기억 안에 감정이 있다. 기억 안에 시간이 있고, 기억 안에 이야기가 있다.

대령은 그 기억을 잃었다.

수백, 어쩌면 천 년이 넘어갈지도 모르는 기억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것이다.

모든 걸 잃은 대령을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괜찮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누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어른이란 단어가 가슴에 확 와닿으면서, 동시에 안쓰러워졌다.

누나는 어떤 심정으로 나를 지켜봤을까. 누구 못지않게 아픈 상태로, 어떻게 날 위로할 수 있었을까.

“그거 알아? 가끔은 네가 무슨 생각 중인지 훤히 보인다는 거. 소리까지 들리는 거 같아.”

“그, 그런가요.”

셀베이아가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었다.

“힘들었어. 자괴감도 들고. 근데 어느 날 대령님이 이런 말을 해줬어.”

누나의 시선이 다시금 계단 쪽으로 향한다.

“‘내가 기억을 대가로 널 살렸다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 선택을 네가 욕보이지 마라. 얼굴 펴고, 되도록 웃고.’ 아직도 기억해.”

그때였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계단을 밟고 내려온 브라인이 이쪽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끄러웠나요?”

셀베이아가 말했다.

“대놓고 내 얘기 하는데 안 내려올 수가 있나. 하여간 인간족들은.”

“오신 김에 차 한 잔 드릴까요?”

됐다고 말하며 돌아설 줄 알았다. 하지만 브라인은 너털너털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줘. 들고 올라갈 테니.”

손잡이가 유난히 큰 머그잔에 차를 따랐다. 브라인이 잔을 들고 코를 킁킁거리더니 눈을 씰룩였다.

“향이 별론데.”

“맛은 좋아요.”

“향이 별로인 차는 반쪽자리야.”

툴툴거리는 모습이 예전과 똑같았다. 맛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으니까.

“나는 머저리가 아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했다면, 필시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지.”

브라인이 등을 돌렸다.

“나한테 빚졌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원해서 한 거였을 테니 너한테 받을 건 없어. 그러니 귀찮은 노인네 그만 돌보고 너도 살길 찾아가라. 인간족의 삶은 짧아. 그 짧은 순간을 헛되이 낭비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전 대령님 곁에 있는 게 좋아요.”

“나는 대령이 아니야. 예전에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브라인이 계단 위로 사라졌다.

셀베이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분명 날 알아보지 못하셨어. 나에 대해 기억하는 것도 없으시고. 차갑게 대할 때도 있고, 무시할 때도 많아. 하지만…… 내가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날 걱정해주셔. 대령님은 변하지 않으신 거 같아.”

“그런 것 같네요.”

진중한 어투의 브라인은 역시 낯설지만, 그래도 은연중에 보여주는 정겨운 모습은 여전했다.

흐뭇하게 웃으며 차를 마실 때였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다.

“누나. 브라인 님께서 누나를 보호한 거죠?”

“어. 그날, 난 대령님의 심상세계 안에 있었어. 진동이 멎고 밖으로 나왔을 때 세상이 달라져 있었지.”

“그때 당시 브라인 님은 어땠나요?”

“그때 당시?”

셀베이아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떠올리기 싫은 과거를 떠올리게 해서 미안했지만, 들어야 할 말이 있었다.

“지금의 대령님이었어. 날 보자마자 누구냐고 물었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었다는 거네요?”

“응. 그리고는 주변을 돌아보시더니 수첩을 꺼내셨어. 아주 바쁘게 손을 움직이셨지.”

가하란은 빈 잔을 바라봤다.

기억은 모든 걸 포함한다.

사고능력 역시 모든 기억을 잃는다면 사라질 것이다. 소통을 위한 언어도 쌓아온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다.

바탕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대령은 사물을 분간하고, 아무렇지 않게 소통할 수 있는 걸까.

“모든 기억이 사라졌다면 언어능력도 없어지는 게 타당하지 않나요?”

“그게 무슨 뜻이야?”

“말이요. 우리가 하는 말. 이것도 배우는 거잖아요.”

“말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걸 깨닫는 거잖아. 배우는 게 아니라. 배우는 건 글자뿐이지.”

가하란은 멍한 상태로 앞을 바라봤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었다.

누나의 말대로 ‘말’은 영혼에 각인 된 것이라 그저 깨달으면 된다. 배우는 게 아니라.

근데 왜 나는 말조차 데이터고 배우는 거라 생각했지?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밝아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붉은 실 같은 걸 봤다. 몸에 달라붙어 있었는데 방금 전 그 실들이 떨어져 나갔다.

혼돈이 잦아들었다.

“……말이 깨닫는 게 아니라 배우는 거라 치면, 기억을 잃게 됐을 때 말도 못 하게 되겠죠?”

“그렇겠지. 네 말대로라면.”

“어쩌면 대령님은 모든 기억을 잃은 게 아닐지도 몰라요.”

언어능력이 남아 있었다.

확인하지 못할 뿐 기억 덩어리가 대령의 머릿속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닐까?

그 순간 카트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억에 접근하려면 주소가 필요해요. 주소가 없으면 기억 단위에 접속하지 못하죠.

만약, 인간이 기계와 비슷한 점이 있다면?

발칙한 생각이지만 이러면 해결책이 보일지도 모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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