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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66화 (239/558)

제266화

눈을 뜨고 아침을 준비했다.

부산스럽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았다. 고요한 아침을 두드리는 도마소리에 집중하다가 문득 창을 바라봤다.

햇살이 넘나들고 있었다. 칼질을 잠시 멈추고 햇빛 위를 춤추는 나뭇잎 그림자를 바라봤다.

이곳에 머문 지 3년. 처음 깨달았다. 주방 깊숙한 곳까지 햇빛이 닿는다는 걸.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제는 괜찮아졌구나.

자책감이, 도망치고 싶다는 불안감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저변에 눌어붙은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본질에서 눈을 돌리지 않게 됐으니까. 제대로 보고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분명 괜찮아진 것이다.

‘괜찮다’가 ‘좋다’로 변하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으리라.

확신에 찬 예감이 들었다.

가하란은 다시 손을 분주히 움직였다. 카트시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싶지만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준비한 바구니에 준비한 음식을 담았다. 오랜만에 한 요리라 엉성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기껏 밀리언에게 요리를 배웠는데 이것도 썩히고 있었구나.

“카트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살짝 긴장되기도 했다. 또다시 잠들었으면 어쩌지?

“카트시?”

두어 번 이름을 불렀다. 금방 대답해야 할 카트시가 침묵을 고수했다.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걸까.

걱정돼 한 걸음 다가갔을 때였다.

-좀 더 장난치고 싶었지만 가하란의 얼굴을 보니까 그럴 수 없겠네요.

“…놀랐잖아.”

-이렇게 격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린 이러고 놀았잖아요.

얼마 전이라.

카트시는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까?

-제가 기억하는 거요? 강렬한 파장이 본체를 휩쓸었다는 건 기억해요. 기록지에 표시할 수 없는 수치였죠. 전 그때 이런 생각을 했죠. 아! 드디어 지상 위에 모든 종이 종말을 맞이하겠구나.

정확한 단어 선택이었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갔으면 지상 위에 모든 것들이 사라졌을 것이다.

-아침부터 바쁘던데, 어디 가는 건가요?

“잠깐 나갔다 오려고. 아니, 좀 길어지려나.”

-기쁜 일인가 봐요. 가하란 얼굴이 밝아요.

“기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인간은 언제나 양가적인 감정을 품죠.

카트시의 안구가 방 안을 훑었다.

-공방과 비교하면 좁지만, 그래도 정겨운 맛이 있네요. 복잡하지도 않고.

“돌아와서 자리를 옮겨줄게. 창문 가까이가 좋겠지?”

-네. 바깥 풍경을 보고 싶어요.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닐 거야. 많은 게 변했으니까.”

방을 나와 음식이 담긴 바구니를 챙겼다.

“돌아오면 다 얘기해 줄게. 네가 잠들고 난 후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말이야.”

-기대하고 있을게요!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카트시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매일같이 걷던 길을 걸었다.

공사가 덜 끝난 도로 위를 자동수레가 가로질렀다. 막 좌판을 연 가게에 물건이 쌓였고, 그 앞으로 작은 말이 지나갔다.

짝을 이룬 아이들이 거병 진입로를 뛰어다니다가 붙들려 혼이 났고, 거병 체임버에서 고개를 내민 남자는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라며 한껏 웃었다.

늘 봐왔던 광경이 뇌리에 새겨진다.

지난 5년을 돌이켜 봤다. 이곳을 수없이 지나다니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돌이켜 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어둡게 칠해진 단편만이 드문드문 생각날 뿐.

“작은 선생님!”

멀리서 아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쪼르르 달려온 아이가 방긋 웃었다. 얼마 전 의족을 교체한 아이였다. 이름이 엔데였나?

“이거 봐요!”

의족인 왼쪽 다리로 체중을 지탱하며 한 발로 서는 아이였다.

“이제 하나도 안 아파요.”

“다른 불편한 점도 없고?”

“네. 그리고 선생님. 저 다른 애들보다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어요.”

대견하지 않냐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는 아이였다. 가하란은 웃으며 대답했다.

“멋지네. 친구들 중에서 제일 빨라?”

“네! 보여줄까요?”

대꾸하기도 전에 빙글 돌아 저 멀리 뛰어가는 아이였다.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입술을 비집고 풋, 웃음이 나왔다. 웃음은 점점 커져서 이내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웃고 말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하란은 얼른 입을 다물고 모른 척 몸을 돌렸다.

덧없던 모든 것들이, 이제 의미를 갖춰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간사한 걸까, 연약한 걸까, 아니면 강해진 걸까.

아직 분간할 수는 없지만 찾아온 변화에 감사하기로 했다.

“가하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제니와 마주쳤다. 제니는 손에 컵을 든 채 멍하니 가하란을 바라보기만 했다.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시선이 얼굴에서 떨어져 손으로 옮겨졌다. 바구니를 살피는 눈길이 오묘하기만 하다.

“아침 먹었어?”

“아니, 아직.”

“그러면 같이 먹을래? 테리 형은?”

“아침? 같이 먹자고?”

제니가 눈을 깜빡거리다가 서둘러 컵을 내려놓았다.

“기다려! 잠깐만 기다려! 진짜 잠깐이면 돼. 오빠!”

분위기가 부산스러워졌다. 복도를 뛰어가며 소리치는 제니를 바라보다가 일단 휴게실로 갔다.

음식을 차려놓고 느긋하게 차를 즐기려는데, 휴게실 문이 세게 열렸다.

어찌나 거친지, 문이 부서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너…….”

안으로 들어선 테리가 황망한 얼굴로 말했다. 가하란은 멋쩍게 웃다가 음식을 가리켰다.

“아침 안 먹었다며?”

테리가 음식을 보며 말했다.

“네가 만든 거야?”

“어. 간은 맞췄는데 맛 자체는 별로일지도 몰라.”

천천히 다가와 의자에 앉는 테리였다. 제니도 옆에 앉았다.

“가하란, 무슨 문제 있는 건 아니지?”

불안한 듯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였다. 어떤 심정일지 단번에 알아챘다.

“그냥 두 사람하고 아침 먹고 싶었어. 그게 다야.”

가하란은 가져온 포크를 내밀었다.

“얼른 먹어봐. 맛 평가는 들어야 하니까.”

눈치를 보던 두 사람이 음식에 손을 댔다. 식기구 부딪치는 소리와 음식 씹는 소리가 휴게실을 채워나갔다.

“……먹을 만은 하네.”

“입에 안 맞나 보네.”

“아니야. 먹을 만하다니까.”

테리가 재빨리 포크를 움직였다. 테리가 으적으적 음식을 씹는 동안 제니가 말했다.

“어제 언니가 찾아갔지?”

함축적인 질문이었다. 방문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뒤에 있었던 일이 궁금한 것이리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로 인한 변화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지난 5년간 어떻게 입 다물고 살았는지 의아해질 정도로.

하지만 쏟아내야 할 수많은 문장보다 선행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전부 다 말해줄게. 두 사람한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아. 하지만 그 전에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어. 5년 동안…… 지켜봐 줘서 고마워. 두 사람 덕분에 내가 버틸 수 있었어.”

* * *

“오늘 하루만 휴가 낼 수 있을까?”

얼마 만에 듣는 부탁일까.

제니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루가 뭐야. 한 달도 괜찮아. 예약이나 일정 같은 건 내가 전부 조절할 수 있으니까 푹 쉬어. 아니 한 반년 정도 쉴래?”

“아니야. 그렇게까지 쉬고 싶지는 않아. 하루, 어쩌면 이틀 정도면 될 거 같아. 주변 분들한테 얘기해야 하니까.”

가하란이 외투를 챙겼다.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출근할게.”

“늦어도 상관없으니까 나오고 싶을 때 나와. 공장장님한테는 내가 말해둘게. 그분도 쌍수 들고 환영하실걸?”

가하란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에, 마음이 확 놓였다.

코끝이 간질거리고 눈두덩에서 열이 올랐지만 울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힘껏 웃어야 한다.

제니는 입꼬리에 바짝 힘을 줬다.

그리고 멀어지는 가하란을 향해 소리쳤다.

“아까는 말 못 했는데, 미안해할 필요 없어! 정말이야.”

멀리 있는 가하란이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흔들었다.

“갔어?”

테리가 뒤늦게 나왔다. 제니는 곁눈질로 오빠를 봤다.

“왜 뒤에 숨어 있었어. 있는 거 다 알고 있는데.”

“그냥. 그냥 낯간지러워서.”

“낯간지럽긴. 아까 밥 먹다가 울 뻔한 거 내가 다 봤어.”

“아니야, 무슨. 내가 이런 일이 감동해서 울 거 같아? 그냥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해서 어? 어?”

당황하면 말투가 어수선해지는 게 오빠의 특징이었다. 딴청 부리며 주절거리던 테리가 가하란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정말 괜찮아진 것 같더라. 네가 보기에는 어때?”

“나도 같은 생각이야. 이제야 털어낸 거 같아. 언니, 참 대단해. 하루 만에 애를 바꿔놨잖아.”

“그러게.”

“역시 왕자와 공주인가?”

테리가 눈을 얇게 떴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있어, 그런 게.”

제니는 어릴 때 기억을 떠올렸다.

가하란의 손을 잡고 멋진 춤을 추던 밀레나를.

“동화와 반대로 공주님이 말 타고 와서 구해줬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잖아?”

“그러니까 뭔 소리냐고. 알아듣게 좀 말해봐.”

“오빠는 몰라도 돼. 이건 우리들만의 추억이니까.”

“뭐?”

구시렁대는 테리를 뒤로하고 건물로 들어섰다.

행정센터의 핵심인 가하란이 휴가를 냈다. 괜찮다고, 걱정 없다고 말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당장 오늘만 해도 업무에 비상이 걸릴 것이다.

“아, 연구회 포럼도 있었지.”

갑자기 식은땀이 났다. 한 달 쉬어도 된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정말로 한 달 쉬어버리면 루드 팩토리가 삐걱거릴 것이다.

이틀.

이틀 쉬는 거라면 수습이 가능한데.

제니는 자신의 뺨을 살짝 쳤다.

“아니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간을 확보해 보자. 몇 년 만의 휴가인데 그것도 보장 못 하면 안 되지.”

몇몇 난관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일정 조절을 흔쾌히 허락해 줄 것이다.

다들 가하란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으니까.

“오렌 아저씨! 저희 이번 주 일정 재조정해야 해요!”

업무표를 들고 뛰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하란을 쉬게 만들리라.

* * *

“감도를 조금 올렸어요. 이게 더 편하실 거예요.”

왼쪽 의수를 천천히 움직이던 밀리언이 짙은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낫구나.”

“다음 분기에 회로 간소화가 이뤄질 거예요. 예정대로 진행되면 지금보다 정밀도도 올라갈 거고요. 표준모델이 나오면 가장 먼저 적용해 드릴게요.”

“매번 신경 써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5년 전, 아저씨의 왼팔은 멀쩡했다. 그날 사고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자신과 제니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지 않았다면 여전히 멀쩡했을 왼팔이었다.

가하란은 툴이 담긴 공구 상자를 덮었다.

“아저씨.”

“음?”

“오랜만에 요리를 만들었는데, 엉망이었어요. 배운 걸 다 까먹은 거 같아요.”

뒷말을 잇기 직전이었다. 밀리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을 들어 밀리언을 올려다봤다.

손이 다가왔다. 다정한 손길로 어깨를 툭툭 두드린 밀리언이 입을 열었다.

“가르쳐 줄 테니 언제든 와라.”

“……감사합니다.”

“그간 고생했다. 잘 이겨냈구나.”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귀찮다고 내치시면 안 돼요.”

“잘 가르쳐 줄 테니 우리 애랑 신나게 놀아줘라. 지금이라면 그 애도 널 보고 울진 않을 테니.”

말을 마치자마자 조리실로 들어가는 밀리언이었다. 기나긴 인사말은 거둬가라는 듯이.

가하란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만간 다시 올게요!”

밖으로 나온 가하란은 다시 세운 요정의 안뜰을 바라봤다. 지금이야 건물이 허름하지만, 예전처럼 멋진 가게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왔다. 가하란은 한동안 가게를 바라보다가 몸을 틀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가야 할 곳을 향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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