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어조가 들쭉날쭉한 목소리였다.
남자인 것 같으면서도 여자인 것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음성.
기계인형이 주로 사용하는 복합음성이었다.
밀레나는 작은방을 바라보았다.
환청은 절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지금도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무도 없어요? 가하란? 제가 또 잠든 건가요? 저기요! 음성화 장치를 연결해 놓았다면 대답을 해줘야죠!
저 방에는 유사정령이 있었다. 가하란이 ‘골동품’이라 지칭한 기계가.
밀레나는 가하란을 바라보았다. 얼빠진 표정으로 방문을 보는 중이었다.
조금 전 대화를 되새김질했다.
잠들었다는 표현, 오래된 친구, 골동품, 유사정령.
“카트시!”
가하란이 벌떡 일어섰다. 기세 좋게 걸음을 내디뎠지만,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조심해.”
밀레나는 가하란을 붙잡으며 말했다. 몸 상태가 아직 정상은 아닌 듯했다.
“네가 말한 오래된 친구가 그 골동품이야?”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의아했다. 가하란이 대답해 주지 않았으니까.
머뭇거리는 입술. 비밀의 냄새가 났다.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침묵한다면 모른 척 넘어갈 것이다. 섭섭한 마음과는 별개로 누구에게나 비밀은 필요한 법이니까.
“누나.”
결연한 목소리였다. 괜스레 긴장된다. 밀레나는 약간의 조바심을 느끼며 가하란을 바라봤다.
“난 누나한테 감추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저 안에 있는 친구는 아직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돼.”
거창한 말이었다.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니. 농담치고는 과하다고 생각했으나, 눈빛을 보니 그게 아닌 듯했다.
“나한테 말해줘도 되는 거야?”
“누나가 알고 싶어 한다면 말해줄 거야.”
“그런 말 들으면 불안해지는데.”
“누나가 나한테 선택지를 줬듯, 나도 누나한테 선택할 권한을 줄게.”
작은 비밀을 공유하는 건 은근한 즐거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비밀의 부피가 커질수록 즐거움은 착실하게 줄어든다.
줄어든 즐거움을 대신하는 건 책임감이나 의무일 테고.
물러서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비집고 들어갔다가 무슨 책임을 지게 될지 알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문은 내가 열게.”
밀레나는 결정을 내렸다. 가하란이 품고 있는 비밀을 기꺼이 공유하기로.
실익은 따지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밀레나는 작은방 문을 살며시 열었다. 얇은 나무판이지만, 이건 세계와 세계를 구분 짓는 경계선이었다.
가하란의 세계로 한 걸음 내디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살며시 웃음이 배어 나왔다.
-와, 가하…….
커넥터와 연결된 기계안구가 한순간 정지했다. 분명 움직이는 걸 봤는데, 아닌 척 연기하고 있었다.
밀레나는 뒤를 돌아봤다. 가하란이 입을 가린 채 웃고 있었다.
“안녕?”
밀레나는 침묵 중인 유사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떠드는 소리도 들었고, 기계안구가 움직이는 것도 봤다.
눈앞의 기계는 작동 중인 게 확실했다.
“소리 내는 거 다 들었어. 나랑 눈도 마주쳤잖아. 그런데도 아닌 척할 거야?”
재미난 유사정령이었다.
거병에 탑재된 오토마타의 목적은 단 하나. 탑승자를 돕는 것이다.
‘돕다’의 범위는 개발자에 따라 상이하지만, 질문에 대답하는 건 공통사항이었다.
기계는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특별했던 블루아이조차도 명령 프로토콜 레벨 설정을 바꾸면 탑승자가 누가 됐든 기밀에 가까운 정보를 실토하게 된다.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는 건 기계의 숙명.
“대답하지 않을 거야?”
재미있었다.
눈앞의 유사정령은 사용자의 명령을 무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토마타에 쓰이는 유사정령이 아닌 연구를 위한 유사정령일지도 모른다.
사용자의 명령을 임의로 무시한다라. 무엇을 위해 이런 알고리즘을 구현한 걸까?
단순한 재미?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을 위해?
밀레나는 가하란에게 눈짓을 주었다. 무시당하고 있으니 해결사가 필요했다.
가하란이 방으로 들어왔다. 유사정령 앞에 서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트시. 일어났어?”
그 순간.
축 늘어져 있던 커넥터가 꿈틀대더니 끝에 달린 기계안구가 가동했다.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핀다. 표정이 없는 기계일 텐데, 왠지 얼떨떨해하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패턴 파악 완료했어요. 가하란! 오랜만이에요! 기억이 끊기고 며칠 안 지난 것 같지만, 보안책임자의 성장 상태를 보니 시간이 꽤 지난 것 같네요.
“응. 시간이 많이 흘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 하나도 안 귀여운 여우인지 늑대인지 모를 엔엔은 어디 갔고요? 여긴 또 어디죠? 그리고 감각장치 버전이 바뀐 것 같은데.
말을 쏟아내는 유사정령이었다.
-가하란?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가하란이 유사정령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자세한 건 이따가 설명해 줄게.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지금은 다 못 할 거 같아.”
-그럴 것 같네요. 하긴, 이미 벌어진 일들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중요한 건 가하란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거죠.
기계안구가 밀레나 쪽을 향했다.
-엔엔의 털이 몽땅 빠졌다고 해도 인간으로 변하진 않았을 테니, 저기 서 있는 여자는 누구죠?
“이름은 밀레나. 너에 대해 아는 사람이 될 거야.”
-그래요? 관계의 확장은 환영할 만한 일이죠.
기계안구가 스멀스멀 움직여 눈앞까지 왔다. 살짝 부담스럽다고 느낀 때였다.
-안녕하세요. 전 카트시라고 해요.
살가운 인사. 밀레나도 옅게 웃으며 말했다.
“나도 반가워.”
-아까는 입 다물고 있어서 미안해요. 보안책임자와 약속했거든요. 검증되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고장 난 척하기로.
“반응이 조금 느리던데. 나랑 눈까지 마주쳤잖아.”
-그건 제 탓이 아니에요. 부착된 장치들의 수준이 너무 낮아서 감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거든요.
사용하는 어휘도 그렇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식마저 기존에 만나온 오타마타와 차별됐다.
복합음성만 가다듬으면 인간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눈빛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아요. 하지만 멋대로 뜯어보면 안 돼요. 뜯어봤자 알 수도 없을 테지만.
“언어 구사 능력이 좋네. 회화에 특화된 거야?”
-특화란 말은 적당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전 모든 방면에서 우수하거든요. 물론 모자란 부분도 있지만.
객관화된 수치로 말하지 않고 추상적인 표현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었다.
제작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진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만든 걸까?
“가하란. 카트시가 골동품이라고 했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카트시가 반응했다.
-골동품이라니! 사전적 의미로만 봤을 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골동품은 너무하네요.
격한 대응이었다. 가하란이 작게 웃은 후 말했다.
“미안. 마땅히 둘러댈 말이 없어서 그렇게 설명했어.”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말끝이 축 늘어지는데, 마치 토라진 아이 같았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기계였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계속 붙들고 얘기하고 싶었다.
밀레나는 가하란을 바라봤다.
“더 있고 싶지만, 오늘은 이만 가볼게. 내 앞으로 할당된 일이 몇 개 있거든. 용병단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그건 마무리 지어야 해.”
아저씨들에게 부탁한다면 흔쾌히 일을 대신 처리해 주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자기 몫은 자기가 해야 한다.
“데려다줄까?”
말하면서 작게 기침하는 가하란이었다.
“데려다주는 게 아니라 내가 보호해야 할 거 같은데?”
가하란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후 머쓱하게 웃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히 누워. 카트시랑 얘기하는 것도 내일 하고.”
밀레나는 카트시에게 눈길을 줬다.
“카트시. 보면 알겠지만 얘 상태가 말이 아니야.”
-네,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엉망이네요. 파장도 끔찍하고. 왜 제가 단절 상태에 들어갔는지 알 것 같아요. 아무튼! 가하란은 얼른 침대로 가요. 인간에게 잠만큼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호흡이 척척 맞았다. 밀레나는 넌지시 말했다.
“카트시, 내 전용기가 생긴다면 그걸 담당해 줄래? 너랑 손발을 맞추면 무척 재미있을 거 같은데.”
-고려해 볼게요. 하지만 저한테 가장 중요한 건 가하란의 의사예요.
“너무 확고하네. 난 반쯤 농담이었는데.”
-농담은 원래 그 자리에서 끝내야 하는 법이거든요. 뒷맛이 남는 농담은 자칫 오해를 불러와요.
“농담이란 것도 알아?”
카트시의 안구가 빙글빙글 움직였다.
-전 더 많은 걸 알고 있어요.
“궁금하네. 얼마나 많은 걸 알고 있을지 말이야.”
-대화를 지속하면 아마 밀레나는 저한테 거부감을 느낄 거예요. 다른 인간들이 그랬듯이.
“거부감?”
-나중에 얘기해요. 그러면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지시와 권유를 섞은 듯한 어투까지. 밀레나는 카트시를 눈여겨보았다.
“금방 만나러 올게.”
-저도 기대할게요.
챙길 짐도 없으니 곧바로 현관으로 나섰다. 따라 나오려는 가하란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나오지 마.”
“문 앞까진 괜찮아.”
“내가 안 괜찮으니까 얼른 침대로 가세요, 네?”
침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버티고 있던 가하란이 뒤로 물러섰다.
“누나, 내일 오는 거야?”
“힘들 테니 다음으로 미룰까?”
“아니. 와줬으면 해.”
예나 지금이나 이럴 때 솔직하게 말하는 건 변함이 없다.
“알겠어. 꼭 올 테니까 얼른 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고개가 절로 하늘을 향해 들렸다.
안도의 한숨, 그리움의 한숨, 그리고 즐거움의 한숨.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다.
하지만 노력할 수는 있었다.
“잘 잤으면 좋겠네.”
응축된 5년을 풀어놓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이다.
마냥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듣기 거북한 얘기가 흘러나올 수도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프로 머리를 묶었다. 선물을 받기 전까지 계속 써야 할 것이다.
돌아가는 길, 밀레나는 가볍게 걸음을 뗄 수 있었다.
* * *
-자라는 충고를 가볍게 듣지 마요. 가하란은 정말 잠이 필요해 보여요. 특히나 고유 파장이 엉망이에요.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증거죠.
가하란은 의자에 앉은 채 카트시를 바라봤다. 쉬러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가하란?
“응?”
-넋 놓고 있지 말고 얼른 자라니까요.
“아는데, 카트시가 다시 움직이는 게 너무 기뻐서 잠이 안 올 거 같아.”
-기쁜 건 기쁜 거고, 잠은 별개의 이야기예요. 몸이 망가지면 약물에 의존해 잠을 찾게 돼요. 그렇게 되고 싶은 건 아니죠?
“그래선 안 되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음 같아선 카트시를 침실에 데려다 놓고 싶었다.
-가하란이 자는 동안 현 상황을 점검하고 몇 가지 가설을 정리해 둘게요. 아, 기능 정지 이유는 거의 다 해명했어요. 일어나는 대로 설명해 줄 테니 이따가 봐요.
“부지런하네.”
-그게 제 몇 안 되는 장점이니까요. 근데 엔엔은 어디로 갔나요?
“일이 있으셔서 잠깐 떠나셨어. 도시 안에 계신지, 아니면 멀리 떠나셨는지는 몰라.”
-돌아오면 잔소리 좀 해야겠어요. 가하란을 책임지고 보호해야 할 털복숭이가 자기 소임을 다 못 한 거니까.
“미리 말해두는데,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이렇게 된 건 온전히 내 탓이니까.”
가하란은 카트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일도 깨어 있는 거 맞지? 멋대로 또 자면 안 돼.”
-걱정 마세요, 가하란. 당신이 괜찮으면 저도 괜찮아요.
괜찮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방문을 닫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