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변명거리로 삼으라니.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날 변명거리로 삼아. 누가 널 향해 손가락질한다면, 그때 내 이름 대. 밀레나란 인간이 이렇게 살라고 강요했다고.”
밀레나가 치켜든 룩을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그럴 순 없어.”
“왜?”
“이유를 대기 민망할 정도로 이유가 많아서.”
“난 정말 상관없는데.”
체스보드 위를 떠난 룩이 식탁 위를 거닐었다. 모서리에서 반대편 모서리까지. 밀레나는 인형을 가지고 놀듯 룩을 움직였다.
“누구나 다 완벽한 인간이 되고 싶어 하지만, 동시에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 알기에 닿을 수 없는 목표로 삼고 바라만 보는 거고.”
누나가 생긋 웃었다.
“기댈 곳은 필요해. 물론 평생 쉼터는 아니야. 잠깐 비바람을 피할 곳이지. 그렇게 해서라도 한숨 돌릴 수 있다면, 난 나쁘지 않다고 봐.”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5년간 주변 사람들이 비슷한 말을 해주었다. 힘들면 의지해도 된다, 네 걱정을 들어주겠다, 모든 짐을 혼자 지려 하지 마라.
다정한 말이었지만 귀를 통해 심장으로 내려오는 말은 없었다. 모두 반대쪽 귀로 흘러 나갈 뿐.
누나가 하는 말 역시 맥락은 비슷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나 마음이 놓이는 걸까.
무엇이 다른 걸까.
“뭔가 생각 중인 것 같네. 체스에 관한 거? 아니면…….”
밀레나가 쥐고 있던 룩을 체스보드 위로 돌려놓았다.
“이 게임을 이기려고 고심 중인 거라면 포기해. 아무리 너라도 이건 이길 수가 없어.”
탁, 룩이 킹과 마주했다.
체크.
“어떻게 할래? 여기서 끝낼래? 아니면 다른 수를 생각해볼래?”
가하란은 절벽 앞에 놓인 킹을 바라봤다.
안개가 낀 머리로는 도저히 답을 낼 수 없었다.
5년간 켜켜이 쌓여온 문제, 그리고 당면한 체스 대국.
무엇 하나 명쾌하게 해결해낼 수 가 없다.
킹을 눕히는 것으로 패배를 선언하고 누나를 돌려보낸다. 준비한 선물을 주는 걸 끝으로 이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뒤에서 달려오는 시간을 피해 앞만 보고 질주. 그러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약간의 소망이 있다면, 쓰러진 자리에 뾰족한 돌이 있어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는 거.
가하란은 귀 뒤쪽을 매만졌다.
이건 직감 같은 게 아니다. 반드시 일어날 미래일 것이다.
몸을 혹사하고, 눈을 쥐어짜고 있었다. 희생, 그리고 죽음. 무의식에는 두 단어가 선명해 새겨져 있을 것이다.
덴스를 구하고 한 줌의 여력도 남기지 않은 채 죽는다.
그걸 바라며 지난 몇 주를 달려온 것이다.
내면에 자리한 선택지 중에 살아남기 같은 건 없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아니, 누나와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을 터였다.
가하란은 체스보드를 바라봤다.
패배는 곧 이별.
이별은 곧 죽음.
“누나.”
가하란은 손을 움직였다.
“염치없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게?”
“조용히 잠들고 일어나서 준비한 아침을 먹고, 두런두런 얘기하며 일하다가 다시 잠들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난 너무 염치없게 느껴져.”
“그래서 이대로 끝내려고?”
“그러고 싶었어. 정말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장 눈앞에 있는 목표만 이룬 다음에 다 끝내고 싶었어.”
킹의 머리에 검지를 올렸다.
이대로 넘어트리면 모든 게 끝이다.
“지금은?”
“아주 조금이지만, 일을 끝낸 다음을 생각했어.”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어?”
“대단한 건 아니야. 아까 말한 것들…… 아침 해를 맞으며 걷고 점심을 챙기고,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힘들다고 토로하다가 휘적휘적 걸어서 침대에 눕는 거.”
“좋네. 하지만 그게 다야?”
가하란은 밀레나의 눈을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고양이를 껴안은 채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던 그 붉은 눈동자가.
“아니. 다른 것도 생각해봤어.”
“말해줄 수 있어?”
“도시를 떠나는 거야.”
“여길?”
“어. 줄곧 궁금했던 게 있었어. 하늘석에 대해서.”
“맞아. 넌 하늘석에 관심이 많았지.”
“성도에 하늘석을 연구하던 클랜이 있다고 했어. 세상이 이렇게 변해서 자료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가보고 싶어.”
“그리고?”
가하란은 작은방을 바라봤다.
“친구를 깨우고 싶어.”
“친구?”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친구야. 한동안 일어나 있었는데 다시 잠들어 버렸어. 그 애를 깨우고 싶어.”
밀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병은? 기술자가 꿈이었잖아.”
“의수 개발을 도우면서 거병 쪽 개발에도 손대고 있어. 모든 걸 설계한 건 아니지만, 내 손길이 닿은 거병도 한 대가 있고.”
“아, 테리가 타고 있던 거병. 시작은 했네. 절반은 넘었다는 뜻이고.”
검지에 힘을 줬다. 킹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땅에 누울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어. 교수님과 관련된 일이야.”
“이야기는 대강 들었어. 쓰러지셨다고.”
“날 위로해주러 오신 다음 날 그렇게 되셨어. 그분 덕분에 잠을 잘 수 있게 됐는데, 난 도움만 받고 아무것도 못 해드렸어.”
“급한 용무가 혹시…….”
리올라와 함께 있는 걸 봤으니 상황을 유추할 수 있으리라. 가하란은 부정하지 않고 설명했다.
“내 힘으로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불확실하지만 그래도 손 놓고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 힘이란 게 눈과 관련된 거야? 그래서 다친 거고?”
“대가 없는 결과는 없잖아.”
밀레나가 팔짱을 끼며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릴 땐 되게 똑똑해 보였는데, 지금 보니까 좀 어수룩하네.”
“난 잔머리만 굴릴 줄 아는 놈이었으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 잘 생각해봐. 네가 멋대로 희생해서 교수님을 구한다면, 그다음? 도망치고 회피한 끝에 모든 짐을 교수님께 떠넘기는 거야? 덴스 교수가 눈을 떴을 때 퍽이나 좋아하겠다. 아! 그 꼬마 놈이 날 살리고 죽었구나! 기쁘다!”
연극을 하듯이 손짓을 크게 하며 말하는 밀레나였다.
“몰랐다는 말 하지 마. 넌 알고 있었을 거야.”
“맞아. 알고 있었어. 그냥 편해지고 싶었던 거니까.”
침묵이 길어졌다.
할 말이 더 남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누나는 잠자코 기다려줬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손끝에서 비틀거리던 킹이 바닥에 누웠다.
밀레나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말할 땐 계속 눈을 마주했는데.
“도망치고 회피한 끝에 편해진다. 그게 네 삶의 방식이고 태도라면 그것도 좋아. 처음부터 말했지만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건 어려우니까.”
누나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선물은 나중에 받으러 올게. 다음에…… 또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나가 옆을 지나쳐 간다.
가하란은 손을 뻗었다. 팔을 붙잡았다. 저항하지 않는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누나. 게임 아직 안 끝났어.”
눕혔던 킹을 다시 세웠다.
“머리가 복잡해. 가슴도 답답하고. 길은 정해진 것 같은데, 아직 결심이 안 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욕구에 눈길이 가지만, 동시에 그래선 안 된다는 자책감이 날 막아.”
팔을 붙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니, 여기에 앉아 체스를 두기 전까지만 해도 난 그냥 편해지고 싶었어. 그게 전부였어.”
가하란은 고개를 들어 밀레나를 바라봤다.
“근데 다른 마음이 생겨. 털어내는 게 아니라 이겨내고 싶어. 이대로 끝내고 싶지가 않아. 하고 싶은 것들이 막 생각나기 시작했어. 이상하지?”
“이상하지 않아. 5년이야. 지난 5년 동안 모든 걸 참아왔잖아. 갑자기 변하고 생각나는 게 아니라, 이제야 겨우 자기 자신과 마주할 여력이 생긴 걸지도 몰라.”
마주할 여력.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울음이 나왔다.
감정이 북받친 건 아니었다. 울면서도 왜 울고 있는지, 명료하게 고민하는 내가 있었다.
부끄럽다는 생각도,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응당 내보내야 할 것을 내보냈다는 듯이, 그렇게 흘러나왔다.
“스카프 말고 그냥 손수건으로 받을까.”
밀레나가 스카프로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 순간 부끄럽다는 감정이 고개를 쳐들었다.
얼른 고개를 뒤로 빼고 손등으로 얼굴을 훔쳤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정확히 뭐야?”
연붉게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를 향해 똑바로 말했다.
“일단 게임은 끝까지 해야 한다고.”
“뭐? 이건 끝난 게임이야.”
“아니. 아직이야.”
가하란은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밀레나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난 봐주지 않아.”
“그런 걸 바라지도 않아.”
눕혔던 킹을 일으켜 세웠다.
승리는 불가능하다. 너무 많은 기물을 내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은 결과값이 패배뿐이란 건 아니다.
킹을 움직였다. 길목이 차단된 비숍을 빼냈다. 비루한 갑옷을 입은 나이트를 움직이고, 둘뿐인 폰으로 새로운 진형을 구축했다.
11번.
재빨리 움직이던 누나의 손이 더뎌졌다. 동시에 표정도 안 좋아졌다.
“너…… 이렇게 할 거야?”
“말했잖아. 게임이 끝난 건 아니라고. 그리고 난 질 생각 없어.”
“이길 생각도 없겠지!”
앓는 소리를 내며 체스보드를 노려보던 밀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길 수는?”
“없어.”
“네가 이길 방법은?”
“역시나 없지.”
“결국 3수 동형 무승부. 여기까지 몰고 왔네. 아니, 왜 이렇게 됐지? 왜?”
“글쎄.”
코를 찡긋거리던 누나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래, 무승부! 연승을 끊어내나 했는데 무승부라니.”
“연승을 끊은 건 맞잖아.”
“내 기준에 무승부는 없는 게임이나 마찬가지야.”
밀레나가 상체를 앞으로 쭉 뺐다.
가까이 다가온 얼굴을 가하란은 멀거니 바라봤다. 잠깐이었지만, 이대로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음은?”
“다음?”
“내기를 걸었으면 결판을 내야지. 다음 대국은 언제야?”
“……또 와주는 거야?”
“당연하지. 난 욕심이 많아. 선물은 반드시 받아내고 말 거야.”
가하란은 시계를 보았다. 오후 10시. 시간이 꽤 늦었다.
“내일은 힘드려나?”
“좋지.”
“괜찮아? 약속 없어?”
“일 안 할 땐 자유야. 삼촌들하고 놀아줘야 하지만, 며칠 정도는 내가 없어도 돼.”
내일.
얼마 만일까?
내일이 기다려지는 건.
깊게 들이마신 숨이 폐는 물론이고 영혼까지 씻어내는 기분이었다.
“어때? 도망치는 것보다 나은 거 같아?”
밀레나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가하란은 체스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 그런 거 같아.”
“다행이네.”
밀레나가 일어섰다.
“푹 자고 일어난 뒤에 제니랑 테리한테 먼저 가. 그리고 말해. 네 기분에 대해서. 아니면 아까처럼 울어도 좋고.”
“그건 좀…….”
“5년이야. 네가 괴로웠던 만큼 걔네들도 아팠을 거야. 그러니 보고 정도는 제대로 해줘야지. 안 그래?”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말이 맞아. 다른 분들한테도 제대로 말해야겠어. 하지만…… 당장은 힘들 거 같아. 마무리 지어야 할 게 있으니까.”
“아, 교수님.”
밀레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 힘이란 거 계속 쓰면 어떻게 되는 건데? 네 몸 상태 보니까 정상은 아니었어.”
“무리해서 그래. 정말이야. 한계까지 몰아붙이지 않으면 버틸 수 있어.”
“정말이야?”
“누나 앞에서는 거짓말 안 할게. 정말이야.”
도망치지도, 회피하지도, 짐을 떠넘기지도 않을 것이다.
온전히 마주해 받아들이고 이겨낼 것이다.
“아까 전에는 못했던 말인데, 지금은 괜찮을 거 같네.”
밀레나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
“네 아버지가 널 미워했을까?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고?”
“……아버진 그럴 분이 아니셔.”
“거봐. 역시나 알고 있었네.”
“맞아. 알고 있지만, 내가 용납하지 못한 거지.”
옅게 웃으며 누나를 바라볼 때였다.
-뭐예요! 어두워요! 저기요! 나 또 잠든 거예요? 또 혼자야? 그런 건 싫은데!
유쾌한 목소리가 작은 방에서 흘러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