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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63화 (236/558)

제263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가하란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난 없어.”

“그러면 내기가 성립되지 않지. 큰 걸 걸어도 좋아. 내 체스 실력은 예전과 다르거든.”

“그러면 별 상관 없네. 어차피 누나가 이길 테니까. 내가 뭘 원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탁 소리에 말을 끊었다. 누나가 붙잡은 퀸으로 식탁을 다시 한번 툭 내리쳤다.

“나중에 딴소리 말고 얼른 말해.”

말하지 않으면 달려들 기세였다. 가하란은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기면 누나한테 선물할 수 있게 해줘.”

“내기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는 거지?”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내용은 상관없잖아?”

“그래, 나야 좋지.”

검은색 기물들이 앞으로 왔다.

“선수는 양보할게.”

밀레나가 말했다.

“양보하는 거 맞지?”

가하란은 검은색 폰을 내밀었다.

대각에 놓인 하얀색 폰이 움직였다.

정석적인 오프닝.

기물이 보드에 닿을 때마다 또각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대화를 대신했다.

마지막으로 체스를 뒀던 게 언제였더라?

기억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가 결국 눈앞에 있는 얼굴에서 멈췄다.

밀레나와 마주 보며 두었던 게 마지막 체스였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게임에 손대본 적이 없었다.

분주히 움직이던 체스말이 잠시 멈췄다. 누나가 생각에 잠겼다.

가하란은 식탁 아래로 손을 내렸다. 멈췄던 뇌가 활발히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편하기에, 오히려 불편했다.

모순이 몸 이곳저곳을 때렸다.

“난 신경 쓰지 마. 아니, 이렇게 말하면 오히려 신경 쓰려나?”

누나가 보드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혼잣말하는 중이야. 너도 떠들고 싶은 게 있으면 떠들고 아니면 입 다물고 있어도 돼. 침묵을 어색해할 나이도 아니잖아?”

“그렇긴 해.”

밀레나의 이마에 얇은 골이 파였다.

“체스 얼마 만에 두는 거야?”

“예전에 누나랑 뒀을 때가 마지막이었어.”

“5년이 넘었다라. 그사이 체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기보를 되새김질하거나, 새로운 전략을 짜보거나.”

“없어.”

“없는데 이렇게 한다 이거지? 좋아. 어차피 공식 경기도 아니고 시간제한 없이 끝까지 해보자고.”

동그란 눈동자가 보드 위를 훑고 다녔다. 엄지를 살짝 물며 고심하던 누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신경 쓰지 마. 나만의 방법이니까.”

좌우로 걸어 다니며 힐긋 체스보드를 본다. 승부욕이 표정은 물론 몸짓에도 드러났다.

옛날과 똑같았다.

똑같다. 위안을 주는 단어에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버지가 둔을 떠난다고 했을 때 내가 말렸다면 아버지는 죽지 않았을 거야.”

스스럼없이 말이 나왔다.

“정말 그럴까?”

밀레나가 대꾸했다. 시선은 여전히 체스보드에 꽂혀 있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며 기물을 움직이는 밀레나였다.

“계속해. 난 체스에만 집중할 테니까.”

“그런 것치고는 대답을 계속 해주네.”

“버릇이라 그래.”

뭔가, 마음이 편했다.

술에 의지하지 않고도 입술이 제대로 움직였다. 덴스 앞에서 처절하게 울며 털어놓았던 말들이, 밀레나 앞에서 덤덤하게 나왔다.

말할 때마다 몸 안쪽이 쓰라렸지만, 그 고통이 입을 다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탁.

나이트가 뛰어올랐다.

“지나치게 얽매여 있다는 건 알아. 그래도 떨쳐낼 수가 없어. 아버지가 둔에 계셨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 테니까.”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어. 대피를 서둘렀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 사람들을 내 곁에서 떨어트려 놓았다면 살지 않았을까.”

가하란은 비숍을 손에 쥐었다.

“누나는 어떻게 이겨냈어?”

“나? 나는 너처럼 착한 애가 아니라서 금방 잊었어.”

자리에 앉아 턱을 괴는 밀레나였다.

“분명 잊었는데 계속 꿈에 찾아와 주더라. 내가 못미더웠나 봐. 꿈에서도 잔소리를 얼마나 하던지.”

진형을 비집고 들어오는 하얀색 룩이었다.

“요즘에도 가끔 꿈에서 봐. 락샤를 비롯한 내 주변 사람들을. 이상하지? 난 정말 잊었는데 말이야.”

잊었다는 말 자체가 잊지 못했다는 방증일 것이다.

“괴롭지 않아?”

“혼잣말이 점점 대화로 변하고 있는데.”

밀레나가 빙긋 웃으며 바라봤다.

“대답을 듣고 싶어.”

“네가 원한다면야.”

기물을 손에서 놓고 깍지를 끼는 밀레나였다.

“내 모든 생각은 한 문장으로 귀결돼. 이 문장을 떠올리기까지 아주 기나긴 스토리가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우린 타인을 이해하는 척, 공감하는 척할뿐이니까.”

“다른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이해라는 건 허울만 좋은 말이야. 변명에 가까울 수도 있어.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을 온전히 알고 있다는 뜻이잖아? 이게 정말 가능할까? 신도 아니고.”

밀레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나의 기쁨과 나의 슬픔은 온전히 나의 것이야. 이걸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어. 이해할 수 없기에 설명할 길도 마땅치 않고. 그래서 내가 하는 이 말이 너한테 어떤 식으로 들릴지, 어떤 식으로 해석될지 나는 몰라.”

하얀색 킹을 들어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다. 킹을 훑고 있으나 누나의 시점은 현재가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과거, 어쩌면 미래.

“그러니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마. 이걸로 네 감정을 판단하려 들지도 말고. 그냥 이런 소리도 있구나, 그 정도로 느꼈으면 해.”

킹이 보드 위로 돌아갔다.

밀레나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내가 불행해야 할 이유로 그 사람들을 대고 싶지 않았어. 난 락샤를 좋아해. 그런 사람을 내가 비참해야 할 근거로 삼고 싶지 않아. 락샤가 있었기에 내가 행복할 수 있었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가하란의 망막에 맺힌다. 밀레나의 얼굴 형태도, 공간의 소리도, 촉감마저도 사라지고 그저 눈동자만이 남았다.

“누군가는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죽은 사람이 가엽지 않아? 좋은 것만 떠올리겠다고? 이기적이야!”

뒤로 갈수록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재차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마음이야. 남들의 의견 따윈 상관없어. 불행을 끌어안고 비참해지고 싶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아. 그게 그 사람의 위로 방식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추모식이 열리면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울어.”

비집고 들어온 룩이 강한 압박을 걸어왔다. 앞으로 다섯 수까지는 룩의 공세를 꺾을 수 없을 것이다.

누나의 체스 방식은 의지만큼이나 단단해져 있었다.

빈곤한 내 내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웃는 게 나쁜 걸까? 그것도 하나의 방식이야. 사람을 추모하는 건 자기 마음대로 하면 돼.”

살며시 적셔오는 말이었다. 아프게 후비지 않고 다정하게 감싸주는 말이었다.

가하란은 퀸을 움직이며 말했다.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나한테는 책임이 있어.”

“나한테 묻지 마. 아까도 말했다시피 각자의 방법이 있는 거니까.”

“대답해 줬으면 해.”

“강요하는 거야? 성격이 못돼먹었네.”

말과는 다르게 누나는 웃고 있었다.

“책임을 떠안아야 숨을 쉴 수 있다면, 그렇게 해. 그게 네 방식인 거야. 하지만 책임감이란 게 네 목을 누른다면 방식을 조금 바꿔야 할지도 몰라.”

“죄책감에서 벗어나겠다고 회피해 버린다면, 그게 사람이라 할 수 있어?”

“네가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라면 회피해선 안 되겠지.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이상 최소한의 도리란 걸 지켜야 하니까. 근데 말이야, 난 이렇게 되묻고 싶네.”

누나가 눈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네가 올란트 씨의 등을, 그 손으로 떠밀어 버린 거야?”

가하란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얇은 거죽으로 뒤덮인 손이 보인다.

“떠민 거나 마찬가지야.”

“정확히 말해. 올란트 씨가 사망한 그날, 네가 그 손으로 직접 아버지를 밀었어?”

“그건 아니야.”

“그러면 올란트 씨가 둔을 떠나기로 한 건, 누구의 의지였어?”

“아버지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도중에 마음을 바꾸셨어. 그걸 내가 다시 설득한 거고. 꿈을 좇으라고, 원하는 걸 이루라고.”

목 안이 바싹 말랐다. 피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밀레나가 재차 룩을 움직였다. 체크까지 앞으로 세 수.

“이상하네. 네가 설득한 게 아니라 설득당한 것처럼 들리는데. 올란트 씨는 원하는 걸 이뤄냈어. 이상향을 바라보며 행동한 거잖아. 어린 아들의 칭얼거림을 잘 무마해서.”

“하지만 결과가…….”

“가하란.”

룩이 다시 움직였다. 체크까지 앞으로 두 수. 거둬낼 묘수가 보이지 않는다.

“넌 전지전능한 신이 되고 싶은 거야?”

“……아니.”

“답은 알고 있네. 그럼에도 책임감을 품어야겠다면, 그것도 괜찮아. 지금까지 잘 버텨 왔으니까. 앞으로도 괜찮겠지. 그게 네 방식일 테니까.”

가하란은 시선을 떨어트렸다. 먼지 쌓인 바닥이 보인다.

“네 감정은 오롯하게 네 것이야. 그걸 유지하는 것도 바꾸는 것도 네 몫이고.”

“……모르겠어.”

“분명한 건 넌 지금 살아 있어. 죽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굴고 있지만, 그래도 살아 있어.”

“차라리 죽었어야 했을까?”

조용해졌다.

말하고 나서야 얼마나 끔찍한 소리인지 깨달았다. 무마하려고 맹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보인 건 쓸쓸하게 웃고 있는 밀레나였다.

“솔직하게 말해주니까 그래도 고맙네. 그게 네 진심인 거야?”

“그게…….”

“다 포기하고 싶었다면 지금까지 버틴 이유는 뭐야? 사람들을 돌본 이유는 뭐고? 단순히 죄책감 때문에? 속죄하려고?”

다른 때였다면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편한 침묵을 선택했을 것이다. 제니가 울며 말을 걸어왔을 때도, 테리가 화내며 멱살을 잡았을 때도 그렇게 했다.

속에 든 걸 전부 꺼내는 게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렇게 하는 게 내 마음이 편했으니까. 그렇게라도 해야 숨 쉴 수 있었으니까.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지만, 정말로 죽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타협을 택했어! 어쩌면 불쌍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즐긴 걸지도 몰라. 시간이 지나 괜찮아지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길 바랐을지도 몰라.”

외면하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발밑에 쑥 꺼지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추악한가.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깨끗하게 끝내지 못했다. 비굴하게 살아남아 자신을 위로하며 달래고, 끝내…….

“다들 그래.”

허탈할 정도로 상쾌한 목소리였다. 가하란은 눈을 깜빡거렸다.

“다들 그런다고. 너만 특별한 거 아니야.”

무언가에 이끌리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되는 거야?”

“또 나한테 묻는 거야? 정말 어렵네.”

밀레나가 룩을 움직였다. 게임이 끝나간다.

“된다, 안 된다. 이걸 알려줄 순 없어. 말했잖아? 타인을 진심으로 이해할 순 없다고. 그러니, 난 이렇게 말해줄게.”

누나가 붙잡았던 룩을 놓았다.

탁, 맑고 경쾌한 소리가 거실을 두드렸다.

“네가 불행해야 할 이유 대신 행복해야 할 이유를 제시해줄게. 날 변명거리로 삼아! 어때?”

장난스럽게 웃는 밀레나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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