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62화 (235/558)

제262화

가하란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손등에 돋아난 연푸른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내가 등을 떠밀었어. 그런 놈이, 무엇 하나 즐겨선 안 될 놈이…… 시간이 지났다고 편해지려 했어.”

테리가 말한 자책감이 이거였나.

겨울날 처마에 내놓은 촛불 같았다. 바람 한 점이면 툭 하고 꺼져버릴 촛불.

“나는 내가 너무 싫어. 사람 앞에서 억지로 웃어야 하는 내가 싫고, 바쁜 척하는 내가 싫어. 선생님이라 불리는 내가 끔찍하게 싫어. 다들 날 가엾게 여기지만, 난 그럴 가치가 없어. 난…….”

가하란이 말을 안으로 삼켰다. 일그러졌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맺힌다.

그 웃음이다.

진심을 은폐하고 감정을 어그러트리는 웃음.

“미안해, 누나. 역시 이런 얘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얘긴…….”

가하란이 일어서려 했다. 밀레나는 손을 뻗어 손목을 붙잡았다.

손아귀에 들어온 손목은 눈으로 본 것보다 앙상했다. 살집이라고는 전혀 없는 안쓰러운 손.

“날 배려하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난 네 얘기를 들으려고 여기 온 거니까. 하지만 네가 두렵거나, 힘들어서 피하는 거라면… 그래, 그땐 다른 얘기를 해도 좋아.”

오기를 부려 자리에 앉았지만, 모든 걸 억지로 끌고 갈 마음은 없었다.

그건 상처를 헤집는 짓이다.

“시시한 이야기야. 흔해빠져서 재미도 없고. 그라운드 제로 때 다들 가족을 잃었어. 다들 슬퍼했지. 그래도 이겨냈어. 그 사람들은 슬픔을 딛고 일어섰어. 난 그걸 못 했을 뿐이야. 모자라고 한심해서.”

가하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실 같았다. 아슬아슬하고 불안정했다.

“그럴지도 몰라. 네 말대로 한심한 소리일 수도 있어. 다들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혼자 특별한 척하는 거, 꼴사나울 수 있지. 근데 그게 뭐 어때서? 아픔은 정량화할 수 없어. 다 같은 사건을 겪었다고 해도 고통의 수치는 제각각이야.”

비단 사람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관계보다 재산이 중요할 것이다. 누군가는 이뤄놓은 명예가 중요할 것이고.

그라운드 제로는 그 모든 것을 앗아갔다. 자신의 것을 온전히 지켜낸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영웅도, 비겁한 도망자도, 잔인한 살인자도 다들 무언가를 잃었을 터였다.

흔한 이야기.

특별할 것 없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

그렇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나? 남들이 다 털어냈다고 해서 같이 털고 일어나야 하나?

상처가 아무는 시간은 제각각일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도 있을 터였다.

구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동정할 수도 없다. 영혼에 난 상처는 본인만 알아볼 수 있기에.

“난 그저 들어주러 왔을 뿐이야. 가족이라서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 그걸 들어줄 거고, 그딴 거 다 필요 없고 그냥 옛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그것도 좋아. 난 네 이야기면 뭐든 괜찮으니까.”

붙잡았던 손을 놓았다. 더 붙들고 있으면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부러질 것 같았으니까.

가하란이 손목을 매만졌다.

“힘은 여전히 세네.”

“그게 내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지.”

의자에서 반쯤 떨어졌던 가하란이 다시 앉았다.

“나는 누나 얘기가 듣고 싶어. 5년 전 이야기도 좋고, 최근 이야기도 좋아.”

“그것도 나쁘진 않지. 초대받지 않은 게스트는 호스트를 웃겨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그런 규칙도 있어?”

밀레나는 어깨를 으쓱거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래, 5년의 공백을 좀 채워보자. 그 전에 난 네 눈치 안 볼 거야. 네가 불편해할 만한 얘기를 거리낌 없이 할 거니까 불편하면 귀 막아.”

“얼마나 잔인한 얘기를 하려고.”

“마수의 내장 적출 방법? 지방 비슷한 게 후드득 쏟아지는 걸 내 모든 어휘를 동원해 설명할 거야.”

“……지난 5년간 누나는 대체 뭘 하고 지냈던 거야?”

“그걸 지금부터 말해줄게.”

밀레나는 그라운드 제로 이후의 삶을 입에 담았다. 서두를 어떻게 뗄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날, 락샤가 죽었어. 나에겐 어머니만큼이나 가까운 사람이었어.”

땅의 품으로 돌아갔다, 하늘로 여행을 떠났다 혹은 숨을 거두었다.

관용적 표현 대신 ‘죽었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보태는 것도 빼는 것도 없는, 가장 담백하고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니까.

“얼마 울지도 못했어. 너도 알겠지만 세상이 변하기 시작했으니까.”

누군가를 붙들고 지난 시간에 대해 말해본 적은 없었다. 지나간 건 지나간 거니까.

해본 적 없는 일인데, 말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성도 재정비 시절부터 엄마와 합류해 마수 사냥꾼으로 자리 잡기까지.

“몬스터는 종잡을 수가 없어. 인육에 미쳐서 날뛰는 놈이 있는가 하면, 그저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 놈도 있거든.”

“하늘만 봐?”

몇십 분째 혼자 떠들다 처음으로 질문을 받았다. 가하란이 드디어 입을 연 것이다.

밀레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느긋하게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일반적으로 마수를 사냥할 땐 터를 잡아. 사냥감을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일정 구역으로 들어온 사냥감을 노리는 거지. 우리도 마찬가지였어. 고른달 숲 쪽에서 자리를 잡고 흘러들어 온 마수를 노릴 때였지.”

밀레나는 먹구름 낀 하늘만 올려보던 마수를 떠올렸다.

“털이 하얗게 빛나는 마수였어. 난생처음 마수를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아름다운 마수.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모르겠어.”

“이건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거니까. 아무튼 우리 눈길을 사로잡은 그 마수는 하염없이 하늘만 올려다봤어. 주변에 우리가 있다는 걸 알아챘음에도 공격해 오지 않았고.”

“그래서 어떻게 했어?”

“결말은 시시해. 보란 듯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더니 사라져 버렸거든. 근데 좀 이상하긴 했지.”

“뭐가?”

“그놈이 날아간 방향에 하늘석이 있었어. 그걸 쫓아다니는 건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슬쩍 가하란의 표정을 살폈다.

침울했던 기색이 많이 가셨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변함이 없다.

“마수 얘기가 나왔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뼈를 발골해내는 작업이 얼마나 중노동인지, 제대로 설명해줄게.”

“그건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아도…….”

“네가 제작한 의수에도 배터리가 들어가잖아? 배터리의 주원료로 사용되는 게 마수 뼈고. 그 마수 뼈가 어떻게 도시로 흘러들어 오는지, 넌 제대로 알고 있어야지.”

“논리가 이상한데.”

살며시 웃는 가하란이었다. 보기 좋은 웃음이었다. 가리기 위한 미소가 아닌 속마음이 표출된 형태.

“잘 들어봐. 마수의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일단 껍질을 벗겨내야 해. 대부분의 마수가 질기고 두꺼운 외피를 두르고 있거든.”

* * *

가하란은 어느샌가 턱을 괸 채 물끄러미 밀레나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고, 말끔하게 다듬어진 음성은 기분 좋게 귀로 흘러 들어왔다.

“예전에는 ‘심도’라고 해서 마수의 강약을 표현하는 척도가 있었지만, 요즘에는 그 사용법이 달라졌어. 뼈가 얼마만큼의 마나를 내포할 수 있는지, 그리고 마나 발산을 얼마나 억제할 수 있는지에 따라 심도법으로 표현해. 1에서 10, 숫자가 클수록 양질의 뼈가 되는 거지.”

아는 내용이었으나 대화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았다. 주억거리며 말을 들었다.

“10에 가까운 뼈는 배터리 용량과 수명을 말도 안 되게 향상시킬 수 있어. 그만큼 비싸지. 근데 재미난 건 심도 10의 뼈를 지닌 마수라고 해서 반드시 강한 건 아니야.”

밀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무지막지한 놈이 있었어. 온몸이 쇳덩어리처럼 단단한데, 움직이는 속도는 성난 원숭이 같았어. 그 전투에서 거병이 두 대나 망가졌고.”

“힘겨운 싸움이었네.”

“말도 못 해. 죽을 뻔했으니까. 그렇게 사냥을 끝내고 나서 발골을 시작했는데, 어? 검사 기기에서 심도 1이라고 뜨네?”

고개를 툭 떨구며 넋이 나간 표정을 짓는 밀레나였다.

“마수 사냥이 이래서 어려워. 안을 뜯어보기 전까지 결과물을 알 수가 없거든. 어떤 놈은 아예 뼈 자체가 없어서 허탕 칠 때도 있어. 그런 날에는 토마토랑 소금만 넣고 끓인 국으로 저녁을 때워.”

“수입이 없으니까?”

“그것도 이유긴 한데, 미신이 있거든. 공친 날에는 붉은 죽을 먹어야 한다는 미신이. 하우스 삼촌이 말하길 그래야 도깨비들이 운을 가져다준다나 뭐라나. 사냥꾼들의 오랜 전통 같은 거래.”

“그런 걸 지키는 게 의외로 득이 될 때가 있더라.”

“맞아.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들 토마토로 저녁을 해결하지.”

밀레나가 기지개를 켰다. 눈코입이 한 점으로 모일 때까지 잔뜩 찌푸렸다가 푸, 하면서 얼굴을 폈다.

“내 얘기는 여기까지. 이렇게 오래 떠들어본 것도 오랜만이네.”

“누나는 말재주로 먹고살 수 있을 거 같아.”

문득 시계를 보았다. 2시간이 지나 있었다. 타인의 목소리에 이 정도로 집중해본 게 언제였지?

“이제 네가 얘기해줄 차례인데, 어때? 무엇을 말할지 결정했어?”

미루었던 선택의 시간이 찾아왔다.

“난…….”

“잠깐만. 대화가 어려우면 그냥 혼자 떠드는 것도 좋아. 그래, 그게 좋겠다.”

밀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스보드 있어?”

“있긴 있어.”

“어디?”

가하란은 작은방을 바라보았다. 카트시가 잠들어 있는 방. 창고로도 사용 중이라 그 안에 오래된 체스보드가 있을 것이다.

방문을 열었다. 엔엔이 떠나고 난 후 한동안 열지 않아 공기가 탁한 느낌이 들었다.

“오토마타, 아니, 유사정령인가? 크기가 엄청 작네. 요즘에 나오는 것보다 작은 거 같아.”

밀레나가 카트시의 본체로 다가섰다.

“설마 네가 만든 거야?”

“아니. 오래된 골동품이야.”

“그래? 작동은 하고?”

“예전에는. 근데 지금은 잠들어 버렸어.”

“잠들었다라. 표현이 재미있네.”

가하란은 체스보드와 기물이 담긴 통을 꺼내 밖으로 나왔다. 식탁 위에 보드를 내려놓았다.

세팅은 금방 끝났다. 그 옛날 마주 보며 체스를 두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난 체스에 집중할 거야. 그러니까 너 혼자 신나게 떠들어. 무슨 얘기를 하든 상관없어.”

체스보드를 노려보는 밀레나였다.

“가하란. 그냥 두면 심심하니까, 내기를 거는 게 어때?”

“내기?”

“내가 이기면 선물 하나 해줘.”

그렇게 말하며 뒷주머니에 손을 넣는 밀레나였다. 손에 붙들려 나온 건 사용감이 잔뜩 묻어나는 스카프였다.

보자마자 알아챘다.

그 옛날 선물했던 스카프라는 걸.

“그거 아직도 갖고 있었어?”

“머리끈으로 계속 쓰고 있어. 요즘에는 수통에 감아두고 있지만.”

“……미안해. 난 누나가 선물해준 구두 잃어버렸어.”

“상관없어. 아무튼 내가 이기면 스카프 하나 사줘.”

“알겠어.”

대답하며 기물에 손을 뻗을 때였다. 밀레나가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나?”

“내기라고 했잖아. 서로 거는 게 있어야지. 너도 원하는 걸 말해.”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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