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1화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현관문이 열리며 여자가 나왔다. 얼굴을 보며 이름을 되새김질했다. 리올라. 가하란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우선 고맙습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는데 들어주셔서.”
말하지 말아달라는 눈짓을 리올라는 이해하고 들어주었다.
“사람 보는 눈이 좋지는 않지만, 그쪽이 가하란에게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아서요. 그래서 장단을 맞춰주긴 했는데…….”
위아래로 훑는 눈. 넌 대체 누구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예전에 알던 사이, 아니, 오래된 친구예요.”
“친구라.”
리올라가 현관을 돌아봤다.
“이미 봐서 알겠지만, 눈 상태가 좋지 않아요.”
“낮에 만났을 때만 해도 괜찮았어요. 근데 몇 시간 만에 몸조차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됐죠. 가하란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설명이 필요했다. 하지만 리올라는 정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내게 물어도 대답해줄 수 없어요.”
“대답해줄 수 없다는 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는 뜻이네요?”
“대강은요. 하지만 정확한 건 나도 몰라요.”
“위험한 일에 엮인 건…….”
리올라가 담배를 하나 꺼내 들었다. 피워도 괜찮겠냐는 듯이 손에 든 담배를 살짝 들어 올렸다.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이 꼴이 되기 전에도 둔에서는 아이들이 빨리 컸죠. 담당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었고, 사회에 녹아들어 생활하다 보면 앳된 모습은 금방 사라졌으니까요.”
가느다란 연기가 흐릿한 대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빨리 어른이 된다는 게 나쁜 건 아닐 거예요. 그쪽도 나이만 보자면 나보다는 훨씬 어려 보이지만, 그래도 한 명의 성인으로 대접받고 있겠죠.”
“그런 세상이 됐으니까요.”
마나 과포화 현상에 취약했던 건 중장년층이었다. 신체적 나이가 많을수록 사망률이 급격하게 올라간 것이다.
사회적 공백이 생겨났다. 빈 곳은 채워져야 하기 마련이고, 사회는 어린 연령대의 사회 참여를 강요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세대들이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거 알아요. 아는 꼬마가 한 명 있는데, 걔는 두 손을 휘저으면 얼음을 만들어내요. 스크롤도 없이.”
“재능이 있네요.”
“맞아요. 재능. 그야말로 신인류죠. 우리 같은 옛사람들은 금방 그런 아이들한테 밀려날 거예요. 내가 의술사인데, 이쪽 방면에도 특수한 아이들이 나타나고 있어요. 외과적 치료 없이 상처를 낫게 하는 애들도 소수지만 있긴 하죠.”
밀레나는 샬롯을 떠올렸다.
순수한 마나가 아닌 정령의 힘이라고는 하지만, 분명 그 아이처럼 특별한 힘을 지닌 자들이 셀 수 없이 늘어났을 것이다.
밀레나 또한 마나의 혜택을 받았다. 5년 전보다 신체술을 사용하기 편해졌고, 유지 시간 및 가용 가능한 힘 역시 늘어났으니까.
마법공학으로 이루어낸 기술 발전만큼이나 인간 자체도 변화, 진화하고 있는 상황.
“힘의 논리에 따라 사회가 변모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걸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되죠. 하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어린애로 보여요. 책임을 지고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을까…….”
리올라가 담배를 비벼 껐다.
“물론 이런 얘기를 요즘 사람들한테 하면 코웃음만 치죠. 네가 저 어린놈들의 속내를 못 봐서 그런다, 영악해서 챙길 거 다 챙긴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으로 걸어오는 리올라였다.
“난 가하란에 대해 잘 알지 못해요. 공통의 목표가 있기에 서로 돕고 있을 뿐이죠. 저 아이의 속마음은 내가 알아낼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그런 건, 그쪽처럼 친구의 몫이니까.”
기회가 되면 나중에 또 보자며 손을 흔들고 지나치는 리올라였다.
밀레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어른을 만났다고.
친구의 몫.
단어를 곱씹으며 현관문을 두드렸다. 가하란은 피곤해 보였다. 쉬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이대로 돌아가 버리면 계속 엇나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런 직감은 대개 들어맞는다.
비척거리는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그새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밀레나는 숨을 살짝 들이마신 후 말했다.
“선약을 잡아놨는데 퇴짜를 맞아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짧은 침묵이 반겨왔다.
문 너머에 있을 가하란은 어떤 표정일까. 불편해할까, 아니면 반가워할까. 그도 아니면 무감각하게 문만 바라보고 있을까.
“누나. 오늘은…….”
“밤이라 그런지 꽤 춥네.”
상쾌한 밤바람을 맞으며 말했다.
“얼굴을 보지 못할 정도로 피곤한 거라면, 좋아. 오늘은 돌아갈게. 하지만 내일 새벽에 올 거야. 설마 새벽에도 약속을 잡아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모레 새벽에 올게. 글피도 좋고.”
오기를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건너편에서 아주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는 거 다 들려.”
“약속 어긴 건 나야. 알면서도 그냥 왔어. 누나가 기분 상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온 거야.”
“알고 있으면 됐어. 급한 일이 있었겠지.”
“맞아, 급한 일이 있었어.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밀레나는 현관 손잡이를 바라봤다.
“그 일이란 거, 힘들었어?”
“모르겠어.”
“이상하네. 이건 알고 모르고를 나눌 문제가 아닌데. 힘들면 힘들다, 안 힘들면 안 힘들다.”
“그러게.”
당장에라도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싶었다. 얼굴을 보고 물어보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몰골이 됐는지, 지난 5년이란 시간이 너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기다렸다.
답을 내는 건 가하란이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 희미하게 웃는 가하란이 보인다.
“화 안 내? 내가 약속 어겼잖아.”
“얘기를 들어보고. 들어본 다음에 화를 낼지 말지 결정할게.”
집 안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어가도 되는 거지?”
가하란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행정센터에서 봤던 가하란의 사무실만큼이나 삭막했다. 아니, 사무실에는 이런저런 물건이라도 많았지 여긴 금방이라도 떠날 것처럼 가구가 없었다.
“단출하네.”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가하란이 음료를 내왔다. 차가운 주스였다.
주스를 마시면서 가하란의 행동을 눈으로 좇았다. 걸음걸이에 이상은 없었다. 사물도 제대로 구별하는 것 같고.
갑작스러운 시각 장애였을까.
“엔엔 님이 여기 계셨다는 얘기를 들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머무셨어.”
“지금은?”
“볼일이 생기셨다면서 또 떠나셨어.”
“금방 돌아오시는 거야?”
“글쎄. 잘 모르겠어. 며칠 만에 돌아오실 수도 있고, 아니면 저번처럼 1년 넘게 도시를 떠나 계실 수도 있고.”
“평소에는 혼자 지내는 거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는 가하란이었다.
“테리하고 같이 지내는 건 어때? 어릴 때도 같이 어울려 다녔으니 불편하지는 않잖아.”
“형이 몇 번 권유를 해왔지만, 내가 거절했어.”
“왜? 불편해서?”
“형이 불편한 건 아니야. 그저…… 내가 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어.”
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밀레나는 흐릿한 가하란의 눈을 바라봤다.
“계속 일만 했다며?”
“그거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아닐 것이다. 어릴 때 가하란은 매일같이 꿈을 입에 달고 사는 애였다. 모험가부터 시작해서 거병 제작자까지. 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어이없기까지 했다.
그랬던 애가 일 외에는 할 게 없다고 한다.
밀레나는 컵 주둥이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5년.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지?”
“응, 그런 거 같아.”
“생각해봤어. 5년 만에 만났으니 추억을 떠올리며 즐겁게 얘기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추억 같은 건 뒤로 물리고 현재를 말하는 게 좋을까.”
뽀드득거리는 촉감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내가 알고 있는 5년 전의 너, 네가 알고 있는 5년 전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와 너. 분명 말도 안 되게 달라졌을 거야, 그렇지?”
“그럴 거야.”
“지금 당장 너에 대해 말할 수 없어. 당연하지. 모르는 것투성이니까. 그러니 속 편하게 과거만 들추면서 떠드는 게 옳긴 해. 추억만 곱씹으면 골치 아플 일도 없고, 즐겁게 웃을 수 있잖아.”
선물을 주고받은 기억, 처음 맛본 골목 음식의 단상, 체스를 두던 우리의 초상.
실없는 소리로 시간을 보냈던 그날로 시곗바늘을 돌리기만 하면 부담 없이 떠들 수 있다.
그랬었지, 하하호호.
현실에서 약간만 눈을 돌리면 달콤한 여운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난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추억을 돌이켜 보는 게 죄는 아니잖아?”
밀레나는 움켜쥔 왼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가하란은 위태로워 보였다. 올란트의 죽음이 이 아이를 어디까지 몰아붙인 걸까.
알지 못하니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5년. 타인이 되고도 남을 시간이다.
가족 같은 테리와 제니가 지켜보기로 했다.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부침이 있었을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여기서 물러서야 했다. 피곤할 테니, 혹은 다음에라는 서두를 떼고 기약 없는 약속을 한 뒤 떠나는 게 가하란을 위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살아 있으니까.
적응해서 버티고 있으니까.
괜히 헤집어 놓았다가 제니의 말대로 조용히 사라져 버리면, 부재를 감당하는 건 누구일까?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구태여 선택지를 넘긴 건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족이기에 털어놓지 못했다면?
진실로 가까웠기에 감춰야만 했다면?
적당한 거리감으로 무장한 내가 속내를 들어줄 수 있지 않을까?
추억이란 달콤한 말에 기대 미처 꺼내놓지 못한 진심을 엿들을 수 있지 않을까?
리올라에게 기대 비틀거리던 가하란을 보는 순간, 밀레나는 그 어느 때보다 조급함을 느꼈다.
돕고 싶다는, 어쩌면 이기적일 수도 있는 감정에 휩싸여 버렸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그간 잊고 살았는데, 어쩌다 한번 떠올렸을 뿐인 빛바랜 추억이라 생각했는데, 실물로 마주하니 감정이 요동쳤다.
“누나, 나는…….”
말을 아끼는 가하란이었다.
밀레나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봤어. 리올라 씨와 함께 오는 널. 코앞에 있는 나도 알아보지 못하더라.”
가하란이 아, 하며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체념하듯 연한 미소를 지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앞에 누가 있었던 것 같았거든.”
“만약 네가 나한테 말할 게 있다면 뭐든 들어줄 거야. 5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방금 전 네가 말했던 급할 일이라는 것도.”
“들어봤자 기분만 나빠질 거야. 재미도 없고. 흔하디흔한, 그냥 철없는 애새끼의 한탄이니까.”
“그 한탄을 누구한테 털어놓은 적 있어?”
가하란의 표정이 한순간 굳었다.
시선이 밑으로 떨어진다.
“있어. 덴스 교수님께 얘기했어.”
“그래?”
“술에 취했거든. 취기에 그냥 던지듯 말했어. 웃긴 건 그렇게 말하고 나니까 잠도 잘 자고, 입맛도 돌았어. 근데 난…… 그게 너무 역겨웠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가하란의 얼굴은 조소로 물들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