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0화
봤을까?
사실 봐도 상관은 없었다.
가하란은 쓰레기통을 책상 안쪽으로 더 깊게 밀어 넣었다. 피 묻은 천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5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그날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선물받았던 구두도, 덕분에 처음 봤던 연극도, 그리고 함께 뒀던 체스까지.
아릿한 맛은 하나도 없는, 단맛뿐인 기분 좋은 추억이었다.
반가움이 컸다. 시간이 허락했다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을 것이다.
하지만 추억을 곱씹고 있을 여유 따윈 남아 있지 않았다.
“반년 만에 다시 뵙네요. 팔은 어떠셨어요? 이전 것보단 괜찮았죠?”
미소를 짓고 앞에 앉은 환자를 바라봤다. 입가가 저릿하다. 제대로 웃고 있는 게 맞을까?
의수를 점검하며 말을 걸었다. 요즘 어떠세요, 발 저림은 나아지셨나요, 가게는 어때요 등등.
기억 속에서 발굴해낸 정보로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갔다.
맞은편에 앉은 환자가 웃었다. 가하란도 웃었다. 또다시 경각심이 든다. 지금 제대로 웃고 있겠지?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다행히 입술은 미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인상을 쓰는 것과 미소를 짓는 것. 언젠가부터 이 두 가지가 구분되질 않았다.
교수님이 쓰러지고 나서부터였나?
환자와 상담하며 의지(義肢)를 교체했다. 구형 의수와 의족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고생했어요, 작은 선생님.”
인사와 함께 마지막 환자가 나갔다. 가하란은 업무 기록을 정리하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외투를 챙기고 밖으로 나왔다. 한산한 복도를 지나 입구로 향했다.
“치프, 끝났어요?”
제조 파트 쪽 사람과 마주쳤다. 가하란은 웃음 지으며 예, 라고 대답했다.
“이따가 쿠틴네로 와요. 돼지 한 마리 잡기로 했으니까.”
“죄송해요. 오늘 일이 있어서.”
“여전히 바쁘시네. 알았어요, 혹시라도 짬 나면 얼굴 비춰요. 다들 치프를 보고 싶어 하니까.”
“갈 수 있으면 갈게요.”
지켜진 적 없는 약속을 내뱉고 출구로 나설 때였다. 툴이 다가와 바짓단을 물었다. 보내줄 생각이 없다는 듯 철퍼덕 누웠다.
“툴, 다음에 놀자.”
평소 같았으면 눈치 한번 보고 놓았을 텐데, 오늘은 눈동자를 돌리며 모른 척한다.
이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가하란은 무심하게 툴을 바라봤다. 그제야 툴이 입을 벌려 바지를 놓았다.
“다음에, 알겠지?”
뛰듯이 걸었다. 목적지는 병원. 롱캣 상인연합회의 마크가 그려진 병원 앞에서 숨을 골랐다.
빠르게 걷는 것만으로도 숨이 벅차다. 요 며칠 사이 체력이 급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버티기 위해 식사량과 수면 시간을 늘렸지만, 그만큼 쏟아내는 게 많아져서 별 효과는 없었다.
병실 앞에서 재차 숨을 고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받은 대로 안에 리올라가 있었다.
“왔어?”
가하란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인 후 병상에 누워 있는 덴스를 바라봤다. 생명 유지를 위한 스크롤이 전신에 붙어 있었다.
리올라가 부착된 스크롤을 제거했다.
“준비는 해놨어.”
“고맙습니다.”
“근데, 정말 괜찮은 거야? 저번에도…….”
“괜찮아요. 제가 컨트롤할 수 있어요.”
“부탁한 내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몸은 돌봐 가면서 해. 환자 살리려다가 환자가 더 늘어나는 건 난센스야.”
자리를 비켜주는 리올라였다.
가하란은 덴스 옆에 앉았다. 깨끗한 천을 왼손에 쥔 다음 눈을 감았다.
안구의 중심에서 불꽃이 튀었다. 깊어지는 통증에 작게 신음이 나왔다.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춤추는 선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 정도로는 안 된다. 간략화된 정보가 필요하다. 한계에 달한 것 같은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덴스의 몸을 이룬 선들이 점점 얇아졌다. 합쳐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눈알을 쥐어짜는 느낌이 들었다. 가하란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손과 손에 들린 천마저 선의 형태로 변했다. 보이는 것을 무시하고 감각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선으로 된 천에 피의 정보가 묻어났다. 하늘색으로 칠해진 얇은 선. 수없이 봐와서 이제는 익숙해졌다.
“어디 있는 거야.”
덴스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병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교수가 혼수상태에 빠진 그날, 가하란은 덴스의 몸 안에 있는 이질적인 정보를 분명히 봤다.
찾아내 해석하고 제거한다면 치료도 가능할 것이다.
미지근한 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눈물은 아니다. 다시 천을 들어 피를 닦아냈다.
눈에 영구적인 장애가 와도 상관없었다. 구할 수만 있다면 대가는 지불할 것이다.
입술이 비틀리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의지로 틀어막을 수 없는 아픔이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가하란은 피가 흘러내리는 두 눈으로 덴스를 계속해서 살펴 나갔다.
* * *
“갔다고?”
밀레나는 텅 빈 방을 바라봤다. 깨끗하게 정리된 책상. 급한 일이 생겨 서둘러 떠난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단 말이지.”
책상으로 걸어가 안쪽 쓰레기통을 살폈다. 피에 젖어 있던 천이 안 보인다. 이것도 치웠구나?
“언니?”
제니가 곁으로 다가왔다.
“일 끝나면 얘기 좀 하자고 분명히 말했었는데, 그냥 가버렸네.”
“……깜빡했나 봐.”
“그 좋은 머리로 깜빡한다라.”
제니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고 했지?”
“어.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어.”
“보니까 여기서 혼자 빵만 먹던데, 저녁은 같이 먹는 거야?”
“저녁은 보통 집에서 먹어.”
“집에서? 가하란은 누구랑 살고 있는데.”
“얼마 전까진 엔엔 님이 계셨는데, 지금은 혼자 있을 거야.”
엔엔.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공방주도 아직 둔에 있구나.
“가하란 말이야, 체스는 둬?”
“체스?”
“꼭 체스가 아니더라도 일 말고 따로 하는 게 있어? 업무 관련 서적 말고 다른 책을 본다든지, 아니면 멍 때리고 하늘을 본다든지.”
“아마 없을 거야.”
“툴하고 노는 건? 예전에는 종일 같이 붙어 있었잖아.”
제니가 고개를 저었다. 밀레나는 입을 씰룩이며 방 안을 훑었다.
무엇 하나 삐뚤어진 게 없다. 걸려 있는 시계도, 선반에 놓인 허브도, 벽에 걸린 각종 기구도 반듯하게 정렬돼 있다.
흐트러지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밀레나는 책상 뒤 진열장을 바라봤다. 사진 하나와 자그마한 거병 모형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안에는 활기차 보이는 올란트와 처음 보는 여자가 나란히 서 있었다. 가하란의 친모인 것 같았다.
옆에 있는 거병 모형은 5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올란트가 만들어 가하란에게 준 생일 선물.
“그렇단 말이지.”
밀레나는 사진 속 올란트를 바라봤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 짓고 있었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평면 속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얘기는 해볼게요. 말을 들어먹을진 모르겠지만.”
작게 속삭이고 몸을 돌렸다.
“가하란은 일 끝나면 집에만 있어?”
“아마 그럴 거야.”
“아마?”
“자기 자신에 대해 얘기를 안 해. 한때는 그게 답답해서 화도 내고 부탁도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어. 몰아붙이면…… 걔가 없어질 것만 같았거든.”
제니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5년이다. 누구보다 걱정했을 사람이 제니였을 것이다. 가족이나 다름없는데 손 놓고 방관만 했을까?
아마 모든 방법을 동원해봤을 것이다. 그 끝에 도달한 결론이 지켜보자는 거고.
“고생했네, 내 동생.”
밀레나는 울먹이는 제니를 살짝 안아주었다.
“언니가 얘기해볼래? 가하란도 언니 말이라면 들을지 몰라.”
“당연히 그래야지. 말 안 들으면 한 대 쥐어박고.”
힘껏 웃으면서 말했지만, 덧없는 미소라는 걸 알기에 입가에 주던 힘을 풀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달라지는 게 없을지도 몰라. 5년이나 지났잖아? 여전히 꼬마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애는 아니야. 나도 변한 건 마찬가지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 친한 척하는 게 맞나, 그런 생각도 들어. 5년 전의 추억으로 현실의 문제를 들먹이는 게 옳은 건가.”
“그렇지 않아! 가하란은 종종 언니 얘기 했어.”
“그래? 그건 기쁘네.”
가하란은 약속이 뭔지 아는 애였다. 어길 거라면 애초에 입에 담지도 않는 애였다.
그런데 말없이 사라졌다.
약속을 어긴 것이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이건 따질 수 있는 거 아닌가?
삐딱하게 나온다면 한마디 정도는 해줄 것이다.
“집 주소 좀 알려줄래?”
제니한테 받은 쪽지를 손에 쥔 채 거리로 나섰다. 구역을 알기 쉽게 나눠놓아서 주소만으로도 찾아가기 쉬웠다.
“여기네.”
현관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설마 없는 척하는 건 아니겠지?
신체술을 사용해 감각을 높였다.
예민해진 귀가 주변 소리를 잡아냈다.
한동안 집중하다가 신체술을 풀었다.
없는 건가?
인기척이 느껴지질 않았다.
밀레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회중시계를 꺼냈다.
오후 6시. 저녁을 먹으러 밖에 나간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니와 테리의 걱정과 달리 여가를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 새로운 관계에 집중하느라 오래된 인연에게 무심해지는 건 흔한 일이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고, 밀레나는 생각했다.
오늘 하루 봐온 가하란의 표정이 그저 평범한 사회인이 쓰는 적당한 가면이길.
정말 별일 아니라 걱정했던 게 헛웃음이 나올 정도이길.
오가던 전동수레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졌다. 거리 전등에 불이 들어오고 저녁 장사를 마무리 짓고 문을 닫는 가게도 하나둘씩 나왔다.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하나,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빛이 뿌려진 인도를 따라 두 사람이 걸어왔다. 한쪽은 키가 큰 여자였다. 긴 머리를 묶어 어깨 앞으로 뺐다.
밀레나의 시선은 여자 왼쪽에 있는 왜소한 남자에게 향했다. 여자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제대로 몸을 못 가누는 상태였다.
두 사람이 점점 다가온다.
밀레나는 제자리에 서서 코앞까지 다가온 여자, 그리고 가하란을 바라봤다.
“누구……”
여자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힘겹게 서 있던 가하란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시죠?”
그 순간 밀레나는 보았다.
초점 없는 가하란의 눈을. 눈앞에 있는 것을 제대로 분간 못 하는 멍한 눈동자를.
여자가 입을 열기 직전, 밀레나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 상태로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리올라 씨?”
가하란이 말했다. 여자 이름이 리올라인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집 앞에 도착했어.”
“감사합니다.”
“아직도 앞이 안 보여?”
“아직 흐릿하지만, 어느 정도는 보여요. 근데 아까 앞에 누가 있지 않았나요?”
밀레나는 옆으로 슬쩍 비켜섰다.
“아니, 아무도.”
“잘못 봤나 보네요. 여기서부턴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뗀 가하란이 곧바로 휘청거리며 넘어지려 했다.
여자가 급하게 손을 뻗어 가하란을 붙잡았다.
“이 상태로는 문도 못 열어. 안까지 데려다줄게.”
“죄송해요.”
손을 앞으로 내밀며 천천히 걷는 가하란이었다.
밀레나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낮에 봤을 때만해도 멀쩡했다. 사물을 구분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내막을 알 수 없어서 그런 걸까. 속이 답답하고 화가 나고 짜증도 치밀면서, 동시에 미치도록 안쓰러웠다.
아니, 자세한 사정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저 아이가 너무나도 가여워서 속이 타들어 간다.
5년.
너에게 그 시간은 대체 어떤 시간이었던 거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