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9화
“네, 삼촌들! 잘 찾아갈 테니까 얼른 가요!”
밀레나는 저 멀리서 손 흔드는 용병들을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곁에 있던 테리가 말했다.
“용병 생활한 지 얼마나 됐다고 했지?”
“3년 정도. 성도 근처에서 사냥꾼 노릇을 하다가 엄마랑 만난 후 여기까지 왔지.”
“대단하네. 마수 사냥을 그렇게 길게 해온 사람은 몇 없을 거야.”
“위험하긴 하니까. 그래도 적성에 맞아. 어릴 때부터 배워온 걸 써먹을 수도 있고.”
“예전 생각난다. 그때 솔직히 말은 못 했지만, 넌 귀족 같지가 않았어. 동네 애들 같았지.”
“네가 날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격식 차려야 할 자리에서 날 봤다면 생각이 달라졌을걸?”
테리가 살짝 웃었다.
“우리한테 맞춰준 거다?”
“당연한 걸.”
밀레나는 뒤쪽을 힐긋 바라봤다. 나란히 서서 따라오는 율과 샬롯이 보인다.
“도마뱀 아저씨랑 에단이 안 보이네.”
“따로 볼일이 있다고 했어. 나중에 찾아오겠다는 말도 했고.”
“그래?”
“근데 너도 도마뱀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야? 어지간한 사람은 겁나서 그렇게 못 부를 텐데.”
“내가 필렌의 딸이라고 하니까 단번에 이해했다는 표정이었어.”
말하고 있을 때였다.
정면에서 아이가 달려왔다. 여섯 살 정도 보이는 여자아이였는데, 왼발이 의족이었다.
신경망 연결을 지원하지 않는 일반 의족. 부딪힐 뻔한 아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넘어지면 아프니까 앞은 보고 다녀.”
쑥스러운지 고개만 끄덕거리고 떠나가는 아이였다.
“일반품 품질도 좋아 보이네. 역시 둔인가?”
“마음 같아선 신경망 연결되는 의족을 지원해주고 싶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가로막더라.”
“저 나이대는 의족을 금방 갈아야 하잖아? 어설프게 연장하면 몸에 무리가 갈 테니까.”
“맞아. 발육 상태에 따라 재제작을 해야 하는데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지.”
밀레나는 뛰어가는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흔들림 없이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저것도 가하란의 작품이야?”
“유아용 표준 규격은 가하란이 제시했어. 둔에서 시작해 주변 도시에서 자료를 받아 표준 모델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양산화할 방법을 찾았지. 사용감이 썩 좋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목발보다 나으니까.”
“작은 꼬마가 정말 바쁘게 살았네.”
테리가 소리 내어 웃었다.
“직접 보면 작다는 말은 안 나올 거야. 이젠 너보다 크니까.”
“그래도 내가 누나야.”
“요즘 세상에 나이 신경 쓰는 사람이 있던가?”
밀레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 건 내 오래된 철칙이긴 하다.
“다 왔어.”
테리가 가리킨 곳, 인근 주택과 확연히 구별되는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거대한 창고처럼 보이는 네모반듯한 건물 안으로 자동수레가 들어가고 있었다. 정체 모를 물건을 가득 실은 상태였다.
“오른쪽이 제조소. 왼쪽이 개발 연구 및 지원 사업을 담당하는 행정 센터.”
행정 센터라 부른 건물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가족 단위도 보이고 혼자 온 듯한 사람도 보인다.
결손 부위를 매만지며 대기 중인 남자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툴!”
입구 안쪽, 거대한 개가 누워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갔다.
“그때보다 더 큰 건가?”
턱밑에 수북이 자란 털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살며시 주물렀다. 어릴 때도 컸는데, 지금도 크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툴이 꼬리를 팔랑거리며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나 기억해?”
생글생글 웃는 듯한 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걔랑 더 놀 거면 내가 좀 기다리고.”
테리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이따가 또 봐.”
툴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한순간에 5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어쩌면 가하란 역시 마주하자마자 옛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밀레나 언니?”
한 손에 파일을 든 채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소녀가 있었다. 밀레나는 보자마자 제니라는 걸 알아챘다.
인사 대신 다가가 가볍게 안았다.
“진짜 언니 맞아?”
못 믿겠다는 투로 말하던 제니였으나 곧 활달한 미소를 보이며 맞아주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좀 더 일찍 찾아오고 싶었는데 자꾸 일이 생겨서.”
사무적인 분위기가 제법 흐르지만, 그래도 앳된 기운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제니와도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아기자기한 추억들을 들추며 떠든다면 몇 시간은 훌쩍 지나가리라.
하지만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도란도란 얘기하는 건 그다음에.
“가하란은 안쪽에 있어. 마침 쉬는 시간이라 손님도 없고.”
제니가 먼저 말했다. 역시 눈치가 좋다. 밀레나는 복도 중앙에 있는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하란은 좀 어때? 테리한테 대충 얘기를 듣긴 했는데.”
씁쓸함을 담아 대답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제니는 제법 쾌활한 목소리를 냈다.
“요즘은 괜찮아. 잠도 잘 자고 잘 먹고. 쉬는 시간도 꼬박꼬박 챙기고 있어.”
“그래?”
잠을 잘 잔다는 거.
이것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다. 휴식 없는 삶만큼 위태로운 것도 없으니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잘 이겨낸 걸까? 하긴, 똑똑한 애였으니 자기 앞가림 정도는 잘 했겠지.
“근데 뒤에 저분들은…….”
제니가 율과 샬롯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답은 테리가 해줬다.
“사업 파트너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
제니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나온 김에 먼저 가봐. 가하란 혼자 있을 테니까. 난 율 씨와 일정을 조율한 뒤에 보면 돼.”
“네가 그렇다면야.”
싱글벙글 웃고 있는 샬롯이 눈에 밟혔다. 쟤도 가하란과 만나고 싶어 할 텐데.
율이 샬롯의 손목을 낚아채는 게 보였다. 발을 크게 떼던 샬롯이 기우뚱거리며 뒤로 당겨졌다.
율이 눈웃음 지으며 손짓했다. 얼른 가보라는 뜻 같았다.
울상 짓는 샬롯을 뒤로한 채 복도를 걸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끙 하고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밀레나는 작게 웃으며 문틀을 두드렸다.
“예, 들어오세요.”
“정말 들어가도 되나요?”
“그럼요.”
문을 슬며시 열었다.
고소한 버터 냄새가 났다. 책상 한쪽에 커피 잔과 토스트가 보인다.
밀레나는 멀거니 가하란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하늘색 눈동자만 그대로였다.
제니가 옛 모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면, 가하란은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키가 큰 건 그렇다 쳐도, 인상이 이렇게까지 달라져도 되는 건가?
테리조차 한눈에 알아봤는데 가하란은 길 가다 마주쳤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기억 속 둥글둥글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어릴 땐 살집이 제법 있었는데 지금은 위로만 길어졌지, 옆으로는 5년 전보다 더 마른 것 같다.
제니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요즘에는 잘 먹고 잘 쉬고 있다고.
이게 잘 먹고 잘 쉰 상태라면, 그전에는 대체 어떤 몰골이었던 거지?
걸어 다니는 송장?
툴처럼 장난기 가득하고 똥그랗던 눈매는 격무에 시달린 사무관처럼 늘어져 있었다.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을 분출하던 눈동자 대신 당면한 문제에만 집중하는 무덤덤한 눈동자가 자리를 잡았다.
“무슨 일로 오셨죠?”
가하란이 가느다란 미소를 짓는다.
저 웃음, 밀레나는 저게 어떤 종류의 웃음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단언컨대 5년 전 가하란은 저런 식으로 웃지 않았다.
테리를 봤을 때도, 제니를 봤을 때도 느끼지 못한 세월이 가하란 앞에서 한순간 들이닥쳤다.
밀레나는 되레 머쓱하게 웃었다.
변화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세상이 급변했다.
그라운드 제로는 모든 걸 바꿔놓았다.
그런 시대에, 바뀌지 않고 옛 모습을 견지하는 게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눈앞의 저 친구는 그대로이길 바랐다. 고맙다며 생긋 웃는 얼굴로 스카프를 주던 그때 그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다.
“오랜만이야.”
책상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어슬프게 웃고 있던 가하란의 입이 살며시 벌어졌다.
“누나?”
밀레나는 대답 대신 책상에 놓인 서류를 바라봤다. 빈 곳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알아먹을 수 없는 숫자 같은 게 막 적혀 있네. 이게 다 뭐야?”
“의수 안에 삽입된 회로 수치를 재검토하는 중이야. 그보다, 정말 밀레나 누나 맞아?”
“맞지. 아니면 누구겠어?”
밀레나는 가하란의 오른발을 바라봤다. 바짓단을 걷어 올려 의족이 드러나게 했다. 더워서 그런 건 아닐 테고.
“애들한테 설명할 때는 이러는 편이 낫더라고. 접합부를 보여주면서 말하면 이해하기도 쉽고.”
“오히려 겁먹지 않아?”
“그런 애도 있긴 하지만.”
배시시 웃는 가하란이었다.
그 모습은 5년 전과 비슷했다.
“너도 가하란이 맞긴 하네.”
“무슨 뜻이야?”
“그런 게 있어. 그보다 너, 어디 아픈 거야?”
“아니. 멀쩡한데.”
“근데 왜 그렇게 말랐어. 밖에 뛰어다니는 애 중에 너보다 마른 애가 없겠다.”
“그 정도는 아니야.”
“아니긴. 거울은 보고 말하는 거지?”
밀레나는 한 입만 물고 내버려 둔 토스트에 눈길을 줬다.
“저거, 언제 먹으려고?”
“천천히 먹을 거야.”
“얼른 먹어. 식으면 맛없어.”
눈만 깜빡거리던 가하란이 토스트에 손을 뻗었다.
“우리 5년 만에 보는 거 맞지?”
“맞아.”
“근데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밥 먹으라는 거야?”
“듣기 싫으면 내가 오기 전에 살을 찌워 놨어야지.”
“여전하구나, 누나 제멋대로인 거.”
“사람은 변하면 죽어.”
가하란이 빵을 입에 밀어 넣고 커피를 마신다. 씹을 때 표정이 영 탐탁지 않았다.
“내가 나무껍질을 씹어도 그것보단 맛있게 먹겠다.”
“원래 이렇게 먹었어.”
“아닐걸? 내가 본 게 몇 번인데.”
“5년 전이잖아. 정확히는 6년 전이고. 지금도 나이가 많진 않지만, 그땐 정말 어렸어. 작은 거 하나에 그냥 웃을 수 있는 때였고.”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지.”
밀레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고 가하란 옆에 앉았다.
“올란트 씨의 부고는 테리를 통해 들었어.”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누나를 반겨줬을 거야.”
이제는 괜찮다는 듯이 웃는 가하란이었다. 밀레나는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저 웃음.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 가하란이 짓던 웃음이다. 가리는 용도. 가면에 그린 호선.
“너…….”
“오랜만에 봤는데 이거 어쩌지? 예약한 분들이 계셔. 그분들을 기다리게 할 순 없어.”
밀레나는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건물 밖에도 줄이 있었지.
“새치기는 할 순 없지.”
의자에서 일어났다. 웃으면서 가하란을 보는데, 책상 밑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게 보인다. 잔뜩 뭉친 천에 묻어 있는 붉은 거. 토마토 주스를 쏟은 건 아닐 것이다. 저 검붉은 건 밀레나가 수도 없이 봐온 것이니까.
가하란이 슬쩍 다리를 움직여 쓰레기통을 밀어냈다. 밀레나는 못 본 척 몸을 돌렸다.
“일 끝나고 보자. 아, 그리고 율도 왔어.”
“그 이름 들으니까 반갑네.”
“울도 그럴 거야. 그리고 한 명 더. 혹시 샬롯이란 애를 알아?”
“샬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가하란이었다.
“환자 중에 샬롯이란 이름이 많아. 흔한 이름 중 하나니까. 혹시 내가 알아야 할 사람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중에 당사자랑 얘기해봐. 꿈에서 널 봤다고 주장 중이니까.”
밀레나는 방문 앞에 섰다.
“이따가 얘기하자. 느긋하게 말이야.”
“응, 나중에 봐.”
웃으면 말하는 가하란이었다.
또 그렇게 웃는다 이거지?
열받을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스멀스멀 난다.
밀레나는 귀족일 때 짓던 체면치레용 웃음을 한껏 날려준 뒤 문을 닫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