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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58화 (231/558)

제258화

“고맙습니다.”

가하란은 안내를 맡아준 관료에게 인사한 후 방문 앞에 섰다. 손으로 문을 몇 번 두드렸다.

누구세요, 하고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할지 모르겠네. 가하란이라고, 몇 번 보긴 했는데. 들어가도 될까?”

“들어와도 돼.”

문을 열었다. 눈이 퉁퉁 부은 프레나가 보였다. 덴스 교수의 딸. 인상에 남아 있던 밝은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빠는?”

“아직…….”

“그렇구나.”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멍하니 바라보던 프레나가 입을 열었다.

“유단 오빠는?”

“잠깐 자리를 비웠어.”

“…조사받으러 간 거구나.”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금방 돌아올 거야.”

루카가 사건이 아니라고 넌지시 말해줬다. 유단을 데려간 것도 정황을 면밀히 파악하기 위한 대처일 뿐이리라.

“어제까지만 해도 아빠는 아무렇지 않았어. 평소에 좀 피곤한 모습을 보이시긴 했지만, 이렇게 쓰러지실 정도는 아니었고.”

“급발성 오블리비언이라고 의술사가 말해주긴 했는데…….”

“그거, 원인을 잘 모를 때 아무렇게 붙이는 거잖아?”

그라운드 제로가 일어난 날, 농도 높은 마나에 노출된 수많은 사람이 즉사했다.

측정할 수 없는, 뿌리가 방출해낸 다량의 마나가 온 세상에 뿌려졌고 그날 모든 게 바뀌었다.

마나에 적응한 자들은 이전 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하게 마나를 다루게 됐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은 규명할 수 없는 온갖 문제에 시달리게 됐다.

무엇 하나 확언할 수 없게 된 세상.

급발성 오블리비언도 그런 시류에 맞춰 스멀스멀 이름이 올라왔다.

정의할 수 없는 현상을 억지로 설명하려는 방편으로.

프레나가 두 손을 맞잡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셨으면 좋겠어. 다른 거 바라는 거 없어. 그냥 아빠만…….”

가하란은 입술을 살짝 뗐다가 이내 다물었다. 위로할 수 없었다. 이런 순간에 말의 무게가 얼마나 가볍게 느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의술사였다. 덴스 곁으로 가도 된다는 말에 프레나가 일어섰다.

프레나와 함께 덴스의 방으로 갔다.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누워 있는 교수가 보인다.

“아빠.”

침대 곁에 쓰러지듯 앉은 프레나가 덴스의 손을 붙잡았다.

가하란은 옆에 선 의술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급발성 오블리비언, 이것 외엔 따로 설명할 방법이 없나요?”

“현재로선 그래요.”

의술사가 손을 앞으로 모으며 말을 이었다.

“알아요. 대책 없는 대답이라는 거. 지난 5년간 수없이 진단하고 치료해보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원인 불명이에요. 환자가 병을 이겨내고 깨어나길, 후유증이 없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죠.”

가하란은 열린 문틈으로 거실을 바라보았다. 어수선했던 집 안이 잠잠해졌다. 오가는 사람들의 수가 확연히 줄었다.

군은 이미 철수한 것 같고 행정처 조사관들도 마무리 짓는 느낌이었다.

방대해진 마나가 불러온 사고.

현장 조사서에 적힐 내용이리라.

가하란은 엎어진 채 흐느끼는 프레나를 바라보다가, 눈을 살며시 감았다.

잡음이 한순간 사라졌다. 안구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사방에 휘몰아치는 정보들이 보인다. 한 가닥 한 가닥,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선이 방을 꽉 채우고 있었다.

가하란은 덴스의 몸을 바라봤다.

피륙으로 이뤄진 인간이 가닥가닥 해체되며 정보의 집합으로 변해갔다.

온도가 오른다. 눈이 익을 것처럼 뜨거워졌다. 통증이 심해질수록 감각은 예리해졌다.

의수를 제작하고 연결하면서 신경을 살피는 것엔 익숙해졌다. 인간의 모든 정보가 같지는 않지만, 공유하는 지점은 있었다.

가하란은 이리저리 꼬인 선을 바라봤다.

일체화를 이룬 선. 의술사가 말한 대로 마나분포도에 문제는 없었다.

단절되거나 헛도는 것도 없었다.

둔에 있으면서 급발성 오블리비언 환자들을 몇 번이고 봐왔다. 덴스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이상 없이 몸의 통제권을 잃었다.

어찌할 수 없는 불행인 건가.

눈의 압력을 풀고 본래 상태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기이한 선을 발견했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다른 선들과 달리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연분홍색을 띤 선.

색다른 형태였다. 이질감이 든다. 좀 더 관찰해보려 했으나 무수히 쌓인 선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가하란은 눈을 감았다 떴다.

선 단위의 정보가 취합돼 현실의 모습을 갖췄다.

방금 본 선은 무엇이었을까?

“약물 반응은 없었다고 했죠?”

의술사에게 물었다.

“네. 시약에 반응은 없었어요. 기타 의심스러운 상흔도 없었고요.”

질문에 착실히 대답해주는 의술사였다. 아무래도 루카가 따로 언질을 주고 간 것 같았다.

“답변 감사합니다.”

선의 세계는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정보는 무한에 가까웠고, 그걸 분별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선이 담은 정보를 온전히 읽어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많은 게 달라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질적인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 선에서 그칠 수밖에.

“아빠와 조용히 있고 싶어요.”

프레나가 의술사를 보며 말했다. 가하란은 의술사를 따라 문밖으로 나왔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하염없이 아빠를 부르는 프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더 궁금한 점이 있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의술사가 목에 두른 검은 천을 벗었다. 그러고는 손을 내민다.

“리올라예요. 중령님하고 어떤 사이죠?”

“아버지의 절친이셨어요. 전 가하란입니다.”

“이름은 알아요. 둔에서 유명하잖아요,”

가하란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은 작은 선생님, 이라고 불러서 무슨 소린가 했는데…… 꽤 젊으시네요.”

“어리죠, 아직은.”

리올라가 발코니를 가리켰다.

“얘기 좀 할래요?”

리올라를 따라 발코니로 갔다. 정문을 지키던 군인도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안뜰에 북적이던 사람들도 모습을 감췄다.

“말 편하게 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세요.”

리올라가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고마워. 너도 편하게 말해도 돼. 요즘 세상에 나이가 무슨 대수겠어.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고 적든 능력이 최고지.”

씩 웃으며 담뱃불을 붙인다.

“급발성 오블리비언. 듣는 사람 속 뒤집히는 말이야.”

“여전히 밝혀진 게 없나요?”

“없어. 아무것도 없어. 의술계 쪽 전문서에도 이러한 증상은 쓰여 있지 않아. 그렇겠지. 세상이 바뀌고 뒤에 생겨난 병이니까.”

리올라는 한 모금만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말할 때마다 환멸이 나. 그게 뭐냐고 묻는 눈을 마주할 때마다 내 목에 두른 검은 천을 찢어버리고 싶어. 5년 전만 해도 제법 괜찮은 의술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뭣도 아니야.”

“부딪치다 보면 뭔가 달라지겠죠.”

“그러면 좋겠네.”

리올라가 몸을 틀었다.

“아까 말이야, 학회장님을 뚫어져라 보던데. 뭔가 발견한 거라도 있어?”

“발견이요?”

“마법공학이 적용된 의수. 그게 얼마나 까다로운 물건인지 나도 잘 알아. 신경 연결이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사용자가 불편을 호소하지. 아예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런데 루드 팩토리 쪽 의수는 오작동률이 현저히 낮아. 그 이유는 눈앞에 있는 작은 선생님 덕일 테고.”

“그렇지도 않아요.”

“과한 겸손은 보기 안 좋아. 이미 둔에 소문이 다 난 사실이잖아?”

가하란은 오른쪽 무릎을 매만졌다. 의족의 단단한 감촉이 손아귀에 퍼져 나간다.

“몸이 이렇다 보니 남들보다 관심이 많았을 뿐이에요.”

리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작은 선생의 회로 다루는 기술과 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건 알고 있어. 그 예민한 감각에 기대를 걸어보는 거고.”

특수한 눈이 있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선을 예시로 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아서요. 그래서 살펴봤을 뿐이에요.”

“이상해? 뭐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그저…… 교수님이 본래 지니지 않은 무엇인가가 몸속에 있다는 느낌.”

“우리 같은 일반인은 느낄 수 없는 그런 건가.”

“쓸데없이 추상적이죠? 하지만 명확한 단어로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그렇게 보였을 뿐이니까.”

“작은 선생의 그 직감, 난 꽤 믿음직하다고 봐. 아까도 말했지만 신경을 다루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니까. 마나 친숙도와 별개로 흐름을 읽어내는 눈이 필요하지.”

리올라가 손을 툭툭 털었다.

“한동안 계속 방문 진찰할 예정이야. 학회장님께는 빚이 있거든.”

“저도 부탁드릴게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시고요.”

“말만으로도 고맙네.”

리올라가 발코니를 떠났다.

그녀가 남기고 간 희미한 담배 냄새가 바람에 씻겨 나갔다. 가하란은 안뜰 구석에 우뚝 서 있는 나무를 바라봤다.

“교수님.”

선을 건드리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이물질처럼 느껴지는 선이라고 한들, 멋대로 제거할 수는 없었다.

언뜻 보기에 불필요한 요소로 보이지만 사실 근간을 이루는 정보일 수도 있으니까.

해석이 필요했다.

선들이 품은 각자의 정보를 완벽하게 읽어 내야지만 연분홍 선의 정체를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으리라.

가하란은 눈가를 어루만졌다.

신경망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분별해내야 한다.

지난 몇 년간 목적의식이 없었다.

사람을 돌본다는 명분 뒤에 숨어 하염없이 일만 했다. 괴로움에서 무작정 도망만 친 것이다.

한 번의 깊은 잠.

그리고 대화.

여전히 가슴속에 무거운 돌이 남아 있지만, 지금은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교수님 덕분이었다.

그러니 보답해야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루드 팩토리 역시 교수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다.

혼란만 가득한 세상에 기술이라는 빛을 드리운 것도 덴스 교수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면 안 될 분이었다.

“방법.”

아버지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허망하게 떠나보내야 했다.

하지만 교수는 다르다. 눈앞에 있었다. 방법만 찾아낸다면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정보로 치환하는 이 눈이라면 미답의 지평을 들여다봐 답을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눈을 사용할 때마다 안압이 높아지고 온도가 올라 익어버릴 것 같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눈을 대가로 구할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덴스 교수는 앞으로도 많은 것을 해낼 사람이니까.

“그게 나은 선택이지.”

거실로 들어왔다. 침실 쪽에서 억누르는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인사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가하란은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용히 저택을 떠났다.

* * *

“여기도 진짜 엉망이 됐네.”

밀레나는 둔의 옛 풍경을 떠올리며 말했다. 반듯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계획 도시와 그 바깥을 구성하던 복잡한 마을 아웃라인.

정교했던 그 도시가 지금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흉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균열을 피해 건물을 올려야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팩토리는 어디쯤이야?”

“여관이 있던 자리. 아, 이렇게 말해도 감이 안 오려나.”

테리의 말에 밀레나는 주변을 훑었다. 이정표 삼을 만한 것들이 죄다 사라진 도로.

“앞장서. 옛날 그때처럼.”

밀레나는 테리의 등을 팍 치며 말했다.

가하란, 오랜만에 보겠네.

쾌활하게 웃는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다. 테리가 말한 대로라면 지금도 일에 파묻혀 지낼 테니까.

하지만 과거의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밀레나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채 걸음을 뗐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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