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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57화 (230/558)

제257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는 게 일상이 됐다.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아이처럼, 잠에서 깰 때면 언제나 심장이 두근거렸다.

잠이 불편해진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기피했다.

잠이 올 때마다 몸을 채찍질해 한계까지 몰았고, 육체가 버티지 못 해 기절할 때만 휴식을 허락했다.

가하란은 멀뚱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몸을 감싼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

오른손을 올려 가슴에 댔다. 쫓기듯 뛰어야 할 심장이 오늘은 얌전했다.

더없이 쨍하거나 흐리멍덩해야 할 시야도, 깔깔하거나 텁텁해야 할 입 안도 오늘은 멀쩡했다.

느리게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육체는 깨어났는데 정신은 아직 꿈 저편을 헤매는 것 같았다.

몇 분 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잔 건가.”

울렁거림이 없는 아침.

가하란은 침대에서 나와 커튼을 젖혔다. 해가 높이 떴다. 여전히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균열 옆으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탁자에 놓인 시계로 시선을 던졌다. 오후 1시. 분침이 살짝 움직일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마나 잔 거지?

뒤엉킨 머리를 쓸어 올리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머리가 파업 중이었다. 사건의 연속성을 담당해야 할 두뇌가 침묵해 버렸다.

단락만 듬성듬성 기억나고 전체가 잡히질 않는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더라?

차분하게 하나씩 돌이켜 봤다.

일 도중에 옷을 갈아입으려고 집에 돌아왔고, 마침 찾아온 교수님과 얘기를 하다가…….

“술.”

술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자마자 어둑어둑했던 기억이 빛을 되찾았다.

가하란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속에 든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것도 아버지의 죽음을 곁에서 본 분에게.

그 뒤에 덴스 교수가 무슨 말을 한 것 같지만,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인간아, 인간아.”

힘들다고 해서 칭얼거릴 나이는 지났는데. 손바닥으로 얼굴을 사정없이 비볐다. 대체 뭔 짓거리를 한 건지.

“이제 일어났네요?”

방문이 열리며 엔엔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가하란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엔엔 님이 절 침대에 눕혀준 건가요?”

“아니요. 덴스가 했어요.”

“교수님께 못난 모습을 보였네요.”

“덴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요?”

엔엔이 문틀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나와요. 밥 먹게.”

밥.

지난 몇 년간 배고픔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다.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원만 충당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뭔가를 입에 넣었을 뿐.

그랬었는데, 지금은 허기졌다. 한참 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한 침샘이 간만에 자기주장을 펼쳤다.

밖으로 나왔다. 바로 옆에 있는 식탁에 음식이 놓여 있었다.

누가 만든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니가 다녀갔나요?”

“네. 자고 있다고 하니까 몇 번이고 되묻다가 자는 얼굴 확인하고 나서야 돌아갔어요.”

“남의 방문을 멋대로 여는 건 좋지 않은 습관인데요.”

“정성스럽게 준비해준 음식을 보관함 안에서 썩히는 건 어떻게 생각하죠?”

할 말이 없었다. 엔엔 옆에 서며 그릇을 챙겼다.

“자, 먹어요. 오랜만에 배가 고픈 것 같으니.”

“티가 나나요?”

가하란은 포크를 쥐며 물었다.

“옛날부터 말하지 않았던가요? 가하란은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샐러드를 입에 넣었다. 아삭아삭한 식감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 건지.

새콤한 소스가 입맛을 돌게 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이내 무자비하게 포크를 움직였다.

몇 분간 말없이 음식만 먹었다.

맛이 주는 즐거움과 허기가 채워지는 충족감.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이었다.

배가 부르면 머리가 무거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버벅거리던 사고 활동이 이제야 정상화됐다.

“교수님께 신세 한탄만 늘어놓은 거 같아요.”

“그랬어요?”

“예. 자세한 건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아버지에 관한 얘길 떠든 건 기억나요. 못난 짓이었어요.”

“그렇다고 하기엔 덴스는 만족한 표정이었는걸요?”

“교수님께서요?”

엔엔이 포크로 토마토를 찍었다.

“어제, 집에서 나오는 덴스와 마주쳤어요. 아주 흡족한 얼굴이었죠. 무척이나 좋은 일이 있었던 것처럼.”

“평소에 안 드시는 술까지 사 오신 걸 보면, 분명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그것도 그렇지만 가하란이 걱정돼 찾아왔을 거예요.”

가하란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주변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알면서도 감정을 해소 못 하고 한심하게 구는 내가 미울 뿐이다.

“헤어질 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표정은 좋아 보였어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요?”

엔엔이 포크를 살며시 흔들었다.

“자기 자식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했다고요?”

“네. 아마도 술에 취해서 그런 것 같았어요. 인간종은 술에 풍덩 빠지면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요?”

“그렇긴 하죠.”

가하란은 물을 마시며 어제 일을 되새김질했다. 교수가 차분한 음성으로 무언가를 말한 것 같기는 한데,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이마저도 잘못된 기억일 수도 있었다.

“술은 정말 입에 대지 말아야겠어요.”

“정론이긴 하지만, 오늘 가하란의 상태를 보면 술이 꼭 나쁜 것 같지는 않네요.”

부정 못 할 말에 미소만 지었다.

“사람이란 게 웃기죠. 감정을 다스리는 건 이성이라 하는데, 사실은 몸 상태가 그 모든 걸 조종하는 것 같아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 자주 쓰는 격언에는 이유가 다 있는 법이죠. 그리고, 가하란의 상태가 좋은 건 잠 때문만은 아닐 거예요.”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께서 제 짐을 덜어 가셨어요. 아니지, 제가 편해지려고 교수님께 짐을 떠넘겼죠. 교수님도 힘드실 텐데.”

“혼자 끌어안지 마요. 인간종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건 서로 보듬어주기 위해서잖아요.”

“민폐잖아요, 교수님께.”

“덴스가 그 정도로 속 좁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말했죠? 기뻐 보였다고. 어쩌면 가하란이 의지해준 게 고마웠을지도 몰라요.”

“그랬을까요?”

“뭐, 사실 속마음이야 알 수 없죠. 입을 통해 진실을 듣기 전까지는.”

가하란은 빈그릇을 바라봤다.

얼마 만일까.

식사를 끝까지 마치고 음식을 깨끗하게 비운 건.

“교수님을 봬야겠어요. 어제 일도 사과드리고, 감사 인사도 전하고.”

“안 그래도 덴스가 다시 찾아온다고 했어요.”

“오늘도요?”

학회장은 놀고먹는 자리가 아니었다. 일부러 일을 만들고 있는 나와 다르게, 교수님은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상태일 것이다.

그런 분이 이틀이나 시간을 내다니.

“지금 가봐야겠네요. 먼 걸음 하시게 할 수는 없으니.”

씻고 옷을 챙겨 입었다.

팩토리는 밤늦게 가도 괜찮을 것이다. 쌓아둔 일 따위는 없으니까.

도심지를 가로지르는 전동차를 타려다가 생각을 바꿔 걷기로 했다.

도시 곳곳에 설치된 분배소와 그곳에서 뿌려지는 마전기. 일상적인 용어로 아직 마나라 불리고 있지만, 학회 내에서는 마전기란 호칭이 채용됐다.

“거기 뛰어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괜찮아요!”

아이들이 폭이 좁은 균열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 생긴 거대한 구멍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여전히 닫히지 않고 남은 것들이 있었다.

어긋난 단층면을 깎아내고 지대의 높낮이를 맞추는 작업을 시행했지만, 균열만큼은 손쓸 도리가 없었다.

아마 다른 곳도 상황은 비슷할 것이다.

건물 자재를 어깨에 인 거병이 줄지어 이동하고 있었다. 가하란은 하부 설계를 슬쩍 본 다음 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 덴스의 집이 보인다.

새롭게 지어진 시의회 건물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낮은 담 너머로 아기자기한 안뜰이 보였다. 아기자기해도 둔 내에서 저런 안뜰을 지닌 건물은 몇 채 없을 것이다.

가하란은 걸음을 멈췄다. 저택 앞에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넥타이를 맨 관료와 군복을 입은 군인, 거기에 상인회 쪽 사람도 보였다.

예나 지금이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의술사들도 몇 보인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출입구로 들어가려 했는데, 군인이 막아섰다. 학회장의 저택이라고는 하지만 군인이 경비를 설 이유는 없을 텐데.

“오늘은 방문객을 받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군인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요?”

대화가 단절됐다. 군인은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정문을 지키고 섰다.

“교수님을 뵈러 왔습니다. 안에 연락해주실 순 없나요?”

“말했다시피 오늘은 방문객을 받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정보 통제였다.

저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정문을 향해 걸어오는 군인이 보였다.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가하란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친구는 들여보내도 돼.”

그 말에 군인이 옆으로 비켜섰다.

가하란은 정문을 지나쳐 ‘루카’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무슨 일인가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마주칠 때마다 언제나 선한 웃음을 보여주던 아저씨가, 오늘은 얼굴을 굳힌 채 걸음을 뗐다.

안뜰에 선 사람들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 역시 사람들로 붐볐다. 저마다 바삐 움직이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조사 중이긴 하다만, 아무래도 사건은 아닌 듯 하다.”

“예? 그게 무슨…….”

루카가 멈춰 섰다. 가하란은 코앞에 있는 유단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형.”

“안 그래도 너한테 연락을 넣으려고 했는데.”

“대체 무슨 일이야?”

유단이 말없이 돌아섰다. 따라오라는 의미 같았다. 방문 앞에 선 유단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침대가 보였다. 곤히 잠들어 있는 덴스도 보였다.

“깨어나지 못하고 계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가하란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침대 곁으로 걸어가려 했다. 유단이 붙잡아 세우지 않았다면 교수의 손을 잡아봤을 것이다.

“아직 검사 중이야. 이상 소견은 아직 없다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설마…….”

의술사 말고도 군인이 와 있었다. 행정처 조사관들도 들락거리고 있고.

루카가 언급한 ‘사건’이란 단어가 머리에 맴돈다.

그때였다. 의술사의 상징인 검은 천을 목에 두른 여자가 다가왔다.

“수상한 흔적은 없었어요. 알려진 약물 반응도 없고. 마나분포도 역시 정상적이에요.”

“그렇다는 건…….”

유단이 힘겹게 물었다.

“저희는 급발성 오블리비언이라고 의견 합치를 봤어요.”

“교수님께선 평소와 다름 없으셨어요.”

“예, 그랬을 거예요. 급발성 오블리비언은 그라운드 제로 이후 발생한 증상인데, 기억 소실 없이 일상생활을 하던 분들이 하루아침에 혼수상태에 빠져요. 이후 깨어나면 단편적 기억 상실, 혹은 언어 기능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죠.”

“범행일 가능성은…….”

“현재로선 없어요. 군과 시의 합동 조사가 완전히 끝나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겠지만, 현 상태로는 학회장님께 갑작스러운 불행이 찾아왔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네요.”

침착하게 말을 끝맺은 의술사가 몸을 돌렸다. 바삐 움직이던 관료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그때였다.

군 관계자들도 무언가를 얘기 중이었다.

루카가 유단 앞에 섰다.

“침입 흔적은 없었습니다. 저택 내부 조사에서도 수상한 점은 없었고요.”

유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드신 거 알겠지만,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그래야죠. 저도 조사를 받아야 마땅하니.”

“그런 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프레나는 지금 어디에 있죠?”

“부하들이 곁에서 돌보는 중입니다. 안정을 되찾았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중령님.”

유단이 가하란을 바라봤다.

“찾아온 손님에게 미안한 부탁이지만, 여길 좀 지켜줄 수 있을까? 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

가하란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나 알지?”

“얼굴은 몇 번 봤어.”

“잘 좀 돌봐줘.”

그 말을 끝으로 유단이 떠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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