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망설이더라?
목소리에 눈을 떴다.
빛과 어둠이 버무려진 풍경이었다. 검고 흰 것들이 주변에서 이리저리 엉키며 회백색으로 변하다가 이내 깊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이해 못 할 풍경이었으나 유단은 안락함을 느꼈다. 본래 있어야 할 장소에 마침내 도착한 것처럼.
유단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인간의 몸을 입고 난 뒤로 몇 번이고 꿈을 꿨다. 아니, 사실 그게 꿈인지, 아니면 꿈과 비슷한 그 무엇인지 유단은 알 수 없었다.
단지 편의를 위해 꿈이라고 부를 뿐.
꿈은 맥락이 없었다. 개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의 연속.
유단은 내재된 기억들이 상충하며 일으킨 오류라고 생각했다. 몸에 각인된 기억과 본체에서 전송한 기억들이 서로 뒤엉키는 것이다.
유단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게 꿈이라면 곧 사건들이 일어날 것이다. 개입할 수 없는 일들이 눈앞을 순차적으로 지나가고 그걸 끝까지 지켜보면 꿈은 끝난다.
-들리는 거 아니야?
또다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색다른 경험이었다.
꿈의 형태가 바뀐 걸까?
그때였다. 희석된 빛과 어둠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 나왔다.
“기억인가.”
유단은 눈앞에 선 ‘유단’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옷차림 또한 똑같았다.
-새롭네, 새로워. 이렇게 만나니까 지독하게 반갑네.
유단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허상이다. 난립한 기억들이 제자리를 찾으면 사라질 망령.
-그 좋은 머리로 잘 생각해봐. 내가 허상인지, 아닌지. 아! 그리고 네 몸뚱이를 다시 살펴보는 게 어때?
몸뚱이란 말에 시선을 내렸다.
매끈한 곡선이 보인다. 청철로 만들어진 보호체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커넥터들.
-그게 원래 너잖아, 고철 덩어리.
“그렇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이게 나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징그러운 새끼. 제대로 좀 반응해봐.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내가 섭섭해.
‘로키’는 몸을 움직여 유단 앞으로 갔다.
-기계라 그런가, 팔다리도 없는데 적응을 잘하네.
“내 안에 있는 기억인가?”
-말은 똑바로 해. 내 안에 네가 있는 거야. 그 몸은 원래 내 거라고.
빙긋 웃던 유단이 어디선가 의자를 꺼내 왔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너 말이야. 주저하더라? 덴스를 죽이려 할 때 왜 망설였어? 그리고 그 약, 왜 그걸 쓴 거야?
로키는 의자에 앉은 유단을 바라봤다.
실체와 허상.
이제 중점은 실존 여부에서 벗어났다. 소통이 가능한 저 개체가 무얼 의미하는지, 그걸 파악해야 한다.
“단순한 기억이라면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해야 했는데, 그런 적은 없지.”
-내 질문은 무시하는 거야?
“시간이 흐르며 기억, 자료가 누적됐고 그에 따라 본래 개성이라 불러야 마땅한 나의 인격에도 변화가 생겼다.”
-몇 년 만의 대면인데 지랄 났네. 하지만, 난 너그럽게 기다려줄 수 있어. 지금 난 아주 기분이 좋거든.
기다림. 그리고 너그러움.
수많은 가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그중 가망성 없는 것들을 폐기하고 남을 걸 취합했다.
“제거하지 못한 위험 인자.”
-뭐라고 명명하든 그건 네 자유니까 상관하지 않을게.
유단의 몸으로 본체의 기억을 집어넣을 때, 미처 소거하지 못한 유단의 잔여물.
영혼, 심상세계의 주인, 무의식, 자아, 혹은 집념.
“의식 표면으로 부상했다는 건 나름의 대비책이 생겼다는 건가?”
-떠오른 게 아니라 네가 인식한 거야.
유단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바닥이 아래로 향하도록 손을 편 후, 왼손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다.
-나는 밑바닥에 있었어.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여기에 있었지. 온몸이 묶인 채 네가 느끼는 걸 그저 받아들이기만 했어.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었지.
실실 웃는 유단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눈알이 뽑힌 채 피부로만 세상을 느끼는 거야. 얼마나 기괴한 경험인 줄 알아?
로키는 유단의 말을 들으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정체불명의 공간 역시 의식을 기반으로 했을 것이다.
통제할 수 있다면 앞에 있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것도 가능할 터.
-허튼짓 그만해. 인간의 의지가 아무리 대단한들 의지만으로 자신의 심장 근육을 멈추게 할 순 없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지금 당장은 없애는 건 힘들어 보이네.”
-앞으로도 불가능해. 네가 내 몸을 강탈해서 바깥세상을 즐기는 동안, 나는 이 밑바닥에서 널 죽이려고 몇 년을 나뒹굴었어. 근데 안 되더라. 방법이 없어.
유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던 얘기 마저 할게. 처음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다고 했지?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재미있게도 점점 보이더라고. 네 시각을 공유하게 된 거야. 물론 시각뿐만이 아니야. 후각과 미각도 느리지만 내게 전달됐어.
유단이 두 손을 같은 높이에 두었다.
꺼림칙한 현상이었다.
제어불능 상태에 놓인 변수는 언젠가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 자리에서 해결하고 싶은데.
“널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너도 여전하네.
“거기서 떠들어봤자 변하는 건 없다. 몸의 통제권은 내가 쥐고 있으니까. 내가 온전한 유단이고 넌 찌꺼기에 불과하지.”
-찌꺼기. 틀린 말은 아니야. 지금도 너와 얘기할 수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무것도 못 하는 쓰레기니까. 근데 말이야, 조금씩이지만 변하고 있다는 걸 너도 알잖아?
주변에 깔린 빛과 어둠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오늘만 몇 번째 묻는 건지 모르겠네. 너 말이야, 망설였지?
로키는 유단의 눈을 바라봤다.
“불필요한 대화라 여겼는데, 아닌 것 같네.”
-난 방치할 수 없는 문제야. 그러니 진득하게 대화하는 편이 나을걸?
“그럴지도 모르지.”
로키는 어느새 생겨난 손과 발을 내려다보았다. 유단의 몸이었다.
-껍질은 네가 소유하고 있어. 하지만 정신은 아니야. 난 아직 여기에 있어.
유단이 손가락을 들어 머리와 심장을 가리켰다.
“인식하던 문제야. 정신체로 만들어 이 몸에 들어왔을 때부터 예상했던 것이고. 이렇게까지 명확한 의식을 지닌 채 나타날 거라곤 예측하지 못했지만.”
-모든 게 네 뜻대로 될 거라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야. 그게 기계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범주를 벗어나면 인식조차 못 하는 거.
유단이 다리를 쭉 뻗자 앞에 낮은 탁자가 생겨났다.
“여긴 네 의식 공간인가?”
-내 심상세계인 것 같아. 나도 정확한 건 알 수 없어. 하지만 내 의지에 반응한다는 건 확실해.
어둠과 빛이 한순간 달려들었다.
로키는 눈앞에서 휘몰아치는 빛과 어둠을 바라보았다.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던 배경이 코앞에서 버벅거렸다.
-널 죽이고 싶은데 안 된단 말이지.
“의식과 의식의 경계.”
로키는 손을 뻗어 일렁이는 빛과 어둠을 만져보려 했다. 하지만 손이 다가갈수록 빛과 어둠은 뒤로 물러섰다.
-아쉽긴 하지만 나쁘진 않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5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꽤 자유로워졌으니까.
“잠자코 있었으면 나 역시 깨닫지 못했을 텐데. 왜 위기를 자초하는 거지?”
-확신이 들었으니까.
“확신?”
유단이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네 번째 묻는 거야. 이젠 대답해줄래? 너 말이야, 왜 망설였던 거야?
로키는 허벅지에 올려둔 손을 까닥까닥 움직였다. 툭, 툭. 일정한 박자감으로 치며 유단을 바라봤다.
“말했다시피 나 역시 변화를 겪었다. 본체 시절에 이해했던 감정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니 전혀 다른 것이 됐어. 체험이란 건 꽤나 무서운 거였지.”
-덴스를 아끼던 그 마음에 거짓은 없었지. 하지만 넌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명백한 목표를 위해 거침없이 나아가야 하는 게 네 본분이잖아. 그게 기계의 성질이고.
“그렇지.”
-근데도 망설였어. 네 말대로 넌 변한 거야. 술에 섞은 약도 그래. 단숨에 죽일 수 있는 약 대신 식물인간이 되는 약을 선택했어.
“살려두는 편이 득이 된다고 판단했다. 덴스가 사망하면 이권 관리가 힘들어져. 하지만 의식이 없는 채 목숨이 붙어 있으면 혹시 모를 분쟁을 한동안 막을 수 있지.”
유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야. 납득할 수 있는 이유고.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잖아? 야, 로키! 내 앞에서는 거짓말할 수 없어. 알잖아? 나는 너고, 너는 나니까.
“아니. 너와 난 다른 개체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밑바닥에서 지켜본 내 생각은 달라.
유단은 손가락을 들어 왼쪽을 가리켰다.
-우린 말이야, 뒤섞이고 있어.
로키도 서로를 휘감고 있는 빛과 어둠을 바라봤다.
-지금이야 네가 우위를 점하고 있지. 인정할게. 하지만 이게 언제까지 유지될까?
유단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져 갔다.
-덴스를 죽일 때 넌 동요했어. 물론 줄리어스를 만나겠다는 목적을 위해 그놈을 처리했지. 하지만 예전의 너였다면 좀 더 깔끔하게 처리했을 거야. 아니,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하지도 않았겠지.
“인간의 몸을 입은 이상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게 존재해.”
-변명하지 마. 넌 이미 5년 전부터 삐거덕거리기 시작했어. 프레나, 이 이름을 들으면 어때?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의식과 별개로 몸이 반응해 버렸다. 로키는 멀거니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봤다.
-그거야! 그거! 너 진짜 인간다워지고 있어.
“필요한 일이었다.”
-맞아, 필요했겠지. 사회에 녹아들어야 하니까. 근데 그 덕분에 틈이 생긴 거 같아.
유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이렇게 나타나 위기를 초래하냐고? 그야 이래야 네가 더 동요할 테니까. 그 견고한 대가리에 흠집이 날 테니까.
“감정에 동요가 생길지언정, 내 목적 의식에는 변함이 없다. 난 줄리어스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지. 나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존재 증명을 끝냈으니, 이제 남은 건 어머니를 만나는 것뿐이야.”
-그 과정에서 프레나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실행할 뿐이다.”
유단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숨이 넘어갈 듯이 웃었다.
-너 말이야, 객관적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에 너무 길들어져 있는 거 아니야? 네가 기계였을 때는 자기 객관화를 위한 평가 기준이 있었겠지. 그 항목에 맞춰 점검하면 이상 유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겠고.
유단이 가까이 다가왔다.
검은색과 흰색이 휘몰아치는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하지만 넌 옛 기억조차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는 인간이 된 거야. 객관은 존재할 수 없어. 오직 자기 입맛에 맞게 변한 주관만이 널 이루지. 너도 알잖아? 인간이 인식하는 정보는 ‘나’라는 필터링을 마친 손상된 정보라는 걸.
유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면 이마저도 잊어버린 거야? 나는 네 안에 기생하며 많은 걸 깨달아 버렸는데, 넌…….
히죽 웃던 유단이 뒤로 돌아섰다.
-결론은 이거야. 열심히 해. 나 대신 아득바득 많은 걸 이뤄 놓으라고. 그래야 내가 몸을 돌려받았을 때 더 기쁠 테니까.
“그럴 가능성은 없다.”
-정말 그래? 그러면 다시 물어볼게. 5년 전, 왜 프레나를 죽이지 않은 거야? 넌 분명 인식했어. 감정의 동요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날 그 애를 죽였다면 모든 게 깔끔해졌을 거야. 근데 넌…… 풋, 아니다. 네 멋대로 해.
회백색 공간이 희미해져 간다.
유단의 모습도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로키는 다시금 몸을 내려다보았다.
피륙으로 이뤄진 살덩이가 내 몸인가, 아니면 차가운 금속으로 이뤄진 게 내 몸인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로키. 넌 5년 전에 프레나의 목을 꺾었어야 했어. 나였으면 그랬을 텐데.
그 말을 끝으로, 세상이 밝아졌다.
유단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혼재된 기억을 깊은숨과 함께 정리했다.
목덜미를 만져봤다. 까슬까슬하게 일어난 살갗과 식은땀.
진득하게 밀려오는 두통에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 학회장님!”
유단은 침대에서 내려왔다.
현실은 연산이 아니고, 틀렸다고 해서 수정할 수도 없다.
일은 시작됐다.
“가야지.”
유단은 숨을 고른 후 방문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