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55화 (228/558)

제255화

유단은 커피 잔을 들며 말했다.

“소리가 들렸어.”

“고양이처럼 소리 안 나게 걸었는데.”

“다음엔 모른 척할게.”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가까이 다가온 프레나가 커피 잔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게 맛있어?”

“줄까?”

“설탕 안 넣었잖아.”

“좀 넣었어.”

코를 킁킁거리던 프레나가 째려보기 시작했다.

“또 거짓말. 안 넣은 거 다 알아.”

유단은 어깨를 으쓱거린 후 말했다.

“무슨 일 있어? 밤에는 여기 안 내려오잖아.”

음침해서 싫다며 저녁 이후에는 연구실로 내려오지 않는 프레나였다.

“맞혀봐. 내가 왜 왔을까?”

“그냥 알려주면 좋겠는데.”

커피 잔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오늘도 프레나의 수수께끼가 시작된 모양이다.

“저번처럼 너무 어이없는 거라면 못 맞혀.”

“이번엔 쉬워. 그리고 오빠라면 다 맞힐 수 있어.”

“힌트는?”

“내가 이 시간에 여길 내려왔다는 거?”

“행동 자체가 힌트야?”

프레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전혀 모르겠는데.”

낙담한 얼굴로 프레나를 바라봤다. 사실 정답은 알고 있었다. 프레나가 빈손으로, 그것도 저녁 이후에 연구실을 찾아왔으니까.

“뭐야, 이미 아는 눈치네.”

“정말 모르겠는데.”

“또 거짓말.”

프레나가 계단을 가리켰다.

“빨리 와. 아빠가 오랜만에 일찍 들어왔어.”

“교수님께서?”

“끝까지 모른 척할 거야?”

“정말 몰랐다니까.”

웃으면서 앞장서는 프레나였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중간에 멈춰 서서 얼른 오라고 손짓한다.

“얼른!”

별거 아닌 행동과 말에, 유단은 연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5년 전 그날, 프레나를 죽였으면 어떻게 됐을까.

“후회했겠지.”

혼잣말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뭐라고 했어?”

“아니야, 아무것도.”

보고만 있어도 정겹다.

연구 말고도 가치 있는 것이 있다는 걸 저 아이를 통해 배웠다.

한때는 두려웠다.

프레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졌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감사했다. 고난이야말로, 위태로움이야말로 발전의 근간이었으니까.

“아빠 말이야, 좋은 일 있었나 봐.”

계단 끝에 올라서며 프레나가 말했다.

“좋은 일?”

“술 냄새가 잔뜩 나긴 하지만, 싱글벙글 웃고 계시거든. 그렇게 웃는 아빠 오랜만에 봐.”

거실로 들어섰다. 사용인이 자리를 비워 적적한 거실에, 덴스가 앉아 있었다.

낮은 원목 탁자에는 온갖 디저트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덴스가 사 온 건가?

멀리서도 풍겨오는 달콤한 냄새가 나쁘진 않았다.

“교수님.”

가까이 다가가 덴스의 얼굴을 확인했다. 프레나의 말대로 술에 취해 있었다. 그렇다고 정신을 놓을 정도로 마신 것 같지는 않았다.

“오, 왔구나. 앉아라, 앉아.”

평소보다 행동이 컸다.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유단을 의자에 앉혔다.

“아빠 술 많이 마셨지?”

프레나가 의자 뒤에서 덴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덴스가 프레나의 손을 살며시 쥐며 말했다.

“조금, 아주 조금 마셨어.”

“냄새가 엄청 나는데?”

“그렇게 많이 나?”

소매를 코에 대고 한참 냄새를 맡던 덴스가 이내 풋 하고 웃었다.

“그래, 아빠가 좋은 일이 있어서 좀 마셨어.”

“아빠 술 안 좋아하잖아.”

“오늘은 그 술이란 게 좋더라.”

“너무 좋아하진 마.”

“그래그래, 딸이 하는 충고는 새겨들어야지.”

셋이 둘러앉아 얘기를 나눴다.

특별한 주제는 없었다. 프레나가 화두를 툭 던지면 거기에 살을 붙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늘 있어온,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다. 유단은 이런 시간도 나름 좋아했다.

푸딩을 입에 물며 우물거리던 프레나가 크게 하품했다.

“아빠랑 오빠는 더 이따가 잘 거지?”

평소처럼 프레나가 먼저 일어났다. 간식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워 만족한 얼굴이다.

“오랜만에 아침 같이 먹자. 아빠가 준비해줄게.”

“아빠 요리 못하잖아.”

“그래서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니야. 대신 평가는 냉정하게 할 거니까 실망하면 안 돼.”

짓궂게 웃으며 2층으로 올라가는 프레나였다.

“학회에서 좋은 소식이 있으셨나 봐요.”

프레나의 발소리가 멎길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이라.”

덴스가 느린 숨을 뽑아내며 상체를 숙였다. 지워질 것 같지 않던 미소가 그 순간 사라졌다.

유단은 손에 든 쿠키를 내려놓았다.

“교수님?”

“미안하다.”

“예?”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머리는 연구 자료를 정리할 때만큼 차분해졌다.

“무슨 일 있으셨나요?”

“일. 그래, 일이 있었지. 그것도 5년 전에.”

그라운드 제로.

유단은 곁눈질로 계단을 살폈다. 프레나가 들어선 안 될 내용 같았다.

“내 욕심 때문에 그 아이한테 몹쓸 짓을 했어. 그리고 이제 그 대가를 받게 되겠지.”

“교수님. 말씀을 아끼시는 것이…….”

덴스는 불안정해 보였다. 지성적인 인간도 술에 의해 이성의 끈이 느슨해지면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이다.

지금 덴스는 아주 위험한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

몹쓸 짓, 그리고 대가.

정확한 사정 따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저 알고 싶지도 않은 사정 때문에 덴스의 지위가, 구축한 환경이 망가질 가능성이다.

덴스는 앞으로도 든든한 배경으로 남아야 한다. 그의 지원 없이는 연구를 이어 나갈 수 없으니까.

인간은 무결할 순 없지만, 결점을 숨길 수는 있다. 덴스가 무슨 잘못을 했든 간에 5년 전 일이라면 숨겨야 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이젠 내가 지옥으로 들어갈 차례야. 그 아이를 끄집어내고.”

“교수님. 일단 주무시고 난 후에 말씀하시죠.”

술이 깨고 나면 이성이 말고삐를 쥐게 될 거고, 죄책감 역시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덴스는 욕심을 이해한 남자였다. 야욕을 품은 인간이었다.

시답잖은 감정 문제로 쓰러져선 안 될 인간이다.

하지만.

“유단, 너에게만큼은 먼저 말해두고 싶구나. 그래야 프레나를…….”

넋두리와 함께 기어이 죄를 고백하는 덴스였다.

몇 분이 지났을까.

모든 걸 토해낸 덴스는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내일이면 모든 게 바뀔 거다. 여기서도 쫓겨나겠지.”

“교수님. 프레나를 생각하신다면…….”

올란트의 죽음을 방관하고 올란트의 지식을 훔쳤다.

이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난 일이고 잘 숨겨온 일이었다.

진실을 아는 유일한 인간이 입을 잘 닫고 있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사건이었다.

도덕률에 입각해 철 지난 양심을 찾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게 인간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하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지금 밝혀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되도록 늦게, 가능하면 영원히 묻혀야 할 사실이었다.

“그렇게 변명하며 5년을 보냈다. 내 욕심이었어.”

덴스의 눈은 굳건해 보였다. 취기가 가신다고 해도 결심은 변하지 않으리라.

숨겨야 할 진실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털어놓았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은 것이다.

“유단, 프레나를 부탁하마.”

덴스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는 속죄해야 한다. 내가 누려왔던 걸 다 내려놓고 마땅한 처분을 받아야 해.”

“정말 그렇게 하실 겁니까?”

마지막으로 설득해보려 했다. 공표하기 전에, 손 쓸 수 없어지기 전에.

“이미 다녀온 길이다. 가하란한테.”

“전부 말씀하셨나요?”

“말하긴 했지만, 그 아이가 듣지 못했지. 취해서 잠들었거든. 하지만 덕분에 마음이 정리됐다. 털어놓고 나니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어.”

서서히 고개를 드는 덴스였다.

여리디여린 눈. 오랫동안 봐왔던 연구자의 눈이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닳고 닳아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태.

“솔직히 말하면, 이제 숨기는 것도 한계에 달했다. 나는… 살고 싶어서 고백하는 걸지도 모른다. 속죄라는 명목하에 편히 자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이 또한 그 아이가 겪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한계에 달한 건가.

인간이 소유한 망각은 참으로 제멋대로였다. 분명 잊었다고 생각한 걸 어느 날 갑자기 또렷하게 되살려 버리니까.

기계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인간의 몸에선 반복해서 일어난다.

반복된 과정에 덴스는 지쳐버린 것이리라. 지친 인간은 모든 걸 포기하기 마련이고.

“결심하셨군요.”

“그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유단은 잠시 생각했다.

다시 연구 환경을 조성하고 자금을 조달받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줄리어스와 만나기까지, 가야 할 길이 멀다. 여기서 머뭇거릴 순 없었다.

유단은 한숨을 길게 내쉬는 덴스를 바라봤다.

심장이 요동친다. 효과적인 방법을 실행하기에 앞서, 감정을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이성과 감정이 뒤엉켜 있다는 건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해야 할 일이 명확한데 머뭇거리는 또 다른 내가 있다.

“교수님. 전 교수님께서 어떤 선택을 하든, 교수님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뒷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집어삼키는 덴스였다.

“내일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아니요. 제가 그러고 싶습니다.”

유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하실로 갔다.

연구실 구석 서랍을 열어 자그마한 약병을 챙기고, 올라오는 길에 술병도 하나 손에 쥐었다.

“한잔 드려도 될까요?”

우두커니 술병을 보던 덴스가 이내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너랑 이렇게 마주 앉아 마셔본 적이 없구나.”

“둘 다 술을 안 좋아하니까요.”

“그래, 술보단 커피만 마셔댔지.”

잔에 술을 따랐다. 잔에 미리 넣어둔 약이 술과 하나가 됐다.

유단은 술잔을 덴스 앞에 놓았다.

“많은 게 변하겠지만, 이것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다.”

덴스가 잔을 들었다.

“너와 프레나, 둘 다 내 소중한 가족이라는 거.”

덴스와 눈이 마주쳤다. 유단은 발작하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움켜쥐었다.

붙들지 않으면 오른손이 튀어나가 저 술잔을 쳐내버릴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덴스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술을 단숨에 마신 덴스가 기분 좋게 웃었다.

“아들이 술을 따라준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덴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유단의 머리를 그리고 어깨를 툭툭 매만졌다.

“곧게 자라줘서 고맙다. 널 두고 먼저 떠난 그 친구도 기쁘게 생각할 거다.”

말을 마친 덴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유단은 덴스를 부축했다.

“들어가 주무시죠.”

“그래, 그래야겠구나.”

침대에 덴스를 눕히고 베개 높이를 조절했다. 가까이서 본 덴스는 5년 전보다 확실히 늙어 있었다.

유단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덴스를 바라봤다.

몸의 떨림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덴스의 숨이 점점 느려지는 게 보였다. 유단은 어금니를 물었다. 진한 피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유단…… 다음에 또 같이 술을……”

“예, 교수님. 그렇게 하시죠.”

“무척이나 졸립구나. 미안하지만, 먼저 자야…….”

고르게 숨을 쉬는 덴스였다.

턱이 와들와들 떨렸다. 유단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을 흘려보냈다.

얼마간 그러고 있었을까.

유단은 얼굴을 닦아냈다. 그리고 침대 위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 그 안에 있었다.

“고마웠습니다, 아버지.”

거울을 뒤집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오는 길에 프레나와 마주쳤다. 졸린 얼굴로 눈을 비비고 있었다.

“아빠는?”

유단은 옅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주무셔.”

“무슨 얘기 했어?”

“별거 없어.”

“거짓말.”

“내일 제대로 얘기해 주신다니까 그때 들어보자. 오늘은 많이 취하셨어.”

작게 하품한 프레나가 손을 흔들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유단은 굳게 닫힌 침실을 바라보다가 지하실로 내려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