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54화 (227/558)

제254화

시간이 무르익어 간다.

의식적으로 배제해버린 혐오감이 자신의 존재를 끝없이 알려오지만, 덴스는 이 짧은 충족감과 행복을 위해 고백을 뒤로 미루었다.

“마나 고유 파장. 파형에 따른 대역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면 원거리 통신도 꿈은 아닐 거예요.”

가하란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취기가 가득 오른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저 아이 역시 상실감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채 이 시간에 몰두하고 있었다.

“통신도 통신이지만 배터리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 거다.”

“분배소 없이도 마나 충전이 가능할 테죠. 고유 파장값만 정확하게 알아두고, 수신 회로만 배터리 안에 넣어두면 세계 어디서든 자유로이 마나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꿈만 같은 일이지.”

덴스는 음식에 손을 뻗었다. 구운 닭고기를 새콤한 소스에 버무린 건데, 이름은 몰라도 안주로 제격이었다.

“하지만 고유 파장을 다루는 건 여전히 조심스러워. 값이 어긋나 기능이 멈추게 되면 연쇄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테니까. 또한 마나는 자연 발생하는 힘이라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변수가 있지. 기껏 파형값을 얻어 장비를 세팅했는데, 그 값이 변해버리면 난리가 날 거다.”

“인위적으로 마나를 생성할 수 있다면 파형을 제어할 수 있고, 안전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겠죠?”

“인위적인 마나라. 그게 현실화된다면 지상의 모든 종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겠지. 지금의 마법공학은 길가의 돌멩이처럼 변할 거다. 상상만으로도…….”

도달 못 할 이상향이 주는 쾌감에 취해 있을 때였다.

가하란이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분명 재미난 아이디어를 내셨을 거예요. 아버지는 항상 기발한 발상을 해내셨거든요.”

술잔을 쥐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손톱만 한 얼음 한 개가 등을 훑고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금방 녹아서 사라지지만, 의식을 일깨우고 현실을 깨닫게 하는 데 충분한 크기.

술잔을 놓고 물을 마셨다.

후틋한 숨이 술 냄새를 휘감고 빠져나왔다.

억지로 잡아두었던 시간이 다시 제 일을 시작한 것 같았다.

덴스는 두 손을 맞잡았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작은 떨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이제 진실을 고백해야 한다.

고백.

진실.

목 안쪽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지금이라도 당장 웃는 얼굴로 작별을 고하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지난 5년간 그래왔듯, 문턱 앞에서 몸을 돌려 다시 안식으로 녹아들고 싶었다.

선을 넘으면 모든 게 끝날 것이다.

그걸 버텨낼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죽음에 몰리는 그 사태를 이겨낼 수 있을까?

여기서 둘러댄다면 마음의 짐만 덜고 학회장이란 지위는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좀 더 서둘렀다면 네 아버지를 구했을 텐데. 미안하다, 가하란.

이 정도로만 말하면 죄책감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것이다.

실수였다는 듯이, 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뉘앙스로 말한다면 가하란 역시 이해할 것이다.

어쩌면 위로해 줄지도 모른다.

힘드셨겠어요, 하면서.

시기심에 눈이 멀어 올란트의 손 대신 노트를 잡았다는 진실을 유폐하고, 분배소가 올란트의 발상이었다는 사실만 삭제하면 어제와 똑같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짐을 덜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5년간 속여왔다.

인간 덴스는 그런 놈이다.

역겨운 죄악감을 꽁꽁 싸매 가슴에 품은 채로 만인 앞에서 웃고, 지식을 자랑하며 세상을 이끌어 나갈 마에스트로로 올라섰다.

한 명 더 속인다고 그렇게까지 힘들어질까?

어쩌면 내일, 아니, 지금 이 자리만 모면하면 죄책감마저 훌훌 털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 덴스가 아닌 평범한 괴물이 되는 것이다.

친우의 지식으로 살을 찌우고, 그 자식의 슬픔으로 점점 커가는…….

“저 때문이에요.”

고개를 숙인 채 잠든 것처럼 보였던 가하란이 툭 말을 내뱉었다.

그건 짐작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육성으로 듣지 못했던 가하란의 진심이었다.

“저 때문이에요.”

가하란이 식탁에 엎어졌다.

“제가 그때 아버지께 말했어요. 꿈을 이루라고. 꿈을 좇으라고.”

“가하란.”

웃음도 울음도 없는, 아니,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때 붙잡았다면, 그랬다면 살아 계셨을 거예요. 지금도 제 옆에 계셨을 테죠.”

“결정한 건 올란트다.”

“아니요. 제가 부추긴 거예요. 그날 아버지는 분명하게 말했어요. 둔에 남겠다고. 제가 허튼소리만 안 했어도 살아 계셨을 겁니다.”

가하란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술잔을 바라봤다.

“꿈. 예, 빌어먹을 꿈. 언젠가 유단 형이 말했었어요. 꿈만큼 쓸모없는 단어도 없다고. 그때 그 말을 새겨들었어야 했어요. 이상을 좇는 일 따윈 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냥……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이…….”

실소를 연이어 터트리며 손을 휘적거리는 가하란이었다. 잔에 담긴 술이 식탁 위로 뿌려졌다.

“죄송해요.”

“아니다.”

덴스는 흩뿌려진 술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 술이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아직, 인간인 덴스가 그곳에 있었다. 가하란을 가엾게 여기는 내가 그곳에 있었다.

가하란을 벼랑으로 몰아넣은 건 저것이었구나. 지독한 자책감에 단 하루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을 것이다.

5년.

내가 알량한 죄악감에 허덕이는 척하며 실익을 챙기고 있을 때 이 아이는 지옥에 혼자 남아 있었다.

몸의 떨림이 멎었다.

아려오던 배의 통증도 사라졌다.

정신이 맑아지고 사물들이 또렷이 보였다.

덴스는 정면을 바라봤다. 엎어져 숨을 고르는 가하란을 바라봤다.

“할 얘기가 있다.”

5년간 회피해왔던 이야기가 입 안에 올랐다.

덴스는 고개를 숙였다. 비겁하게도 가하란의 눈을 보며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날, 난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었다. 연구동이 무너지기 직전, 올란트가 내 앞에 있었다. 그놈은 벼랑에 손을 걸치고 있었고 나는 그걸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시작하고 나니 이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한 감도 있었다.

내일이면 분명 후회하겠지만, 으스러져 가는 저 아이에게 더는 숨길 수 없었다.

벌을 받아야 하는 건 가하란이 아니라 나니까.

“난 네 아버지를 구하는 대신 연구 성과를 택했다. 내가 개발한 것으로 되어 있는 분배소. 그건 올란트의 작품이었다. 탐이 났다.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네 아버지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핏줄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5년이나 입 다물고 있었던 거, 사과할 자격도 없겠지. 용서를 바라지도 않는다.”

품 안에 손을 넣어 수첩을 꺼냈다. 올란트의 빛나는 지식이 이 안에 들어 있었다.

“너라면 이걸 기반으로 더 많은 걸 개발해낼 수 있겠지.”

얼굴을 든 다음 엎어져 있는 가하란 앞에 수첩을 놓았다.

“내일, 학회에서 모든 걸 말할 거다. 네가 무얼 요구하든 다 받아들이마. 하지만…….”

덴스는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간신히 다잡은 다음 말을 이었다.

“염치없다는 건 알고 있다.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이룩한 걸 모두 가져가도 상관없으니…….”

덴스는 뒷말을 내뱉지 않고 가하란을 유심히 바라봤다.

“가하란?”

엎어진 가하란을 살며시 건드렸다. 옆얼굴이 살짝 보였다. 눈을 감은 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덴스는 흔들어 깨우려다가 그만뒀다.

얼마 만에 찾아온 잠일까.

술의 힘에 기댔다고 한들, 분명 달콤한 잠일 것이다.

덴스는 수첩을 챙기고 가하란을 부축했다.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다음 방문을 닫았다.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제 술은 필요 없어졌다.

“내일 다시 오마.”

세간에 알리는 것보다 가하란에게 말하는 것이 먼저다. 내일 다시 한번 진상을 알리리라.

현관을 벗어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형일을 선고받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온갖 것을 핑계로 뒤로 미룰 게 아니라.

“가는 건가요?”

집 앞에서 엔엔과 마주쳤다.

“예.”

“볼일은…….”

“내일 다시 올 겁니다. 오늘은 가하란을 쉬게 해주고 싶거든요.”

덴스는 집을 돌아보며 말했다.

“술에 취해서 잠들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자는 게 저놈한테 도움이 되겠죠.”

덴스는 엔엔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옆을 지나쳤다. 뒤에서 엔엔이 말했다.

“고마워요.”

고맙다는 그 말에 덴스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내일이 되면, 고맙다는 저 말은 저주가 담긴 말로 변해 돌아올 테니까.

덴스는 몇 걸음 걷다가 엔엔을 돌아봤다.

“엔엔 님.”

“네.”

“제 자식들,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세요.”

염치없는 가장의 부탁.

엔엔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이면 깨닫게 될 테니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 * *

유단은 목 뒤쪽을 주물렀다.

피로감은 언제나 목 뒤에서 시작된다.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커피가 담긴 잔에 손을 뻗었는데, 말라버려 잔여물만 남은 상태였다.

거실로 나갔다.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는 커피를 무심히 바라보다가 잔에 옮겨 담았다.

“본체가 있었다면.”

그라운드 제로와 함께 지하 저 밑으로 사라져버린 본체.

그 안에는 정돈된 자료와 기억들이 보관돼 있었다.

유단의 몸 안쪽에 본체의 기억을 욱여넣었지만, 인간의 몸은 기억 구조가 달라 원하는 자료를 제때 불러올 수 없었다.

5년이란 시간 동안 내면의 자료를 끄집어내 정리 중이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우선적으로 알아내야 할 건 마나포집의 기본 구조인데,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가 개발해낸 건데 이걸 잊어버리다니.

마나포집의 단초를 잡아내 연구한다면 본체 시절에도 이해하지 못했던 마력선 짜맞춤, 연결망의 골자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몸을 빌렸기에 시간이 독이 되어버렸다. 기계였을 때 시간은 변화의 단위일 뿐, 그게 목숨을 조여오진 않았다.

물론 상황이 최악인 건 아니었다.

인간의 뇌.

기계를 탄생시킨 이 뇌는 본체 시절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발상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본체 때는 ‘어머니’의 논리 구조를 이해 못 했으나 지금은 가능할 것이다.

같은 인간종이니까.

최고의 연구 환경을 받았으니 조급해 말고 천천히 나아가면 된다.

“몇 년이 걸리든 이 환경이라면.”

덴스는 정말 이상적인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와 연구하는 것 또한 즐거웠다.

아버지라는 낯간지러운 감정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질 정도.

양자로 받아들인 적도, 자식이라 불린 적도 없지만 세월이 관계를 그렇게 정립해 버렸다.

인간으로 재탄생한 이상 관계는 맺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맺음이 싫지는 않았다.

감정은 약점이자 나약함의 상징일 수도 있으나, 변혁과 진보의 시작일 수도 있다는 걸 이제는 깨달았다.

진한 커피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바로 고개를 돌려 살금살금 걸어오는 아이를 바라봤다.

“어떻게 알았어? 놀래주려 했는데.”

프레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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