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53화 (226/558)

제253화

가족을 잃은 슬픔.

그건 위로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5년 전 사태는 많은 걸 앗아갔다. 밀레나 역시 사람을 잃었다. 오랜 세월을 같이 해온 사람을.

눈앞이 새카맣게 변하는 상실감. 어떤 언어를 끌어다 써도 마음의 공백은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시간에 치유받는 동물이다. 망각은 슬픔을 옅게 만들고, 새롭게 받아들인 기쁨으로 허무함을 지워 나간다.

5년.

가하란처럼 총명한 애라면 슬픔에서 허우적거리던 몸을 추스르고 내일을 준비하기에 충분했을 시간일 텐데.

그러지 못하고 과거에 붙들려 있다는 건…….

“자책감.”

테리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미안. 괜한 말을 했네. 내가 그 녀석을 대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쓸쓸함이 얼굴에 묻어난다. 친형제 못지않았던 두 사람 사이에도 끝내 풀어내지 못한 일이 있는 건가?

“내가 직접 얘기해 봐야겠네. 네 말대로 이런 건 본인을 통해 들어야지.”

“직접 얘기해 본다고?”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둔으로 가는 길이야. 가하란, 아직 둔에 있는 거지?”

“어. 둔에서 벗어난 적이 없지.”

“됐네. 만나서 들어보면 되겠네. 대화를 피한다면 술이나 한잔 사주고.”

“그래. 그게 좋겠네.”

그제야 웃음을 짓는 테리였다.

“걔, 술 좀 마시나?”

“아니.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벌겋게 변해. 아직 애야.”

“아마 열셋이었지? 그 정도면 다 컸지 뭐. 요즘 같은 세상에선 말이야.”

밀레나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샬롯을 바라봤다.

“가하란을 아는 눈치던데.”

“안다고 해야 하나, 모른다고 해야 하나.”

“알면 아는 거고, 모르면 모르는 거지 그 애매한 답은 뭐야?”

“꿈에서야 여러 번 봤지만 실제로 만난 건 아니니까요.”

얘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꿈에서 봤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샬롯이 뚱한 눈빛으로 응대했다.

“그렇게 보지 마요. 진짜니까. 진짜로 걜 만났어요. 이름도 걔가 말해줬고요.”

“꿈이라며?”

“꿈인데! 아이, 됐어요! 이건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요.”

신비한 힘만큼이나 별난 애였다. 1년 전에 봤을 땐 침울한 애였는데, 캐릭터가 참 많이 변했다.

“4반 들어와! 안쪽부터 긁어낼 거니까. 뼈가 생각보다 더 크니까 자루 더 준비하고.”

용병들이 입가에 천을 두르고 갈라낸 마수 곁으로 걸어갔다.

“일단 저것부터 처리하고 마저 얘기하자.”

“발골하는 거라면 나도 도울 수 있어. 배터리도 넉넉하고.”

테리가 거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멀리서 율과 에단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밀레나는 손가락으로 샬롯을 가리킨 후 작업용 도구를 손에 쥐었다.

마수 사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살을 저며내고 뼈를 발라내는 게 죽이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리니까.

“밀레나! 이쪽 좀 거들어라!”

하우스가 누런 살점을 끌어당기며 외쳤다.

“네, 금방 가요!”

* * *

엔엔은 아릿한 눈가를 문지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깨울 수 없는 건가.”

카트시의 본체를 며칠째 들여다보고 있지만 성과가 없었다.

마나회로를 보호하는 외부체에도, 마나회로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다.

역시 이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가하란뿐인가.

인간은 물론 다양한 종들이 새로운 회로 기법을 만들어냈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술적 진보를 이뤄냈다.

도약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지식이 오래된 허물을 벗고 새 지평을 열었다. 과거의 산물은 고철 취급해도 될 만한 수준이었다.

환경이 이만큼이나 바뀌었는데 카트시의 근본은 여전히 해석 불가였다.

세상이 격변해도 줄리어스가 이룩한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경이로울 따름이다.

엔엔은 방에서 나왔다. 맞은편에 있는 가하란의 침실이 보인다.

오늘도 가하란은 들어오지 않았다. 또 어디서 긴 밤을 눈 뜬 채 지새우고 있는 걸까.

요 며칠간 지켜본바, 가하란은 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안락에 잠기는 그 순간을 몸서리치게 싫어하는 것이다.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육체의 피로를 이겨내는 상황. 바람직한 상태는 아니었다.

가끔 기절하듯 쓰러졌다가 일어서는 게 가하란의 잠이었다. 그걸 잠이라 불러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계셨어요?”

가하란이 들어왔다. 양손에 뭘 잔뜩 들고 있었다. 서류에 음식에 어린애들이 가지고 놀 법한 나무 장난감까지.

“식사는요?”

가하란이 물었다.

“먹었어요. 가하란은요?”

“전…….”

가하란이 짐을 내려놓고 작은 과일 하나를 손에 쥐었다.

“이걸로 한 끼 해결하면 돼요.”

“제니가 음식을 가져왔어요.”

엔엔은 냉장 보관함을 가리켰다. 가하란은 보관함을 살피지도 않고 대답했다.

“입맛이 없네요.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드세요. 입에 맞으실 거예요.”

“저 먹으라고 준 게 아니라 가하란 먹으라고 준 거예요.”

“네, 알아요. 제니한테는 먹었다고 말해둘게요.”

침실 쪽으로 걷던 가하란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엔엔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갔다.

하고 싶은 말이 입 안에 가득 차올랐다. 볼을 톡 건드리기만 해도 쏟아져 나올 기세였다.

가까이서 가하란의 얼굴을 봤다. 흐리멍덩한 눈과 마주했다.

“……몸 관리해요.”

온갖 문장을 버리고 깎아낸 다음 겨우 한 마디 했다. 방향을 잃은 저 눈동자에 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엔엔은 알 수 없었다.

“괜찮아요. 발을 헛디뎠을 뿐이에요.”

괜찮아요.

가하란과 만나고 난 후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다. 엔엔은 알고 있었다.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인간치고 괜찮은 자는 없다고.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갈 거예요.”

“쉬는 게 어때요?”

“약속이 있어요. 이제 막 의수를 부착한 애인데, 아직 적응 못 하나 봐요. 제가 가서 봐줘야 해요.”

“기계적 결함이 생긴 게 아니라면 가하란이 봐줄 필요 없어요. 적응은 시간이 필요한 거지 기술 지원이 필요한 건 아니에요.”

“무서울 거예요. 내 팔이 아닌데 내 의지대로 꼼지락대니까. 옆에서 잘 설명해주면 그 애도 진정하겠죠.”

쉬면 안 되는 이유를 필사적으로 찾는 것 같았다. 바퀴벌레가 아프다며 도움을 요청해도 가하란은 흔쾌히 몸을 움직일 것이다.

“카트시는 어때요?”

가하란이 물었다.

“여전히 반응이 없네요.”

“저녁에 같이 살펴봐요. 계속 들여다보면 뭐라도 나오겠죠.”

침실 문이 닫혔다.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대에 눕는 소리는 아니었다.

정말로 옷만 갈아입고 또 나가려는 모양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 생활을 유지하려는 걸까. 걱정을 담아 방문을 바라볼 때였다.

똑똑, 손님이 찾아왔다.

“가하란, 나다.”

익숙한 목소리가 현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엔엔은 문을 열고 방문객을 바라봤다.

“오랜만이에요.”

밖에 서 있는 덴스를 보며 말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손에 종이봉투가 들려 있었다.

“엔엔 님. 도시로 돌아왔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여기 계셨군요.”

덴스가 안쪽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가하란은…….”

“안에 있어요.”

“오늘은 얼굴 볼 수 있겠군요.”

덴스에게 눈짓한 후 안으로 들어왔다. 가하란과 가까운 사이이니 들인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으리라.

침실을 향해 말을 꺼냈다. 덴스 교수가 왔다고.

“아, 이제는 학회장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엔엔은 덴스 맞은편에 앉았다. 덴스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봉투를 식탁에 올려놨다. 안에 든 건 술병이었다.

“교수든 학회장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직함이 아니니.”

“그 술은…….”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오늘은 필요할 것 같아서요.”

가하란이 문을 열고 나왔다.

“교수님, 어쩐 일이세요.”

“별일은 없고 그냥 왔다.”

덴스의 얼굴과 술병을 살피던 가하란이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이걸 어쩌죠? 제가 약속이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해요.”

“그러냐?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너 바쁜 거야 도시 사람들이 다 아는 거니까.”

덴스가 멋쩍은 손길로 술병을 만졌다. 엔엔은 두 사람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가하란, 그 애 어디에 살죠?”

“예?”

“내가 대신 갈게요.”

“아니에요, 엔엔 님. 그러실 필요 없어요.”

괜찮다고 둘러대는 가하란에게 눈짓을 주었다. 저항하듯 한동안 멀거니 서 있던 가하란이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주소 적어 드릴게요.”

엔엔은 쪽지를 받고 일어섰다.

“얘기들 나눠요. 난 여길 다녀올 테니. 루드 팩토리에서 왔다고 하면 되겠죠?”

고개를 끄덕이는 가하란이었다.

엔엔은 덴스와 시선을 교환한 후 집을 나섰다.

가하란과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나, 같은 종이 아니기에 감정적으로 이해 못 하는 영역이 분명 있을 것이다.

같은 종끼리 대화하면 좀 낫겠지.

엔엔은 덴스가 역량을 발휘해주길 기대하며 쪽지에 적힌 장소로 이동했다.

* * *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데 서로 얼굴 보기가 참 힘들구나.”

“죄송해요. 제가 인사를 자주 드렸어야 하는데.”

덴스는 고개를 저었다.

“탓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내 잘못이지.”

병마개를 열었다. 독한 주향이 올라왔다. 평소에 마시는 가벼운 과실주와는 향부터 달랐다.

몇 모금 마시면 세상이 빙글빙글 돌겠지.

취기에 잠기는 걸 혐오하지만, 오늘은 술의 힘이 필요했다. 나한테도, 그리고 가하란한테도.

“한잔할래?”

“전…….”

머뭇거리는 가하란이었다. 덴스는 자그마한 잔에 술을 따랐다.

“오늘은 마셔야 할 거다.”

“술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억지로 마셔야 해.”

먼저 잔을 꺾었다. 지독한 향과 쓰라린 맛. 목구멍이 줄로 감아 챈 것처럼 조여 온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하란도 이내 술을 마셨다.

“더럽게 맛없구나.”

“예. 정말 끔찍한 맛이네요.”

몇 분 동안 말없이 술병만 봤다.

얼굴이 뜨끈해졌다. 가하란도 터질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잠은 여전히 못 자는 것 같구나.”

“……안 자는 게 속 편하니까요.”

겉치레로 짓던 웃음이 어느덧 사라져 있었다. 무뚝뚝하게 술잔만 보는 가하란이었다.

5년 전 해맑게 웃던 꼬마는 어디로 갔을까.

덴스는 속이 뒤틀리는 걸 느꼈다. 혐오감에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걸 발설하고 싶었다.

네 아버지를 죽인 건 나라고, 욕심에 눈이 멀어 손을 내밀지 못했다고.

혀가 바짝 말라간다.

덴스는 다시 한번 술을 따라 입에 털어 넣었다. 끔찍했던 술맛이 이번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 끔찍한 술맛도 내 추악한 내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왼손을 코트 안쪽으로 넣었다.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수첩을 매만졌다.

이 안에, 올란트가 남긴 지식이 적혀 있었다.

올란트의 유산.

나를 마에스트로로 만들어준 지식의 결정체.

이제는 털어놓아야 한다.

이제는…….

“교수님?”

덴스는 수첩에서 손을 뗐다.

용기가 나질 않는다. 술의 힘이 더 필요했다.

“오늘은 좀 취해보자.”

덴스는 가하란의 술잔에 술을 따라줬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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