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2화
가까이서 올려다보니 까마득하게 높긴 하다.
밀레나는 에단의 말을 상기하며 녀석의 전면부를 살폈다. 저 위, 물컹거리는 살집에 흰 점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흰 점은 바삐 움직이다가 한곳으로 모였는데, 그때마다 마수가 발버둥 쳤다.
“샬롯! 저기로 올려 보낼 수 있겠어?”
뒤따라온 샬롯에게 물었다. 샬롯이 두 손을 활짝 펼쳤다.
“지금 바로 할까요?”
“머뭇거릴 이유는 없지.”
그라운드 제로 이전만 해도 마법사들의 마법은 스크롤을 통해서만 발현할 수 있는 경직된 체계였다.
스크롤 없이 마법을 사용하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던 시대.
하지만 지금 정형화된 방식이란 게 사라져 버렸다.
기존처럼 스크롤을 이용해 마법을 쓰는 사람도 있지만, 재능의 영역이었던 프리핸드 방식을 사용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물론 샬롯의 힘은 마법보단 정령술에 가깝지만.
“올려줄게요!”
등을 떠미는 바람이 느껴졌다.
밀레나는 망설임 없이 발을 굴렀다. 신체술로 강화된 몸이 지면과 작별하기 무섭게, 등 뒤에서 맴돌던 바람이 몸을 힘껏 밀어줬다.
얼굴이 쓰라릴 정도의 가속도였다.
눈꺼풀을 살짝 내렸다 올리니 눈앞에 목표물이 있었다. 흰 점이 뒤룩뒤룩 움직이다가 밀레나를 향했다.
가까이서 보니 주먹만 한 흰 덩어리에 징그러울 정도로 검은 점이 찍혀 있었다.
눈알이 대체 몇 개인 거야?
숨을 크게 문 다음, 양손에 쥐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촤악!
갈라진 흰 덩어리에서 누런 체액이 튀어나왔다. 거병의 도끼로도 볼 수 없었던 속살이 훤히 드러났다.
“여기구나.”
밀레나는 얼굴로 튀는 체액을 피하며 밑으로 떨어졌다. 4m 정도 낙하했을 때 몸 전체를 감싸는 온화한 공기를 느꼈다.
지상으로 끌어당기던 힘이 점점 약해졌다. 밀레나는 자세를 잡고 바닥에 안착했다.
멀리서 양손을 치켜든 채 활짝 웃고 있는 샬롯이 보였다.
정밀한 마나 사용이었다.
이 정도 재능이라.
새내기 마법사들이 수없이 탄생하는 시대라지만, 이런 능력을 지닌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용병단들이 눈독을 들일 만한 실력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샬롯은 분명 유명해질 것이다.
-역시 저기밖에 없나.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필렌이었다.
밀레나는 엄마의 거병을 올려다봤다.
“제 검으로 벨 수 있을 정도예요. 작살 뽑아다가 던지면 효과가 있을 거예요.”
-안 그래도 준비 중이야.
밀레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저씨들이 조종 중인 거병들은 마수 근처에서 시선을 끌고 있었다.
투척 준비 중인 거병은 보이지 않는데?
“비켜라.”
뒤쪽에서 육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밀레나는 뒤를 돌아보며 작게 탄성을 냈다.
몸이 붉게 달아오른 도마뱀 전사가 거대한 창을 든 채 서 있었다.
몸 주변의 대기가 일렁거렸다. 마치 여름날 아지랑이처럼.
밀레나는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마나 파장과는 또 다른 미증유의 힘이 도마뱀 전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거칠면서도 안정감이 느껴진다.
-가능하겠어?
엄마가 물었다.
도마뱀 전사는 대꾸하지 않고 입을 크게 벌려 숨을 들이켰다.
흉부가 부풀어 올랐다. 창을 쥔 오른손을 머리 뒤쪽으로 빼더니, 이내 도움닫기를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앞으로 달려 나간 타린족이 힘껏 젖혔던 몸을 앞으로 내던지듯 둥글게 말았다.
파아아, 손을 떠난 창이 기괴한 소리를 냈다. 커다란 북이 찢어지는 소리 같았다.
날아간 창이 마수의 눈을 꿰뚫었다. 길쭉한 창대가 마수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이이익!
머리 위쪽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굳게 물려 있던 입이 벌어지며 마수가 비명을 지른 것이다.
-아프긴 하나 보네.
엄마의 거병이 움직였다.
후드득 떨어지는 체액 밑으로 달려가 그대로 마수의 몸체를 들이받았다.
다른 거병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몸을 빳빳이 세우고 좌우로 난리 치던 마수가 긴 울음을 빼며 쓰러졌다.
쿵!
흙먼지가 짙게 일었다. 손을 들어 잠시 눈앞을 가렸다가 치웠다.
-잘라버려!
날이 바짝 선 거병용 톱이 벌어진 마수 입에 걸렸다. 몸부림치는 마수를 다른 거병이 붙드는 사이, 엄마의 거병이 움직였다.
촤아아악!
연약한 살점을 가르며 톱이 나아갔다.
“징그럽네요.”
옆에 선 샬롯이 입을 막으며 말했다. 갈라진 살갗을 비집고 내장 같은 것이 쏟아져 나왔다.
소화 기관이 있는 마수인 것 같았다.
역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밀레나도 손을 들고 코끝을 붙잡았다.
한참 동안 발버둥 치던 마수가 쏟아진 내장처럼 축 늘어졌다.
“쟤들도 심장 같은 게 있어요?”
샬롯이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고. 우리가 흔히 아는 동물들하고는 전혀 달라. 섭식 방식부터가 다 다르니 뭐 하나 특정할 수가 없지. 그래서 마수를 상대할 땐 임기응변이 중요하고.”
“대체 뭘 먹었기에 이렇게 냄새가 지독할까요.”
“이것저것 많이 먹었겠지. 작은 풀부터 사람까지, 전부.”
“사람…….”
곁에 있던 하우스가 천으로 입과 코를 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3반은 내장부터 치우고, 2반은 안쪽 살피고.”
갈고리를 든 거병이 쿵쿵 소리를 내며 마수 곁으로 다가갔다. 내장을 걸고 질질 끌어 옆으로 치웠다.
분비물이 바닥에 넓게 퍼졌는데, 냄새가 한층 더 심해졌다.
샬롯이 두 손을 교차하는 게 보였다. 산뜻한 바람이 불어왔고 냄새가 싹 사라졌다.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그 힘, 꽤 유용하네. 나도 배울 수 있어?”
“안 될걸요. 산카가 허락해줘야 하니까요.”
“산카?”
샬롯이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더 캐묻는 건 어려워 보이니 밀레나도 화제를 돌렸다.
“율하고 에단까지 있는 걸 보면 단순한 여행은 아닌 거 같은데.”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일단 둔으로 가는 길이에요.”
“둔?”
“네.”
그때였다. 오른쪽 숲길에서 거병 한 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수를 유인해 온 거병이었다.
거병에 새겨진 문양을 유심히 바라봤다. 저건 분명…….
둥글둥글하게 생긴 거병이 곁으로 다가왔다. 체임버가 열리고 안에서 남자가 내려왔다.
밀레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혹시 테리야?”
의구심을 담아 물었고.
“밀레나 맞네.”
대답이 돌아왔다.
앞으로 걸어온 테리를 바라봤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 위로 선이 굵어진 얼굴이 겹쳐진다.
밀레나는 ‘루드 팩토리’의 마크가 그려진 거병을 다시금 바라봤다.
“루드 팩토리. 가하란이 거기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혹시나 했는데.”
“여관 이름에서 따오긴 했지. 그나저나 여기서 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그러게.”
테리가 손을 내밀었다. 밀레나는 반가움을 담아 그 손을 붙잡았다.
둔에 있던 시절, 제니와 함께 꽤 자주 만났었다. 가하란에게 체스를 이겨 보겠다고 끙끙 앓던 테리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잘 지냈어?”
그 물음에 테리가 씩 웃는다.
“그럭저럭 지내고 있지. 그 일 이후로 잘 지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긴 하네.”
손을 놓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너도 루드 팩토리에 있는 거야?”
“어쩌다 보니 거기 대표를 맡게 됐어.”
“네가?”
“안 어울리지?”
엉성하게 난 수염을 만지며 웃는 테리였다. 어린 티를 지우려고 기르는 것 같은데, 멋지게 나지는 않았다.
“엄청 안 어울리지는 않아. 그럭저럭 어울려.”
“빈말이라도 고맙네.”
마수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죽은 줄 알았던 놈이 갑자기 몸부림을 친 것이다.
내장을 치워내던 거병이 나뒹굴고 살점을 가르던 거병은 치여서 나가떨어졌다.
-일단 떨어져!
엄마의 지시에 작업 중이던 사람들이 저만치 멀어졌다. 밀레나도 뒤로 물러섰다.
“설마 저 상태로 살아나는 건 아니겠지?”
테리가 말했다.
“설마.”
대꾸하면서도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긴장한 채 지켜보길 1분.
물가에 오른 생선처럼 팔딱거리던 마수가 다시 얌전해졌다.
-저거 밟아!
거대한 창에 꿰뚫려 곤죽이 된 마수 얼굴 쪽에서 흰 점이 떨어져 나왔다.
거미처럼 다리를 뽑아낸 눈알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용병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그것들을 잡아냈다.
밀레나도 발치로 온 괴물의 눈알을 발로 밟았다. 발바닥 밑에서 바둥거리던 눈알이 금방 퍼져버렸다.
“으, 이건 또 뭐에요.”
샬롯이 눈알을 가리키며 말했다.
“민들레 씨앗 같은 게 아닐까? 이게 크면 저놈이 될지도 몰라.”
발에 힘을 줘 눈알을 으깨버렸다.
-몇 개는 표본으로 잡아둬. 연구회에 가져다주면 좋아할 거야. 아니면 마수섬김정교에 넘기든지.
“돈은 두둑하게 받겠네요.”
껄껄 웃으며 통에 눈알을 담는 아저씨들이었다.
“저런 걸 왜 섬기는지 몰라.”
샬롯이 이해할 수 없다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뭐라도 믿고 싶어지는 세상이잖아.”
밀레나는 발바닥을 땅에 쓱 문지른 다음 테리를 바라봤다. 테리가 떨떠름한 얼굴로 뒤로 물러섰다.
“냄새나니까 가까이 오진 말자.”
“오랜만에 봤는데 야박하네.”
해체 작업이 다시 시작됐다.
거병이 투입된 1차 작업이 끝나면 사람들이 일을 이어받을 것이다.
덩치가 덩치인 만큼 발골까지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제니는 어때?”
친동생처럼 살갑게 굴던 제니가 생각난다.
“걔도 바쁘게 지내고 있어. 제조소 확장 때문에 일거리가 늘었는데, 그런 것들을 모두 처리하고 있으니까.”
“어릴 때도 손이 야무졌으니 잘해내고 있겠네.”
“네 말대로 잘하고 있지.”
밀레나는 수통에 감아둔 스카프를 매만지며 물었다.
“가하란은?”
소문이야 삼촌들을 통해 몇 번 들었다. 개발진으로서 전도유망하다고.
금방 이어질 것 같았던 대화가 잠시 중단됐다. 밀레나는 의문을 담아 테리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
샬롯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테리를 바라봤다. 얘도 가하란하고 아는 사이인가?
“둔에 있을 때 그놈하고 꽤 가깝게 지냈었지?”
“그랬지. 체스 때문에 매일 찾아가기도 했었고.”
추억을 되새김질하니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테리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갈 뿐이었다.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눈썰미가 나쁜 건 아니었다.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정말 무슨 일 있는 거야?”
“일이야 많았지. 나한테도 그놈한테도.”
“뭔데?”
테리가 목소리를 낮췄다.
“올란트 아저씨가 돌아가셨어.”
“…올란트 씨가?”
“어.”
테리가 뒷머리를 매만졌다.
“우리 아버지도 5년 전에 돌아가셨어. 누구나가 가족을 잃었지. 그 망할 사태가 모든 걸 망쳐놨어. 하지만, 다들 조금씩 이겨내고 있잖아?”
테리가 해체 중인 마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그놈은 아직 5년 전에 살고 있어.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쁘게 살고 있는데, 그 녀석 시간은 5년 전에 멈춰 있는 것 같아. 가끔 이런 생각도 해.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