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위대한 랍파 로안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피할 수 있는 위험은 피하는 게 가장 좋다고.
“저걸 먼저 발견했어야 했는데.”
에단은 나뭇가지의 탄력을 느끼며 건너편 나무로 뛰었다.
3m 거리에서 마수가 움직이고 있었다. 비대한 몸뚱이로 수풀을 헤집으며 달아나는 거병을 향해 접근 중이었다.
몸체를 지탱하는 수많은 다리와 등에 난 거대한 깃털.
치켜든 일자형 몸 상단에 흰 점이 몇 개 보이는데, 그게 안구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점들이 바삐 움직이며 거병이 있는 곳을 훑고 있다.
공중에서 살피던 다오가 곁으로 다가왔다. 에단은 나무를 옮겨 타며 다오의 목소리를 들었다.
“거병이라고?”
단편적인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혼란스러울수록 단짝의 목소리가 제대로 안 들린다. 유능한 랍파는 위기 상황에서도 모든 걸 이해한다고 하던데.
에단은 반원을 그리며 방향을 트는 거병에게 다가갔다.
-지쳐서 떨어져 나갈 법도 한데, 저놈은 끈질기네요.
테리 대표가 말했다.
“욕심이 그득한 놈이니까요. 저 몸뚱이 보세요. 눈독 들인 먹이는 반드시 먹고 말 놈이에요.”
-배터리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뛰다가 안 되면 예정대로 얘를 먹잇감으로 줘야겠어요.
여유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거병 한 기만 대동하고 장거리 이동을 강행할 정도로 강단이 있는 남자. 이 정도 위기 상황은 수없이 경험하고, 또 이겨냈을 것이다.
“보고 있는 방향 기준, 동남쪽에서 거병이 오고 있어요.”
-거병이요?
“네. 다오가 보고 온 건데 아무래도 마수 사냥꾼들 같아요.”
-덩치 큰 마수는 위험한 만큼 탐나는 사냥감이죠.
“그쪽으로 인도해주죠?”
거병이 훌쩍 뛰어올랐다. 에단은 상체를 낮추고 장갑 이음새를 붙잡았다.
-속도 좀 낼게요.
거병 동체가 위아래로 크게 움직였다. 지면을 찰 때마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뒤로 멀어진다.
경쾌한 박자감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심. 훌륭한 조종 실력이었다.
-에단 씨. 잘 붙잡고 있죠?
“예! 제 걱정은 마시고 신나게 뛰세요!”
온갖 소음에 목소리가 묻혔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매미처럼 찰싹 붙어 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콰앙!
한동안 잠잠했던 깃털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에단은 몸을 틀어 뒤따라오는 마수의 정면을 보았다.
번뜩이며 좌우로 바삐 움직이던 흰색 점이 한 군데로 쏠리는 순간, 마수가 몸을 비틀었다.
등이 정면을 향하고 불룩 솟은 깃털 하나가 거병 쪽으로 날아왔다.
움찔했지만 테리를 믿고 끝까지 지켜봤다.
직격당하기 직전, 거병이 방향을 틀었다. 쿠우웅, 빗나간 깃털이 지면을 긁으며 나가떨어졌다.
“저러니 잘 안 맞지.”
다행이었다. 몸통 전면에 깃털이 나 있었으면 피하지도 못하고 꼬챙이가 됐을 것이다.
쏠 때마다 몸을 돌려야 하는 비효율에 감사를.
-보이네요.
테리가 말했다. 에단도 저 멀리서 대기 중인 거병을 발견했다.
좌우로 퍼진 거병이 여섯. 그 옆으로 대형 작살포가 서너 대 보였다.
예상대로 전문 사냥꾼들이었다.
“오른쪽으로 조금만 틀어서 가죠! 작살 반경 안쪽으로 유인해야 해요!”
도시에 상주하는 마수 사냥꾼들과 몇 번 합을 맞춰봐서 그들의 사냥 방식을 잘 알고 있었다.
덩치가 큰 놈은 정면에서 상대하면 안 된다. 측면에서 공격해 기동성부터 떨어트려야 한다.
-그 정도야 쉽죠.
테리의 거병이 힘차게 뛰었다.
옆에서 같이 달릴 때는 몰랐는데 직접 올라타 보니 깨닫게 된다.
머리 모듈이 없는 것도, 동체가 둥근 것도, 하부 모듈이 여타 다른 거병보다 길쭉한 것도 모두 유연한 움직임을 위한 것이구나.
“이대로 계속 뛰세요! 전 저쪽 상황을 보고 올게요.”
-앞으로 두 시간은 더 달릴 수 있으니 필요하면 말해줘요.
에너지 효율도 남다른 모양이다.
미리 봐둔 나무를 향해 몸을 날렸다. 굵은 가지를 한 손으로 붙들고 숨을 골랐다.
코앞으로 꾸물대며 지나가는 마수가 보였다.
“징그러운 새끼.”
반동을 줘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였다.
곡선을 그리며 마수를 향해 떨어지는 작살이 보였다.
* * *
끼기긱!
지면에 고정된 작살포가 꺼림칙한 소리를 냈다. 더없이 팽팽해진 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못 버티겠는데요?”
밀레나는 들썩거리는 작살포를 바라봤다. 거병으로 내려친 거대한 정이 뽑히려 하고 있었다. 끈이 끊어지는 것보다 고정대가 먼저 박살 날 것 같지만.
아니, 그전에 상판이 먼저 뒤틀리려나?
“일회용으로 쓰고 버려야죠 뭐.”
스미스가 침을 뱉었다.
“밀레나!”
뒤에서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율이 바쁘게 뛰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만나도 하필 이럴 때 만나네.”
밀레나는 마수를 바라봤다. 작살에 꽂힌 채 제자리에서 바둥거리고 있으나 곧 다시 움직이리라.
“이걸로 붙잡아 둘 수 있겠어?”
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저만한 걸 붙들어 두려면 스무 대 이상은 가져와야 할 거야. 이 정도로는 잠깐 묶어두는 게 다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수가 날뛰었다.
“조심해요!”
1번 작살포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뜯겨 나갔다. 낚아챈 낚싯줄처럼 허공을 한번 휩쓴 작살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근처에 있던 용병들이 몸을 날려 떨어진 작살포를 피했다. 1번이 망가지자마자 다른 작살포도 지진이 난 듯 요동쳤다.
“끈 풀어!”
호프가 외쳤다.
밀레나는 걸쇠를 발로 차버렸다. 꺾인 쇠가 튕겨 나가며 끈이 감겨 있던 통이 저 하늘로 치솟았다.
장력이 한순간 사라지자 커다란 마수도 기우뚱거렸다. 송충이를 닮은 몸뚱이가 우측으로 크게 휘더니, 그래도 바닥에 고꾸라진다.
-정비하고 바로 붙어!
본대에 남아 있던 마지막 거병이 출발했다.
밀레나도 개인 장비를 챙겨 뒤따를 준비를 했다.
“박력 넘치네.”
옆에선 율이 말했다.
“저렇게 큰 놈은 오랜만이거든. 아저씨들도 신난 거 같아.”
“우리가 도울 거 없을까?”
“사무직으로 전향한 지 오래잖아? 할 수 있겠어?”
“책상 앞도 만만치 않게 전쟁터야. 그리고 몸 쓰는 걸 게을리한 적 없어.”
밀레나는 뒤쪽에 있는 샬롯을 바라봤다. 1년 전에 봤을 때와 또 달라져 있었다.
“쟤는?”
“자기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으니까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라고 할게.”
“그래도 되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여기 있으라고 하고 싶지만, 말 안 들을 게 뻔해. 쟤도 인내심이 슬슬 바닥난 거 같고.”
“자기 몸은 자기가 챙기는 거니까.”
밀레나는 샬롯을 향해 손을 흔든 후 움직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저 아이를 지켜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했다.
성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살인마의 딸이 어떤 사연으로 아리엘 시장 밑으로 들어간 건지, 어떻게 정체불명의 힘을 얻게 된 건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율이 괜찮다면 괜찮은 거다.
진흙을 밟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고꾸라진 마수 곁에서 움직이는 거병들이 보였다.
껍질이 질긴지 거병용 도끼로 내리찍어도 별 효과를 못 보는 것 같았다.
“연한 곳이 있을 텐데.”
종종 온몸이 쇳덩이처럼 단단한 마수도 나타나지만, 저 앞에 있는 거대한 놈은 전신이 강철 같지는 않았다.
다리 쪽을 잘라봐야 하나?
“땅딸보. 너도 있었냐?”
위쪽에서 튀어나온 음성에 고개를 쳐들었다. 나무에 매달려 있는 에단이 보인다.
“재수 없는 면상 오랜만에 보네.”
“칭찬 고맙네. 그보다 필렌 님도 계시는 거야?”
“엄마라면 저기.”
손가락을 들어 등판에 뛰어오르는 거병을 가리켰다. 연파랑으로 도색해서 어디를 가나 눈에 들어오는 엄마의 전용기다.
“저기 보이네. 필렌 님이 계시면 일단 안심이지.”
에단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 저놈, 더럽게 질겨 보여.”
그사이, 엄마의 거병이 깃털 하나를 옆구리에 낀 채 땅으로 내려왔다.
손에 들고 있던 칼은 마수의 등짝에 꽂아둔 상태였다.
“더 안 박히나?”
“그런 거 같아.”
밀레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에단이 물끄러미 바라본다.
“뭐 하게?”
“어디가 말랑한지 상담 좀 해보려고.”
“위험할 텐데.”
“저런 거에 깔려 죽을 정도였으면 이미 3년 전에 관에 들어갔지.”
율을 바라봤다. 눈짓하자 율이 빙긋 웃으며 따라올 준비를 했다.
“누나도 가게요?”
에단이 식겁하며 물었다.
“간만에 움직여 보려고.”
“시장님이 알면 인상부터 쓸 텐데.”
“너만 조용히 하면 돼. 그보다 뭐 알아낸 거 없어?”
말하는 사이 매가 날아와 에단의 어깨에 앉았다. 밀레나는 다오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주인과 다르게 신사적인 다오는 부리를 손끝에 비비며 인사했다. 역시 마음에 들어.
“몸 전면 상부에 흰 점이 있어. 그게 계속 움직이면서 목표물 찾는 거 보니까 안구 역할인 거 같아.”
“거길 한번 찔러 봐야겠네.”
“못해도 8m는 넘는데, 저기까지 갈 수는 있고?”
에단이 발악 중인 마수를 가리켰다.
“등을 밟고 뛰어 올라가는 건…… 안 되겠네.”
등에 난 깃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거병이 올라탄 뒤로 저 상태인데, 주변 물체를 전부 베어버릴 기세다.
엄마가 등에서 뛰어내린 것도 저걸 피하느라 그런 걸 테고.
작살을 다시 날릴 수도 없다. 가동에 필요한 배터리를 써 버렸으니까.
“일단 정보를 공유하면 거병으로 작살을 던지든, 뭘 하든 정할 수 있으니까…….”
대치 중인 거병 쪽으로 이동하려 할 때였다. 불쑥 끼어든 손 하나가 있었다.
“내가 날릴 수 있어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하는 샬롯이었다.
“날려?”
“그걸 원하는 거 아니에요? 나라면 저기까지 사람 한 명은 날려 보낼 수 있어요.”
밀레나는 율을 바라봤다. 율이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왜? 해볼 만한 것 같은데.”
밀레나는 샬롯의 어깨를 잡았다.
“제대로 날려 보낼 수 있어? 그리고 떨어질 때도 받아줄 수 있고?”
“눈 감고도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몸을 공중으로 띄우는 샬롯이었다. 무릎 밑으로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좋아. 한번 해보자.”
듣고 있던 율이 화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위험해.”
“세상에 안 위험한 일도 있어? 그리고 저 정도 높이면 그냥 떨어져도 다치지 않아. 바람으로 받아주면 고맙지만, 실패해도 문제 될 건 없어.”
“저게 공격해 오면?”
율이 손가락을 곧게 뻗어 마수를 가리켰다.
“계속 지켜봤잖아? 접근전에 대한 대비책이 없어 보여. 등 쪽으로만 안 가면 돼. 그리고 올라가서 한번 쓱 찔러볼 뿐이야. 혼자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멋대로 행동해도 되는 거야? 너희 어머니께서…….”
밀레나는 연한 미소를 지었다.
“르완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다 따로 놀아.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해서 최상의 팀워크를 끌어낼 뿐이지. 저기 봐봐.”
밀레나는 사방으로 찢어져 접근하는 용병들을 가리켰다. 굵직한 목표만 엄마가 제시해줄 뿐, 나머지는 각자 판단하고 행한다.
“엉망이네.”
“독특하다고 해줄래?”
밀레나는 샬롯에게 눈짓을 주었다.
“네 몸은 네가 챙길 수 있는 거지?”
“걱정하지 마요. 난 절대로 안 다치니까.”
“든든하네. 그러면…….”
턱짓하고 달려 나갔다.
신체술로 강화된 몸이 앞으로 쭉쭉 치고 나간다. 움직이면서 뒤를 힐긋 봤는데, 샬롯이 발을 사뿐히 차며 따라오고 있었다.
행동은 느긋해 보이는데 속도는 대단했다. 정체불명의 힘을 제대로 다루는 것 같았다.
“어디 가는 거냐!”
도중에 마주친 하우스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잠깐 위에 좀 다녀올게요!”
밀레나는 치켜든 마수의 면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