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50화 (223/558)

제250화

“저희는 대기하죠.”

테리는 거병의 시야로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위험한 마수도 산의 전사 앞에서는 덜 자란 들개처럼 나약해질 것이다.

여행을 다니며 몇 번 타린족 무승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들의 전투력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이었다.

단단한 육체를 극한까지 사용해 적을 몰아치는 전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강철처럼 단단하게 돋아난 비늘로 적의 공세를 쳐내고, 쇠도 뚫는 손가락으로 적을 유린한다.

그러고 보면 타챠는 좀 특이했다.

맨손이 아닌 거대한 창을 사용했으니까.

“크게 문제 될 것 같지는 않네요.”

나무 위에서 내려온 에단이 말했다. 타챠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니 곧 정리될 거라고.

테리는 조종간에서 손을 떼고 손목을 풀었다. 거병을 타고 있어도 껄끄러운 게 마수인데, 역시 산의 전사는 상식을 뛰어넘는다.

“가하란과 아는 사이라.”

자세한 얘기를 듣진 못했지만, 타챠 역시 가하란을 알고 있었다.

둔을 찾는 타린족 무승은 무수히 많으니 가하란과 만났다고 해서 이상하진 않다.

단지, 인연이란 게 신기할 뿐.

“나도 가보고 싶은데.”

거병의 손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샬롯이 슬쩍 일어섰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 어째 불안해 보인다.

“얌전히 있는 게 좋을걸. 율 씨에게 혼나기 전에.”

확성기를 통해 밖으로 전달된 목소리에 샬롯이 반응했다.

“대표님은 싸우고 싶지 않아요?”

“위험한 일은 되도록 피하자는 주의라.”

“겁쟁이.”

“겁이 많아지더라. 몇 번 다치고 나니까.”

마수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었다.

생물이라면 공통적으로 지녀야 할 신체적 유사성이 없는 것이다.

개체마다 특성이 다 다르다 보니 공격 방식을 예상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뱀처럼 다니던 마수가 갑자기 날개를 뽑아내 날아들기도 하고, 번데기처럼 웅크리고 있던 놈이 사방으로 가시를 뿜어내기도 한다.

크기가 작다고 해서 덜 위험한 것도, 크다고 해서 무작정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종잡을 수 없는 마나 생물.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는 금지 구역인 ‘미개척지’ 안쪽에서만 종종 나타났다.

일반인은 몬스터라는 것을 이야기로만 전해들을 뿐, 일평생 보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랬던 마수가 그라운드 제로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인간의 생활 반경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마나와 친밀해진 자들이 대항력을 갖추고, 경이로운 속도로 발전한 마법공학이 날개를 달아주기 전까지 사람들은 마수를 피해 다녀야 했다.

대응력이 생긴 현시점조차 마수와 마주하는 건 여전히 두려운 일이지만.

“잠깐만요.”

에단이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갔다. 심각한 얼굴로 서쪽을 내다본다.

저 멀리 전투 지역 상공을 맴돌던 매가 방향을 꺾어 에단이 바라보는 곳으로 움직였다.

테리는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느낌이 안 좋았다.

“서 500. 이곳으로 이동하는 놈이 있어요. 이동해야 해요.”

에단이 급하게 말했다.

“남동으로 우선 빠진 뒤에…….”

말을 잇던 에단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조심해요!”

외침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무엇인가가 날아왔다.

테리는 샬롯을 쥔 손을 동체 쪽으로 끌어당긴 후 몸을 틀었다.

쾅!

투석기에 공격당한 것처럼 분진이 피어올랐다. 뭐가 날아온 건지 확인할 시간도 없었다.

“길을 열게요! 따라붙어요!”

테리는 우거진 수목을 향해 거병을 움직였다. 무장을 제거하고 기동성을 올린 거병이라지만, 어린 나무를 밀쳐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시야 확보가 어렵습니다. 하체 무게 이동이 여의치 않습니다. 현 지대를 벗어나길 강력히 권합니다.

“나도 그러고 싶지.”

오토마타의 알림을 들으며 계속 전진했다.

거병의 발이 질척거리는 땅을 밟았다. 점도가 상당했다. 아직은 괜찮지만, 지면이 거병의 하중을 버텨내지 못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지리라.

“감각확장 4단계로 높이고, 후면 시야 좀 맡아줘.”

-이행합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한층 더 예리해졌다. 거병 동체를 스쳐 지나가는 나뭇가지 때문에 살짝 쓰라릴 정도다.

“율 씨?”

테리는 왼쪽을 보며 말했다. 말을 타고 따라와야 할 율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붙어 있었는데.

-마나 밀도 상승 확인. L3, 4m.

왼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말을 버린 채 숲길 사이를 달리고 있는 율이 보였다. 듬성듬성 솟은 바위를 차고, 나무 위로 뛰어오르더니 하늘 높은 곳에서 주변을 살핀다.

테리는 눈을 깜빡였다.

신체술이다. 그것도 오토마타가 정보로서 다룰 정도의 마나 밀도.

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특무대령의 부탁으로 가하란을 잠시 보호했었다고.

그때는 군부에 몸담은 일반 관료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누가 누굴 보호할 처지가 아니었네.”

저 정도의 신체술이라면 정체불명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콰앙!

또다시 시야 바깥쪽에서 투사체가 날아왔다. 이동 경로를 예측한 공격이었다.

테리는 눈앞에 떨어진 낙하물을 확인했다.

깃털?

생김새는 새의 깃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흑요석처럼 반질거리며, 털이 붙어 있는 심지가 사람 팔뚝보다 굵다는 점이다.

-적대 대상 접근합니다.

알림과 동시에 후방에서 검은 물체가 떠올랐다. 태양 빛을 등지며 솟아난 마수는 10m 남짓한 거대한 몸체를 지니고 있었다.

온몸에 돋아난 검은색 깃털이 잘게 떨린다. 당겨진 활시위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다.

거병의 외장갑이 저걸 버텨낼 수 있을까?

-회피를 권합니다.

매정한 오토마타의 조언이었다.

“샬롯! 나한테서 최대한 떨어져!”

샬롯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놈은 거병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떨어트려 놔야 그나마 안전했다.

“배터리 잔량은 어때?”

우측으로 이동하며 물었다.

쿵쿵, 거병이 지면을 박차며 나아갔다.

-적극적 행동 수행이 이어질 시 가동 시간은 3시간으로 예상됩니다.

“여유는 있네.”

저런 걸 상대하려면 거병을 보유한 용병단이 필요했다. 단신으로 막아서는 건 불가능하니 일단 후퇴해야 한다.

이동하며 뒤쪽을 살폈다.

율이 샬롯을 보호하며 숲 안쪽으로 움직이는 게 보였다.

타챠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는 모양이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회피 기동을 서포트하겠습니다.

시동키를 통해 전해지는 압박이 한층 더 높아졌다. 마나 씰의 농도가 옅어졌는지 외부 충격이 고스라니 전해졌다.

기동력에 모든 자원을 투자한 것이다.

쉬이이익!

아찔한 파공음이 전해져 왔다. 좌측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검은 깃털이 굉음을 내며 바닥에 연이어 꽂혔다. 깃털에 직격당한 나무가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뿌리째 들려 넘어졌다.

적중당하는 순간 반파 확정이다.

긴장감이 온몸에 들러붙었다.

“대표님!”

에단의 목소리였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거병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것이다.

“타챠 씨 쪽은 어떤가요?”

“그쪽은 정리 끝났어요.”

“저걸 처리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아저씨라면 어찌어찌 치울 수 있을 거 같은데.”

쿵!

깃털이 오른팔을 스쳐 지나갔다. 테리는 이를 꽉 물었다. 감각확장을 4단계까지 높여둔 터라 꽤 아팠다.

“장갑 날아갔는데요? 괜찮은 거예요?”

“기동에는 문제없어요. 그보다 저거 따돌릴 방법 없나요?”

“거병에 꽂혔는지 이것만 따라오고 있어요.”

“저만한 게 대체 어디서 솟아난 거죠?”

“저도 모르겠어요. 다오가 확인했을 때만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땅속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는 마수도 있다고 하니, 랍파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타챠 씨 쪽으로 합류하는 건 위험하겠죠?”

“일단 좀 더 살펴볼게요. 저거 크기만 크지 적중률은 안 좋은 거 같으니 한동안 도망칠 수 있을 거예요.”

말하기 무섭게 깃털이 왼발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정확도가 점점 높아지네요.”

“최악의 경우 얘를 버리고 빠져나가 볼 테니 에단 씨는 길목을 확인해 주세요.”

“알겠어요.”

뛰어오를 만한 나무 곁으로 달려갔다. 어깨에 붙어 있던 에단이 떨어져 나가는 게 확인됐다.

-자동 운전으로 20m 정도 이동이 가능합니다. 탈출 시 안전한 장소는…….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에서야. 그 전까지는 버릴 생각 없어.”

-탑승자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들으며 계속 달려 나갔다.

* * *

“산카!”

샬롯은 저 멀리서 움직이는 마수를 보며 산카를 찾았다.

산카의 바람이라면 저런 괴물쯤 쉽게 치워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 봐도 산카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째서?”

샬롯은 양손에 힘을 줬다. 살갗을 벨 예리한 바람이 모여들었다. 힘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산카는 대답이 없는 걸까?

“필요할 때마다 산카 님을 찾을 거야?”

곁에 서 있는 율이 말했다. 목소리가 따끔했다.

“지금은 위험하잖아. 저 사람을 도와야지!”

“우리가 도와야 해. 산카 님이 아니라.”

입을 실룩거리고 있을 때였다. 피 묻은 창을 털며 타챠가 다가왔다.

“타챠 님. 저걸 잡을 수 있을까요?”

율이 물었다.

“쉽지는 않아 보이는군.”

도마뱀 아저씨가 어렵다고 말하다니. 샬롯은 걱정을 담아 현장을 바라봤다.

폭음이 이어지고 새들과 동물이 날뛰고 있었다. 저 소리에 이끌려 탐욕스러운 마수들이 몰려들지도 모른다.

“일단 가보자. 응?”

샬롯은 율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는 사람이 다치는 건 정말 싫다. 무력하게 바라보는 건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신께 기도를 올릴 테니 잠깐만 기다려라.”

타챠가 깃대를 땅에 꽂고 바닥에 앉을 때였다. 숲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액상근육이 실린더를 휘감는 특유의 소리.

샬롯은 바람으로 몸을 띄운 다음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언니! 사람들이야!”

거병을 이끈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눈에 힘을 줘 거병에 새겨진 문양을 확인했다.

우습게 생긴 말머리 위에 반토막 난 검이 그려져 있었다. 지상으로 내려와 율에게 본 것을 설명했다.

“네가 제대로 봤다면 그건 르완의 상징이야.”

르완이라면…….

소문으로 들어봤다. 마수 사냥으로 이름을 떨친 유명한 용병단이다.

“르완이라면 합을 맞추기 쉽겠군.”

타챠가 일어섰다. 창을 어깨에 이고 거병이 다가오는 쪽으로 걸어갔다.

샬롯과 율도 옆에 따라붙었다.

“아는 얼굴이라도 있나요?”

율이 질문했다.

“끔찍한 쇳덩어리를 아름답게 다루는 여자를 알고 있지.”

“설마…….”

얼마 지나지 않아 용병단과 마주했다. 용병단은 진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마수를 향해 나아갔다.

옆으로 비켜선 타챠에게 다가온 건 후미에 선 거병이었다.

-오랜만이야! 그 멋없는 창은 여전하네.

“품위라고는 전혀 없는 그 목소리도 여전하군. 필렌! 몇 안 되는 벗이여! 나를 도와줄 수 있겠나?”

-그런 거 물을 시간 있으면 빨리 움직이기나 해. 저거 잡으러 가는 거 맞지?

거병이 손을 들어 커다란 마수를 가리켰다.

“내가 선봉에 설 테니 뒷정리를 맡아라.”

-그 반대겠지. 도마뱀 아저씨.

쿵, 쿵, 쿵!

거병이 뛰기 시작했다. 타챠가 몸을 날려 거병 어깨에 올라탔다.

샬롯도 바람에 몸을 실어 거병 쪽으로 날아가려 할 때였다. 율이 어깨를 잡아챘다.

“얌전히 있어.”

샬롯은 코를 찡긋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