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의도만으로 상대방을 바보로 만들다니.
밀레나는 검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마법 같아요.”
“당해보면 그런 생각이 절로 들죠.”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죠?”
“몸이 내보내는 여러 정보를 약간씩 비트는 겁니다. 눈이 좋은 상대일수록 감각에 이상이 생기죠. 물론, 이조차 어쭙잖게 따라 하는 것뿐이지만.”
“이게 따라 한 수준이라고요?”
“진짜를 경험해보면 얼이 빠질 겁니다. 몸의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기거든요. 조종당하는 느낌이 들어서 참으로 찝찝하죠.”
테인의 검이 검집으로 들어갔다.
아쉽다.
좀 더 배우고 싶지만 붙잡을 수가 없었다.
“필렌 경 곁에 있으면 언젠가 협회장님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분의 태세와 권역을 경험해보는 것이 저한테 배우는 것보다 나을 테죠.”
“협회장이요?”
“아, 총수님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살짝 웃는 테인이었다.
“볼일 다 본 거 같으니 우리도 그만 가자고.”
다가온 아르드헨이 테인 곁을 지나가며 말했다. 테인이 눈인사를 남긴 뒤 그대로 떠나가 버렸다.
밀레나는 멀어지는 두 사람을 멀거니 쳐다봤다.
폭풍과도 같았던 사람들이 떠나간다.
“멍하게 있지 말고 얼른 자리 정리해. 우리도 가야 하니까.”
“여길 떠나요?”
“아까 한 말 못 들었어? 정비하러 둔으로 가야 해. 서둘러.”
야영지로 돌아가는 엄마 옆에 찰싹 붙었다.
“그보다 엄마, 사과파이 연맹이 뭐예요?”
“정리 끝나면 말해줄게.”
“지금 말해줘요. 시간 지나면 또 잊어먹을 거 같으니까.”
옛 황제와 총수, 그리고 엄마를 묶는 정체 모를 연맹.
“대단한 건 아니야.”
엄마가 텐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게 만들어진 이유는 나리아 때문이었지.”
“나리아요? 그게 누군데요.”
“허스의 아내. 세간에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어. 다른 장군들의 아내들처럼 모임을 결성한 것도 아니고, 행정처에 얼굴을 비친 것도 아니니까. 친목회에 몇 번 나간 게 끝.”
이름은 처음 들어보지만 소문은 몇 번 들어봤다.
“병환으로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지독한 병이었지.”
쓸쓸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엄마였다. 저런 표정을 짓는 엄마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밝은 애였어. 호기심도 참 많고. 살짝 귀찮지만 얄밉지는 않았지.”
설명을 듣고 있으니 추억에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저도 그런 애를 한 명 알아요.”
“그래? 아무튼 나리아는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애였어. 이것저것 도전하는 게 취미였거든. 사과파이 연맹은 나리아가 요리를 배우던 시기에 탄생했어.”
“요리를 배워요?”
엄마가 고개를 내리더니 인상을 쓰며 웃었다.
“한번 배울 때 아주 제대로 하는 애였어. 금녀구역이나 다름없었던 왕성 조리실에 출근 도장 찍으며 요리를 배웠지.”
“행동력이 보통이 아니셨네요.”
“정말 대단했지.”
엄마가 정비 중인 용병들 앞에 서서 외쳤다. 11시에 출발할 거니 짐 다을 꾸리라고.
“둔으로 가는 겁니까?”
“그래. 우리 쇳덩이들 고쳐줘야지.”
“마수 뼈도 처리하고요. 물건이 좋아서 꽤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스미스가 엄지를 세웠다.
“준비 끝나는 대로 말해.”
지시를 끝낸 엄마가 개인 텐트 쪽으로 걸어갔다. 밀레나는 그 옆에 붙어 마저 이야기해 달라고 졸랐다.
“그래서요? 왜 연맹이 생겨난 건데요?”
“연맹이라 하니까 뭔가 거창해 보이지? 근데 사실 피해자 모임이야.”
“피해자 모임이요?”
텐트 안쪽으로 들어갔다. 짐을 챙기는 엄마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기다렸다.
“요리 실력을 늘리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만들어 봐야죠..”
“그래, 그거야. 나리아는 이것저것 만들었어. 차 배합에도 도전해보고, 기묘한 죽에도 손을 댔지. 사실 거기까진 괜찮았어. 문제는 사과파이였지.”
“사과파이가 왜요?”
“입맛에 안 맞았나 봐. 만들고 만들고 또 만들었지. 그 당시 마침 나도 성도에 있었거든?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과파이 귀신이 사과파이가 든 바구니를 들고 나타났어.”
“귀엽네요. 저라면 고맙게 먹겠는데.”
엄마가 고개를 홱 돌렸다. 복잡 미묘한 웃음이 입에 걸려 있었다.
“계속, 계속, 계속. 입에서 사과나무가 자라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가져왔어. 희생자는 나뿐만이 아니었지. 걔가 종일 조리실에 처박혀 있었거든? 정말 하루에 수십 개씩 찍어냈어. 무슨 기계 같았다니까!”
“그, 그 정도예요?”
하루 수십 개라. 눈앞에 쌓여가는 사과파이를 생각하니 웃어넘길 문제는 아니었다.
“수십 개의 파이가 왕성 곳곳으로 퍼져 나갔어. 허스의 아내야. 제국 기사의 총수를 남편으로 둔 애가 해맑게 웃으면서 파이를 나른다고. 방위국 집무관도, 집사장도, 행정국장들도 모두 그걸 먹어야 했지. 그래도 그들은 좀 나았어. 한두 번 먹으면 됐으니까.”
엄마는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이 얼굴을 털었다.
“아르드헨, 칼리고, 허스, 그리고 나. 우린 사과파이 무덤에서 살게 됐어. 첼 집사도 잠깐 참전했지만 눈치채고 빠져나가 버렸지.”
“대체 얼마나 드신 거예요?”
“숫자를 셀 수 있을 정도였다면 피해자 모임이라고도 안 해. 아무튼 지겹게 먹었어, 지겹게.”
인상을 쓰며 말하던 엄마가 이내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근데 그것도 옛날얘기가 돼버렸네. 이제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만든 파이는, 꽤 맛있었어.”
엄마가 손을 휘휘 저었다.
“얘기 끝났으니까 얼른 가서 정리해. 정리할 거 없으면 얀스 좀 돕고. 지금쯤이면 정비 도구 챙기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
“시장님하고 나눈 대화는…….”
“그건 가는 길에 해줄게.”
“알겠어요.”
총총걸음으로 텐트를 벗어났다.
듣고 나니 정말 별거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대단했다.
“엄마의 친구라.”
몇 개의 문장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순 없지만, 힘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유쾌하고 호기심 많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가하란하고 비슷하네.”
가하란.
참 오랜만에 꺼내보는 이름이었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 한 번쯤 둔을 찾아가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성도에서 둔까지, 마수들이 득실대는 길을 뚫어낼 정도로 장비가 갖춰지지 않았으니까.
지금이야 소형화된 거병들이 실전 배치가 되면서 도시 사이를 오가는 게 예전보다 수월해졌지만.
“잘 지내고 있겠지.”
밀레나는 수통에 감아둔 스카프를 바라봤다. 버릇처럼 들고 다녀서 여기저기 뜯어지고 구멍이 생겼다.
간간이 들려오는 루드 팩토리 쪽 소식에 따르면 무탈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개발자로서 꽤 유명해진 것 같기도 하고.
5년이나 지났으니 좀 컸으려나?
쪼만했던 모습을 떠올리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만나게 되면 정말 반가우리라.
“체스도 재도전해 봐야겠네.”
세상이 뒤바뀐 후 체스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해 실력이 녹슬었겠지만, 그래도 다른 경험이 쌓였으니 해볼 만할 것이다.
내친김에 올란트한테도 도전해보고.
“밀레나! 할 거 없으면 좀 도와줄래?”
저 멀리서 얀스가 외쳤다. 커다란 상자를 낑낑거리며 들고 가고 있었다.
“알겠어요!”
손목을 툭툭 턴 다음 상자가 쌓여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 * *
“이제 그만 내려오는 게 어때?”
테리는 조종간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괜찮아요!”
샬롯의 목소리가 감각 장치를 통해 전해졌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반쯤 포기하고 앞을 보았다.
체임버 안쪽은 마나 씰 덕분에 상하 반동에 따른 울렁증이 거의 없지만, 외부는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허리도 아플 테고.
하지만 샬롯은 별문제가 없는지 계속해서 거병 상단부에 앉아 있었다.
시각 범위 바깥쪽으로 샬롯이 어떤 자세로 앉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떨어지지 않는 걸 보면 요령이 좋은 것 같다.
아니면 정령의 힘을 쓰고 있는 건가?
“먼저 좀 보고 올게요.”
옆에서 나란히 이동하던 에단이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다람쥐도 손뼉을 칠 만한 속도다.
테리는 거병을 정지시킨 채 기다렸다. 랍파의 인도 없이 발을 떼는 건 너무나도 위험했다.
“저 앞 공터까지 가죠. 근방에 마수는 없는 거 같으니.”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타챠가 앞장섰다. 굵직한 꼬리로 땅을 휩쓸면서 걷는다.
‘저희 쪽에서 호송팀을 붙여 드릴게요. 안전하게 둔까지 가실 수 있도록.’
아리엘 시장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타린족 전사와 훌륭한 파트너를 둔 랍파. 분명 호송팀으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약간의 흠이 있다면, 호송팀 안에 보호해야 할 대상이 끼어 있다는 정도?
“대표님, 혹시 불편하시다면 제가 설득해 볼게요.”
왼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말을 타고 있는 율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불편할 건 없죠. 혹시 떨어질까 봐 걱정될 뿐인데, 여태 잘 매달려 있는 거 보면 이대로 가도 괜찮을 거 같아요.”
그때였다. 머리 위쪽에서 팅팅, 쇳소리가 났다. 외장갑을 치는 소리다.
“대표님, 대표님! 저 거병 손에 올라타 봐도 돼요?”
“마음대로 해.”
테리는 거병의 오른손 손바닥을 펼친 채 머리 위로 들었다.
“붙잡았어?”
“네!”
천천히 손을 내렸다. 시야각 안쪽으로 손이 들어왔다. 샬롯은 거병 손바닥 위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안 무서워?”
“이 정도 높이는 안 무서워요. 4m도 안 되잖아요?”
샬롯이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한 발로 폴짝 뛰었다.
테리는 기겁하며 신경을 집중했다. 손바닥이 뒤집히는 날엔 샬롯이 추락할 것이다.
“샬롯!”
아래쪽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율이었다.
샬롯이 멋쩍게 웃더니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대표님, 죄송해요.”
동행한 지 일주일 정도 되는데, 그 사이에 율한테 사과를 수십 번 들었다. 샬롯이 장난칠 때마다 율의 입이 바빠지는 것이다.
“전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제 동생에 비하면 샬롯은 얌전한 편이에요.”
“동생분도 장난기가 넘치나 봐요.”
“지금이야 철이 들었는지 얌전해졌지만, 어릴 땐 말도 못 했어요. 성격도 얼마나 드센지. 가하란하고 제가 걔 눈치 보느라 혼났죠.”
쿵, 쿵.
지면이 단단해졌는지 거병의 걸음 소리가 조금 커졌다. 무른 땅보다야 이동이 편해서 좋긴 하지만, 소음이 퍼져 나가는 건 좋지 않은데.
삐이익!
랍파의 매가 예리한 울음을 냈다.
조용한 관찰자가 소리를 냈다는 건 예상치 못한 위험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테리는 곧바로 에단을 바라봤다. 길잡이의 판단이 필요했다.
쏜살같이 내려온 매를 붙잡고 한참 시선을 교환하던 에단이 거병 앞으로 뛰어왔다.
“대표님. 앞에 마수 몇 마리가 보이는데, 어떻게 할까요?”
“저 혼자였다면 고민 없이 우회했을 테지만…….”
테리는 주변 환경을 살폈다. 거병이 다닐 길목이 마땅치 않았다. 우회하려면 뒤쪽으로 빠져서 한참 돌아가야 할 것이다.
“타챠 님의 의견이 중요할 것 같네요.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면 직진이고, 아니면 돌아가죠. 전투가 길어지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앞쪽에 서 있던 도마뱀 전사가 거대한 창을 휘두르며 말했다.
“점심 먹을 시간이야.”
그 말을 들은 에단이 빙긋 웃었다.
“거치적거리는 거 얼른 치우고 식사 하자는데요?”
산의 전사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