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수행원 한 명만 대동한 여행이라. 정말 안 어울리네.”
필렌이 말했다.
“나름 괜찮아. 저 친구도 예전만큼 팍팍하지 않고.”
아르드헨이 조금 떨어져 있는 테인을 흘깃 보며 말했다.
“필렌,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어때? 용병단 대장 노릇 하는 것보다는 내 밑에서 일하는 게 나을 건데.”
“아까도 말했지만 네 밑에서 일한 건 한 번으로 족해.”
“두 번이나 권했는데 거절당했으면 어쩔 수 없지. 오늘은 포기하고 다음에 다시 권유해야겠어.”
“그때도 내 대답은 똑같을 거야. 그리고 시답잖은 말 또 꺼내면 말보다는 발이 먼저 나갈 거고.”
“엉덩이 차이는 건 부끄러우니 다음번엔 멀리서 말해야겠군.”
웃음 섞인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이었다.
밀레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다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엄마와 시장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사적으로 왜 이렇게 친해 보이는지, 정말 걷어찰 생각인지 궁금한 게 많지만 물어볼 순 없었다.
“저 눈 봐. 너 어릴 때랑 똑같아.”
시선이 집중됐다.
밀레나의 눈동자가 옛 황제와 엄마 사이를 분주히 움직였다.
“속깨나 썩이는 애야. 말을 너무 안 들어.”
“그 피가 어디 가겠어? 널 닮아서 그런 거니까 감내해야지.”
“나중에 네 아들딸들과 같이 만나게 되면 나도 똑같이 말해 줘야겠네.”
“내 핏줄들은 이미 떠난 지 오래야. 다들 자기 엄마 좋다고 따라갔으니까.”
“얼굴 못 보니 아쉽겠네.”
“나중에 잘 살아 있는지 확인만 하면 돼. 그 애들도 나한테 바라는 거 없을 테고, 나도 기대하는 게 없으니.”
지극히 사적인 얘기들이 눈앞을 오갔다. 위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웃을 수도 없는 껄끄러운 내용이었다.
아르드헨이 밀레나를 바라봤다.
“자네만 괜찮다면 말을 좀 편하게 하고 싶은데.”
“저는 상관없어요.”
“허락해줘서 고맙군. 그러면…….”
한 걸음 다가오는 아르드헨이었다.
“가까워진 김에 내 양녀로 들어오는 건 어때?”
“네?”
“엔첸세로 사는 것도 지겹잖아? 내 밑으로 와서 이것저것 배워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야. 훗날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네가 물려받는 것도 꽤 많을 거고.”
농담인 게 분명하다. 아니, 농담이어야 한다. 그런데 말을 꺼내는 아르드헨의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진중했다.
“어때?”
밀레나는 멍한 눈으로 옛 황제를 바라보다가 한 마디 꺼냈다.
“근데 대통령이 뭔가요?”
“…음, 그것부터 설명해야겠네.”
아르드헨이 검지를 세워 땅을 가리켰다.
“도시 단위로 쪼개진 국가. 관리책이 선출직으로 바뀌었지만, 그 형태는 영지와 다를 바 없지.”
“그렇죠.”
“지금이야 도시 단위로 영위 중이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또다시 장벽을 허물고 통합하게 될 거야. 정복욕은 도저히 제거할 수 없는 근본적인 욕망이니까.”
밀레나는 똑똑히 보았다.
욕심, 욕구, 욕망.
모든 걸 탐하는 눈동자를.
갖추지 못한 자가 그런 눈빛을 보였다면 오만하고 무식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르다. 정점에 도달한 적이 있는 남자. 과욕이 아닌 실현 가능한 꿈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깨닫고 말았다.
왜 황제 밑에 그토록 유능한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는지. 온갖 흉흉한 소문을 몸에 두른 사람임에도 목숨을 버려가며 지키려 했는지도.
이 눈에 매료된 것이다.
광활한 욕심을 품은 이 눈동자에 인생을 건 것이다.
“그때가 오면 난 다시금 모든 영토를 다스리는 인간이 될 거야. 그때는 내가 오르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날 떠받쳐 그 자리에 올려주겠지. 대통령. 이 거대한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자.”
다시금 검지로 땅을 가리키는 아르드헨이었다.
“…결국 또다시 황제가 되겠다는 거네요?”
“황제가 아니야. 대통령이지. 황제는 이제 구시대의 명칭이야. 멋이 없지. 황제는 핏줄로 정통성을 확보하지만, 대통령은 민중이 채택하게 될 거야. 시장처럼.”
“암만 들어도 황제가 되겠다는 말 같은데요?”
아르드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크게 다를 건 없으니까.”
“거봐요.”
“그러니 어때? 내 양녀로 들어오는 건. 아주 재미있을 거야.”
밀레나는 아르드헨이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섰다.
“전 아직 엔첸세가 좋아요.”
“이제 엔첸세에 남은 거라고는 역사에 한 줄 기록될 명성뿐인데? 그 명성도 몇 년이 더 지나면 잊힐 테고.”
“그래서 더 좋아요. 사실 전 귀족 같은 거 귀찮았거든요. 형식이니 의무니, 질색이에요. 전 지금 이 생활이 좋아요.”
옛 황제가 입을 비죽거리다가 이내 울상을 지었다.
“모녀에게 다 차였군. 슬픈 일이야.”
아르드헨이 조끼 안쪽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받아둬.”
“이게 뭔가요?”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종이. 거기에는 붉은 잉크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시장 아르드헨.
“명함.”
“명함이요? 증명패 같은 건가요?”
“아니. 전단지와 비슷하다고 보면 돼. 가게에서 종종 뿌리는 거.”
“이런 게 효과가 있어요?”
“어쨌든 인상에 남으니까. 이런 걸 쓰는 건 나뿐이고. 뭐, 곧 유행하게 될 테지만.”
“이런 게 유행할까요? 종이 쪼가리인데.”
“‘미스터 리’라고, 유능한 친구가 알려준 거니까 효과가 있겠지.”
미스터 리?
‘리’라는 성이야 도처에 널렸으니 이것만으로는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었다.
시장이 유능하다고 할 정도면 대단한 사람일 텐데.
“볼일 다 봤으니 슬슬 가봐야겠네.”
아르드헨이 엄마를 바라봤다.
“이 근방에 계속 있을 거야?”
“아니. 거병 점검 때문에 이동해야 해.”
“그래? 어디로?”
“둔으로. 우리 정비사가 난리야. 임시방편으로 버티는 건 이제 힘들다고 하니 제대로 손봐야지.”
“둔이라. 나도 거기 가봐야 하는데.”
“새로운 거래처라도 찾게?”
아르드헨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만나봐야 할 젊은 친구가 한 명 있어. 추천을 받긴 했는데, 직접 봐야 평가할 수 있으니까.”
“그 애도 이번 일에 참여시키는 거야?”
“그건 아니고. 만나서 괜찮아 보이면 나랑 같이 일하자고 제안하려고.”
“아주 열심히 사네. 이제 좀 쉴 때도 됐는데 말이야.”
“죽은 다음에 쉬면 돼.”
엄마와 옛 황제가 악수를 나눴다.
“필렌, 다음에 볼 때까지 잘 살아 있으라고.”
“너야말로 그 목 잘 간수하고 다녀. 테인이 옆에 없을 때 더더욱 조심하고.”
“그래야지. 이젠 허스한테 부탁할 수도 없으니까.”
총수 이름이 슬그머니 나왔다.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저기, 총수님은 무사하신가요?”
“당연히 살아 있지. 그놈은 죽음하고는 연이 없는 놈이거든. 게다가 5년 전과 달리 해야 할 일도 생겼고.”
“해야 할 일이요?”
“언젠가 찾아올 지도 모르는 ‘외계인’을 대비하는 일.”
“네? 외계인이요? 그게 뭔가요?”
“그런 게 있어. 정 궁금하면 옆에 있는 네 엄마한테 물어봐.”
고개를 홱 돌려 엄마를 바라봤다.
“그렇게 봐도 말해줄 게 별로 없어. 나도 이해한 게 거의 없으니까. 네 앞에 있는 제멋대로인 남자가 주절주절 떠들기만 했거든.”
“지금 개요만 알아두면 되는 거니까.”
아르드헨이 망토에 달린 후드를 눌러썼다.
“갈게. 허스한테 전할 말 있어?”
“얼굴 좀 비추라고 해. 소문으로만 소식 전하는 것도 이젠 지겨워. 마음의 짐도 내려놨으니, 대화할 여유는 생겼겠지.”
“알겠어. 먹음직한 사과파이를 손에 쥐여주고 이쪽으로 보낼 테니, 사이좋게 옛 추억이나 읊으라고.”
“지겹긴 하지만… 오랜만에 먹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지겨운 사과파이?
“사과파이!”
잊고 있었던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아르드헨이 만년필을 언급한 덕분에 생각난 것이기도 했다.
“총수님께 만년필을 받았을 때 사과파이 연맹이라고 했어요. 그 뒤로 잊고 있었는데…….”
“허스가 너한테 그런 것도 말해줬어?”
“네. 엄마, 사과파이 연맹이 대체 뭐예요? 시장님도 알고 계신 거죠? 그리고 블루아이에 그려져 있던 마크! 그것도 연관이 있는 건가요?”
질문을 쏟아냈다.
“대단한 건 아니야. 근데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이따가 엄마랑 천천히 얘기하고, 지금은 대화해야 할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아?”
엄마가 턱짓으로 저 뒤에 서 있는 테인을 가리켰다.
역시 엄마 눈은 못 속인다니까.
아르드헨이 말했다.
“테인한테 할 말이 있는 거라면 얼른 가봐.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만날지 모르니까.”
“그래도 되나요?”
“후배의 관심을 모른 척할 정도로 야박한 친구는 아니야.”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테인을 향해 걸어갔다. 처음엔 잰걸음으로, 도중부터는 크게 걸음을 뗐다.
“무슨 일이죠?”
테인이 먼저 물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어서 여쭈러 왔어요.”
냉철해 보이던 테인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대답해 드리죠.”
기회를 얻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태세에 관한 거예요.”
“태세?”
“네. 용병단에 있는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테인 경의 태세를 직접 경험해 봤다고.”
“그렇군요. 일일이 상대하기 힘들 때는 그런 식으로 쉽게 처리했죠. 말보다는 검이 더 간편하니.”
“저도 볼 수 있을까요? 선배님의 태세를요!”
테인이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천천히 왼손을 움직였다. 손이 검집에 닿았다.
“선배라. 스콜라에 있었나요?”
“예. 생도에서 그치긴 했지만요.”
“그라운드 제로 이후 스콜라 자체가 사라졌으니 어쩔 수 없죠.”
검이 뽑혀 나왔다. 윤활이 잘된 매끄러운 검이었다. 이음새도 손질이 잘되어 있었고.
깔끔한 용모만큼이나 깨끗한 검이었다.
밀레나도 검을 치켜들고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실전처럼 대응해야 많은 걸 느낄 수 있으리라.
“선배님께서 생각하는 태세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정립하기가 어렵군요. 하지만 제가 본 태세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어요.”
테인이 어처구니없다고 느낄 만한 태세는 대체 무엇일까?
그런 걸 사용하는 사람은 또 누구고.
“혹시…….”
“이야기는 이걸로 하죠.”
중간에 말을 자르며 한 걸음 내딛는 테인이었다. 전의가 느껴진다. 공세를 취할 것 같았다.
방어보단 선공이 좋아 보였다.
때마침 빈틈도 보였다.
어쩌면 한 방 먹일 수 있지 않을까?
호승심과 기대감에 휩싸일 때였다. 테인이 짓쳐들어오는 게 보였다.
재빠른 돌진이었다.
하지만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받아넘기고 다음 수를 내놓으면 우세를 점할 수 있으리라.
뒤로 반걸음 빼며 다가오는 테인을 향해 검을 밀어 넣었다.
“어?”
내지른 검 끝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면전까지 들이닥쳤던 테인은 어느새 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검이 닿는 거리까지 접근해 왔었는데?
“제가 뭘 본 거죠?”
“의도를 본 겁니다.”
“의도요?”
환각 마법에 당한 것처럼 어이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