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밀레나는 옛 황제, 아르드헨을 바라봤다. 5년 전만 해도 먼발치에서만 볼 수 있었던 얼굴인데, 지금은 코앞에 있다.
괴리감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대화는 다 끝나신 건가요?”
아르드헨이 이마를 긁으며 말했다.
“일단 해야 할 말은 다 했지. 자네 모친께서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문제지만.”
아르드헨이 뒷짐을 지며 용병들 앞으로 걸어갔다. 누워있던 스미스가 얼굴을 구기며 일어섰다.
“뭐하러 온 거요?”
“말했을 텐데? 자네들하고 얘기하러 왔다고.”
“신경 긁는 거라면 그 입 닫고 물러서는 게 좋을 거요. 팔 한쪽이 이렇게 됐어도 그 목 치는데 아무런 문제 없으니까.”
“그러시겠지. 자네들의 검이라면 이 비루한 목쯤이야 단칼에 날려 보낼 수 있겠지. 하면, 지금 한번 해보겠나?”
아르드헨이 턱을 들며 스미스 앞으로 걸어갔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흉흉해졌다. 밀레나는 잔걸음으로 다가가 아르드헨과 스미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하시죠, 시장님. 아저씨도 적당히 하세요.”
옛 황제지만 지금은 무너진 성도의 시장일 뿐이다.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르완 용병단의 일원으로서 막아서야 한다.
밀레나는 눈에 힘을 주며 아르드헨을 바라봤다. 무표정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주던 아르드헨이 돌연 빙긋 웃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만년필은 잘 보관하고 있나?”
만년필?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갸웃했으나 곧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허스 경께서 주신 만년필이라면…… 네,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내가 허스한테 준 거였지. 허스가 멋대로 자네한테 건넨 거고.”
“양도했으면 주인이 바뀐 거니까 엄밀 따져도 시장님 것이 아니죠.”
설마 돌려달라고 하려는 건가?
엉뚱한 소리를 못 하도록 사전에 차단해 버렸다. 아르드헨이 손을 내저으며 털털하게 웃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네. 그냥 물어본 거니까.”
“정말인가요?”
“필렌과 다르게 사람을 참 안 믿는군.”
“다른 사람이면 저도 마음 편히 믿을 수 있어요. 하지만…….”
뒷말을 흐리며 아르드헨을 바라봤다.
“사람 여럿 죽여 가며 이권을 얻어낸 옛 황제는 못 믿겠다는 건가?”
눈썹이 내려앉으며 눈매가 얇아진다. 사람 속을 헤집어보는 눈빛이다. 진실을 기어이 찾아내 원하는 걸 갈취하고야 마는 괴인의 눈동자다.
차라리 마수와 대적하고 있는 게 속이 편할 정도였다. 위정자로서 꼭대기에 올랐던 인간은 이런 눈을 갖게 되는 걸까?
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졌다.
눈을 내리깔고 신하의 예의를 다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이 몸 전체를 흔들었다.
숙일까.
일단 죄송하다고 말할까.
“……솔직히 말하면 믿는 게 이상하죠.”
감정에 휘둘리던 몸을 다잡고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오기 섞인 말이라 좀 날카롭지만, 그래도 지는 것보단 나았다.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던 아르드헨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밀레나는 어깨에 손이 닿기까지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툭툭, 아드르헨이 어깨를 다독이더니 활짝 웃었다.
“자네 말이 맞아. 믿는 게 이상하지. 나 같은 놈을 믿는다면 그게 더 수상한 일일 거야, 안 그런가?”
쾌활한 웃음에 신경을 얼어붙게 만들던 감각이 사라졌다.
밀레나는 안도감 섞인 숨을 남몰래 내쉬었다.
“필렌과 정말 닮았군.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시선을 거둬간 아르드헨이 이번엔 용병을 바라봤다.
밀레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스미스가 주춤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걸.
아저씨도 그 눈빛을 봤구나.
“몰락한 황제와 잡담을 나누는 것도 나름 괜찮은 경험일 텐데, 어떤가?”
“정말 대화를 하자는 거요?”
“난 아까부터 그 말을 했네. 아니면 한물간 인간한테는 물어볼 것도 없다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자네들은 꽤 예민하게 날 대하던데.”
아르드헨이 용병들 사이로 걸어갔다. 다쳐서 누워있던 아저씨들이 슬쩍 몸을 세웠다.
“애써서 일어날 필요 없네. 나도 누울 거니까.”
농담이 아니었다. 옛 황제는 용병들 사이에 모포를 툭 깔더니 그대로 누워버렸다.
어디선가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을 시작으로 듬성듬성 떨어져 있던 용병들이 아르드헨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정말 황제가 맞아요?”
브릭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용병단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친구지만, 사교성이 좋아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애였다.
밀레나도 아르드헨 옆에 앉아 귀를 열었다.
“예전엔 황제였지. 지금은 ‘나타 시’의 시장이고.”
“예전에 성도에서 황제의 얼굴을 본 적이 있어요. 신년연설 때였죠.”
“그때랑 지금이랑 너무 다른가?”
“네. 다른 사람 같아요.”
브릭의 말에 아르드헨이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뒤로 넘겼다. 이마와 함께 인상을 완성시키는 눈이 훤히 드러나자 브릭이 아, 하고 탄성을 냈다.
“이러면 어떻지?”
“맞아요. 이 얼굴이었어요. 분위기는 약간 다르긴 하지만.”
아르드헨이 다시 앞머리를 내렸다.
“황제를 사칭해봤자 좋을 게 없는 시대야. 개죽음당할 수도 있는데 굳이 속일 필요는 없지. 그렇지 않아?”
“그렇죠.”
“내 신분이 그래도 의심된다면 자네들 대장한테 가서 물어보게. 저 인간이 뭐하던 인간이었는지. 고운 말은 안 나오겠지만 한때 황제였다는 건 증명해줄 테니.”
아르드헨이 스미스를 바라봤다.
“일단 자네의 말을 들어봐야겠군. 날 미워하는 이유야 백여 가지가 넘겠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를 말해주겠나? 뭔지 알아야 해명을 하든, 사죄하든, 아니면 바로 잡든 할 테니.”
“사죄? 사과할 마음이 있기나 한 거요?”
스미스도 자리에 털썩 앉았다.
“왜 없겠나? 혈통은 무색해지고 평판과 실력, 수완이 모든 걸 대변하는 시대가 됐네. 명성을 위해서라면 사과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옛 황제한텐 자존심 같은 것도 남아있지 않은 건가?”
“자존심. 미안하네만, 그런 건 내가 다섯 살 때 이미 버렸네. 난 4황자였지. 권좌에 오르기엔 너무도 머나먼 위치였어. 자존심 같은 걸 챙기기엔 무력했지.”
아르드헨이 짧게 하품했다.
“내 과거사가 궁금하다면야 해가 몇 번이 바뀌도록 떠들 순 있지만, 자네들이 그걸 궁금해할 것 같지는 않은데.”
“댁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관심 없수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그러면 불만을 말해보게. 뭐가 그리 싫어서 나한테 칼을 겨눴는지.”
아드르헨이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으론 스미스를 가리켰다.
“정말 다 대답해주는 거요?”
“전부 다는 힘들겠지. 내가 자네의 비밀스러운 성적 취향을 묻는다면, 자네는 대답해줄 건가?”
“……내가 생각한 황제하고는 정말 다른 사람이군.”
다들 비슷한 생각인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르드헨이 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다르진 않네. 자네가 상상해온 황제도 내가 맞아. 자리에 맞는 행동을 했을 뿐이지.”
“지금은 자리를 잃었으니 용병들과 뒹굴면서 얘기할 수 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난 이제 일개 시장이야. 자네들 같은 우수한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야 세력을 키울 수 있지. 그걸 위한 대담이라고 생각해주게.”
스미스가 한쪽 볼을 씰룩이다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그라운드 제로, 왜 못 막은 거요?”
“누구나 다 그게 궁금하겠지. 주동자를 확정했으면서도 파국과 직면한 무능한 황제.”
아르드헨은 말하는 것만으로도 지겹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대답하기에 앞서, 자네들은 길리우드가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란 걸 믿나?”
옛 황제가 던진 질문에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조작해낸 인물 아니냐, 있기야 하겠지만 세상을 멸망시키는 게 가능하냐, 그놈도 사실은 제국의 유력인사 아니었냐 등등.
“내가 사실을 말해도 자네들은 곡해할 테니 대충 듣게. 길리우드를 찾아냈을 땐 모든 게 진행된 후였네. 손 쓸 수 없는 사태에 돌입했지. 그렇기에 대피령을 내린 거였고.”
“정말 이 모든 게 한 인간이 꾸며낸 짓이란 거요? 그래서 세상이 달라졌다고?”
“믿든 말든 난 사실만 말하고 있으니 알아서 하게.”
브릭이 얼굴을 들이들며 물었다.
“제국 싱크탱크 내에서 위험한 연구를 하다가 이 지경이 됐다고 하던데, 시장님 말대로라면 이건 거짓이네요?”
“위험한 연구야 수없이 진행했지. 하지만 문제 된 적은 없어. 그런 거로 빌미를 잡힐 정도로 난 무능하지 않거든.”
물꼬가 트였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르드헨은 때론 농담조로, 때론 진지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황제가 그렇게나 좋았소? 무리한 전쟁을 이어 나갈 정도로?”
침묵하던 하우스가 입을 열었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삼촌이라 참여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밀레나는 하우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르드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쪽은…….”
“군부에서 한때 밥 먹던 사람이요. 안둔에서 혹한을 맞으며 싸우기도 했지.”
“안둔의 생존자라. 유능한 병사였군.”
“대답해보시오. 황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연합왕국과 시시한 전쟁을 이어나간 거, 후회하지 않소?”
“후회라. 난 내정을 다질 시간이 필요했고, 마침 명분이 들어왔지. 결정에 후회는 없네. 다만, 좀 더 잘 해내지 못한 건 아쉽긴 하군.”
“당신은 그저 살인광일 뿐이요. 더러운 왕관을 쓴 개새끼지.”
퉤, 하고 아르드헨 쪽으로 침을 뱉는 하우스였다. 아르드헨이 얼굴 앞에 떨어진 침을 보며 말했다.
“내가 참회하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하면, 자네 마음이 편해지겠나?”
“운다고 해서 죽은 친구들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
“옳은 말이야. 눈물은 쓸모없지. 비참한 자의 변명 같은 거거든. 그렇기에 난 우는 것보다 다른 행동을 택하네. 자네들이 흘린 피로 내 입지는 공고해졌고, 난 그걸 기반으로 내가 원하던 이상을 실현해 나갔지. 중간 어그러져서 이 모양이 됐지만, 그래도 아직 포기한 건 아닐세.”
“또다시 남들 머리 위에 올라 희생을 강요할 셈인가?”
“필요하다면. 난 그걸 위해서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걸세. 날 위해 기꺼이 죽어줄 사람들을 모으는 중이지.”
주변이 조용해졌다.
아르드헨이 몸에 뭍은 흙을 툭툭 털어낸 뒤 일어섰다.
“아쉽게도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건 한 사람뿐인 것 같군. 더 많았으면 좀 더 재미있었을 텐데.”
“당신은 곱게 죽지 못할 거요.”
하우스가 씨근덕거렸다.
“나도 내가 곱게 죽길 바라진 않네. 미적지근한 죽음은 내 쪽에서 사양이야.”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보지, 몸을 돌리며 아르드헨이 남긴 말이었다.
밀레나는 가늘게 숨을 뽑아냈다. 하우스가 도끼를 쳐들고 달려들 줄 알았으니까.
“삼촌, 괜찮아요?”
하우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기분이 더러우면서도 상쾌해. 한 번쯤은 면상에 대고 말하고 싶었으니까.”
“전 조마조마했어요. 삼촌이 저 사람을 죽이겠다고 날뛸까 봐.”
“내가? 왜?”
영문을 모르겠다며 눈을 꿈뻑이는 하우스였다.
“…화나고 억울한 거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 사람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거고요.”
“미운 건 맞아. 화나는 것도 맞고. 하지만 그다지 억울한 건 없어.”
하우스가 코를 찡그리며 멀어지는 아르드헨을 바라봤다.
“보상은 철저했으니까. 저놈 말대로 눈물로 때우지는 않았거든.”
하우스가 눈을 감으며 뒤로 누웠다. 한데 모였던 용병들도 하나둘씩 제자리로 돌아갔다.
밀레나는 저 멀리 걸어가는 아르드헨을 바라봤다.
“알 수가 없네.”
아저씨들도, 옛 황제도.
도통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