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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46화 (219/558)

제246화

지어낸 얘기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어?

밀레나는 호프의 얼굴을 뜯어봤다. 놀리려고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그때 만난 사람이에요?”

“맞아요. 틀림없어요.”

“진짜죠? 이번엔 장난 아니죠?”

“이번 게 거짓말이면 제 다리를 드리죠.”

밀레나는 호프의 의족을 바라봤다.

“그건 필요 없어요.”

“꽤 비쌉니다.”

“아저씨 쓰셔야죠. 아무튼, 제가 가볼게요.”

다짜고짜 대장이 나설 순 없는 법. 엄마를 대신해 다가오는 두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다른 용병들도 낯선 방문객을 발견했는지, 하나둘씩 뒤쪽으로 모이고 있었다.

밀레나는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낸 후 정면을 응시했다. 다가오던 두 남자가 5m 앞에서 멈춰 섰다.

잠깐만.

정면에서 본 남자의 얼굴이 꽤 눈에 익었다. 어디서 봤지?

여행의 흔적이 잔뜩 묻은 옷과 달리 얼굴은 말끔했다. 수염도 잘 다듬었다. 장거리 여행객인 것 같은데, 치장에 신경 쓸 여유가 있는 건가?

“‘르완’의 사람들을 만나러 왔습니다.”

앞에 선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굵다. 밀레나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 목소리도 어디선가 들어봤다.

“일단 잘 찾아오셨어요.”

밀레나가 외쳤다.

“르완 용병단, 맞습니까?”

“네. 맞아요. 그쪽은요?”

앞서서 말하던 남자가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돌아봤다. 누가 윗사람인지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밀레나는 뒤쪽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앞에 선 남자와 달리 몰골이 엉망이었다.

아니, 저게 일반적인 모습일 것이다. 앞으로 나선 남자가 워낙 깔끔한 거고.

“르완의 대장과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말끔한 남자가 말했다.

밀레나는 목에 힘을 줬다.

“제가 한 말을 못 들으신 거 같은데요, 용건 이전에 신분을 밝혀 주셔야죠.”

“저와 대화 중이신 숙녀분께서는 용병단을 대표할 수 있는 위치입니까?”

어투가 고상하다. 단어 사이사이에 배치한 호흡에서 고양이 느껴진다.

귀족들의 옛 화법.

그라운드 제로 이전에 귀족이었던 사람인가?

밀레나는 뒤쪽을 가리켰다. 한데 모여 구경 중인 아저씨들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보이시죠? 손님 맞이할 수 있는 수준은 돼요. 전 르완 용병단의 밀레나입니다. 이런 시대에 예의를 찾는 게 우습지만, 그쪽에 계신 분들은 이게 편할 거 같으니.”

치맛자락을 잡는 시늉을 하며 인사를 올렸다.

하하하, 호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쪽에 서 있는 남자였다.

밀레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한 채 뒤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인사가 웃을 일은 아닌데 말이죠.”

“미안하네. 정말로 즐거워서, 그리고 반가워서 웃은 거니 너무 미워하진 말아주게.”

뒤쪽에 서 있던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4m, 3m, 2m. 밀레나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저씨들이 슬그머니 병장기 쪽으로 손을 뻗는 게 보였다.

밀레나는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왼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다가오는 남자한테서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반가움만 가득할 뿐이다.

코앞에 선 남자를 슬쩍 올려다봤다. 더벅머리에 다듬지 않아 제멋대로 꼬인 수염.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때문에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서 보니 이상하리만치 낯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두 사람, 대체 어디서 본 거지?

“자네 어머니를 만나러 왔네.”

“어머니께 볼일이 있는 사람은 많죠. 너무 많아서 탈일 정도로요.”

밀레나는 더벅머리 안쪽에 숨은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겠지. 르완이라면 이름난 사냥꾼들이니까.”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권해왔는데 피할 이유는 없었다. 호기롭게 그 손을 붙잡았다.

“옛 성도의 시장이 만나러 왔다고 전해주게. 반갑게 맞아주진 않더라도 퇴짜를 놓지는 않을 테니까.”

가볍게 손을 쥔 다음 뒤로 빼는 남자였다. 밀레나는 멍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잠깐 사고 능력에 문제가 생겼다.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맞다면 이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사람이 왜 찾아온 건지.

한순간 폭발해버린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얼굴이 눈에 익은 게 당연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 게 당연했다.

뒤에서 근엄한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는 남자.

이제야 생각났다.

허스 경 이후 최고의 검사라고 칭송받던, 수호기사 테인 오첸.

그리고 이쪽은…….

밀레나는 코앞에 있는 추레한 몰골의 남자, 아니, 옛 제국의 황제를 보며 말했다.

“자, 잠시만요.”

말을 더듬고 말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놀라서 쓰러지지 않은 게 어디인가?

뒤로 홱 돌았다. 긴장한 채 째려보는 아저씨들이 보인다.

밀레나는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테인을 고깝게 바라보는 스미스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저씨! 웃어요.”

“네?”

“웃으라고요!”

스미스가 곧바로 헤벌쭉 웃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눈치를 줬다.

눈치로 목숨을 부지해온 사람들답게, 곧바로 무기를 숨기고 환영의 미소를 보냈다.

“누군데요?”

호프가 속삭였다. 밀레나는 황제 쪽을 힐긋 본 뒤 말했다.

“아르드헨, 옛 황제요.”

“아가씨, 농담도 참.”

“진짜예요!”

주변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밀레나는 재빨리 엄마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얀스와 함께 거병을 살피던 엄마가 뚱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호프 괴롭히는 건 끝났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엄마, 황제가 왔어요.”

“황제?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아르드헨이요! 옛 황제, 현 시장!”

“그 인간이?”

툭 튀어나온 ‘그 인간’이란 말에 헛웃음이 배어 나왔다. 맞다, 황제도 황제지만 엄마도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왜 온 걸까요?”

“아쉬운 게 있어서겠지. 옆에 테인도 있든?”

“네.”

“요즘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진짜였네.”

기름때 묻은 장갑을 손에 낀 채 엄마가 움직였다. 밀레나는 엄마의 손을 붙잡았다.

“그거 끼고 가게요?”

“벗기 귀찮아.”

“그래도…….”

“상관없어. 서로 체면 차릴 사이는 아니니까. 그리고, 이젠 황제도 아니고.”

황제도 아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긴 매한가지였다.

“근데 애들 사이에 아르드헨을 두고 온 거야?”

엄마가 말했다. 밀레나는 아, 하는 탄식을 흘리며 뒤쪽을 돌아봤다.

저 멀리 옛 황제와 대치 중인 용병들이 보인다.

“얼른 가 보셔야겠는데요?”

상황을 지켜보며 얀스가 말했다.

“재미있어 보이니 좀 더 지켜보고 싶은데.”

“이상한 소리 마시고 얼른 가세요.”

얀스에게 등을 떠밀려 한 걸음 떼는 엄마였다. 밀레나는 느릿하게 걷는 엄마를 뒤로한 채 신경전이 오가는 현장으로 뛰어갔다.

“잠깐만요!”

밀레나는 테인과 스미스 사이에 끼어들었다. 스미스는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 들 기세였다.

“아가씨, 비켜봐요. 진짜 황제가 맞는지 아닌지 확인 좀 해보게.”

위아래로 훑는 눈빛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진심인 것 같았다. 뒤쪽에 서 있는 다른 용병들도 고까운 눈빛을 던져대고 있었다.

“그만해요. 용병단을 찾아온 손님이에요.”

“손님 이전에 황제죠. 세상을 이 꼴로 만들어버린 아주 위대하신 분.”

스미스가 고개를 쭉 빼며 테인 옆에 있는 아르드헨을 바라봤다.

“정말 황제 맞습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5년 전에는 그런 자리에 있었지.”

“아니라고 발 빼지 않는 건 마음에 드네.”

스미스의 왼손이 움직였다. 칼을 쥘 기세였다. 밀레나는 스미스의 팔목을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지 마세요.”

눈을 살짝 치켜뜨며 재차 고개를 저었다. 냉랭한 눈빛으로 아르드헨을 보던 스미스가 이내 뚱한 표정을 짓는다.

“한때 모시던 분이라고 막는 건가요?”

“그런 거 아니에요. 아시잖아요.”

“아니면 말리지 마세요. 우린 저놈한테 물어봐야 할 게 많으니까요.”

기어이 칼집에 손을 대는 스미스였다. 그와 동시에 쩌렁쩌렁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왕 만났으니 한이라도 풀어야지!”

성큼 다가온 엄마가 스미스를 비롯해 다른 용병들을 바라봤다.

“이 낯짝 두꺼운 인간한테 묻고 싶은 게 많을 거야, 그렇지?”

“예, 더럽게 많죠.”

엄마가 테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랜만이야.”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필렌 경.”

“경은 무슨. 그런 건 5년 전 저 땅 밑으로 사라졌어. 그보다 아르드헨한테 불만이 있는 애들이 이렇게나 많아.”

“그런 것 같군요.”

“내가 설득해서 돌려보낼 수도 있지만 그러면 뒤통수가 근질거리겠지?”

테인이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자리를 만들어 주신다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곁에 선 아르드헨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난 뭐가 됐든 찬성이니까 알아서들 해. 피 터지게 싸우는 것도 좋고, 내 말을 얌전히 들어주는 것도 좋고.”

“그러면 우선 애들 진정 좀 시키자. 화가 머리까지 올라와서 눈 돌아가기 직전이니까.”

엄마가 용병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옛 황제, 현 시장인 저 인간한테 불만이 있거나 묻고 싶은 게 있는 놈들은 앞으로 나와 봐.”

스미스를 선두로 열한 명의 용병이 앞으로 나섰다. 밀레나는 용병들의 얼굴을 살피다가 저만치 떨어져 있는 호프를 발견했다.

“좋아. 다들 무기 들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저씨들이 각자 무기를 손에 쥐었다. 밀레나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엄마, 뭐 하는 거야.”

“뭐 하긴. 머리 식히려고 준비 중이지.”

머리를 식힌다면서 병기를 쥐게 하는 건 무슨 논리인가?

“테인! 한 번에 가도 상관없지? 아니면 하나씩 보낼까?”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습니다.”

“거절하지 않는 그 성격, 변함이 없네. 그러면…….”

엄마가 손가락을 들어 올려 테인을 가리켰다.

“가서 분풀이해. 가능하다면 죽여도 좋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엄마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지?

기다렸다는 듯이 스미스가 달려갔다. 다른 용병들도 뒤를 따랐다.

밀레나는 경악하며 테인 쪽을 바라봤다. 수호기사라고 한들 십여 명의 노련한 용병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건…….

텡, 귀를 따갑게 하는 쇳소리가 뻗어 나가던 걱정의 줄기를 잘라버렸다.

밀레나는 손목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선 스미스를 바라봤다. 아저씨의 곡도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한 호흡도 버티질 못했다.

단 한 번 그어진 검에, 난전에서 빛을 내는 스미스의 검이 나가떨어졌다.

“원래도 괴물이었는데, 더 괴물이 된 것 같네.”

엄마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 * *

“좀 살살해줘요.”

밀레나는 눈을 찌푸리며 간크의 팔뚝을 때렸다.

“엄살 그만 부리고 얼른 약이나 발라요. 퉁퉁 붓기 전에.”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판 곳곳에 아저씨들이 누워 있었다. 다들 손목과 발목, 둘 중 하나를 붙잡으며 끙끙 앓고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네.”

싸움이 끝나기까지 몇 분 걸리지도 않은 것 같았다.

테인의 검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무기를 쳐내고 손목 혹은 발목을 강타했다.

만약 검면이 아니라 날로 그었다면, 아저씨들은 사이좋게 의수와 의족을 달아야 했을 것이다.

“이럴 것 같더라고요.”

호프가 혀를 차며 말했다.

“아저씨가 만났다는 사람이 테인 경이었네요.”

“저도 오늘에서야 그 인간이 저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됐네요. 같은 인간이 맞는지, 의심될 정돕니다.”

“저도요. 그렇게 깔끔한 검술이라니.”

한숨과 감탄을 섞어 말할 때였다.

“테인의 검술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긴 하지.”

뒤쪽에서 목소리가 불쑥 솟아났다. 밀레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자네들,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많다고 했지?”

옛 황제가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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