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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45화 (218/558)

제245화

밀레나는 목검을 쥔 채 건너편 호프를 바라봤다. 왼쪽 의족으로 땅을 비비며 자세를 잡는 호프였다.

“설거지 일주일, 무르기 없기입니다?”

호프가 말했다.

“알겠어요.”

밀레나는 호프의 왼발을 주시했다. 의족의 배터리를 소모해 순간적으로 치고 나오는 호프의 전법은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한눈팔면 노련한 사냥꾼에게 당하고 말 것이다.

거리를 재며 조금씩 움직였다.

호프가 껄렁한 웃음을 지으며 오른쪽으로 돌았다.

“제 태세에는 좀 익숙해졌습니까?”

“아직요.”

스콜라에서 전투를 배울 땐 단독 행동보다는 팀워크에 중점을 줬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며 보다 효율적으로 적을 진압, 섬멸하는 방식을 몸에 익힌 것이다.

하지만 용병들의 전투는 스콜라의 전투와 사뭇 달랐다.

용병들은 정형화된 전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팀을 꾸려야 하는 입장이라 단독 행동이 기본 바탕에 깔려 있었다.

단체보다는 개인이, 다수로 이루어진 전술보단 개인의 기량을.

“전 아가씨의 ‘태세’가 아주 눈에 훤합니다.”

“그래요?”

말을 받으며 가볍게 목검을 내질렀다. 타격이 목적이 아닌 살짝 떠보기 위한 공격.

호프가 버클러로 목검을 툭 쳐냈다.

“저번에도 말했죠? 아가씨는 오른발을 잘 사용한다고. 근데 그게 약점이기도 해요. 태세란 게 버릇이잖아요? 그래서 오른발만 잘 보고 있으면 방향 예측이 쉽죠.”

“알고는 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네요.”

“그렇죠. 태세란 게 자기가 갈고닦아 온 길이니까요. 그걸 통한 속임수이기도 하고.”

이번에는 오른쪽 다리를 노렸다. 의족 착용자들은 의족이 아닌 발에 무게를 싣는 경우가 많았다.

양쪽 다 의족이면 소용없는 수지만, 호프의 오른쪽 다리는 말랑말랑한 살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버클러가 검의 진로를 막아섰다.

탕!

경쾌한 소리가 났다. 공격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오른발이 약점이라고 하니까 곧바로 페인트를 주네요. 근데 그것마저도 보여요.”

“이번엔 먹힐 줄 알았는데.”

“이론 공부야 제가 아가씨를 따라갈 리가 있나요. 스콜라에서 배운 사람인데. 하지만 저도 이곳저곳 구르면서 저만의 태세를 갖췄습니다. 쉽게는 못 뚫어요.”

“그래도 두드리다 보면 한 번은 걸리지 않겠어요?”

기합을 지르며 앞으로 몸을 날렸다. 실전이라면 입을 다물고 호흡부터 가다듬겠지만, 지금은 대련이었다.

타앙, 탕!

내지름과 동시에 튕겨 나온 목검을 재빨리 회수한 후, 이번에도 다리를 노렸다.

호프가 왼쪽 의족을 쓰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지금이다.

상체를 기울인 채 체중까지 실어 앞으로 달려갔다. 호프의 버클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양손으로 목검을 쥐고 있는 힘껏 아래서 위로, 방패를 날려버릴 목적으로 검을 그었다.

깡!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버클러 뒤에 숨어 있던 호프의 옆구리가 보였다.

됐다!

몸을 틀며 실낱같은 틈에 검신을 비집어 넣었다.

무너진 자세, 어그러진 중심, 튕겨 나간 방패.

승기를 잡았다고 자부한 순간, 턱 아래쪽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왔다.

의족.

호프의 왼발이었다.

재빨리 왼손 팔뚝으로 턱밑을 보호했으나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툭, 곧게 세운 의족 끝이 팔뚝에 닿았다.

실전이었다면 팔뼈가 으스러지고 나아가 두개골이 흔들렸을 것이다.

밀레나는 슬쩍 목검을 바라봤다. 목검 끝은 옆구리에 닿아 있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목검이 옆구리에 닿기 직전, 호프가 말했다.

“그거 안 좋은 버릇이에요.”

“네, 알아요.”

변명할 수 없는 패배였다.

한숨을 내쉬며 목검을 회수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말 딱 그 정도 차이였다.

“읽은 거예요?”

“말했잖아요. 아가씨는 오른발을 잘 써서 훤히 보인다고.”

“의식해서 바꿨는데. 태세에 변화가 있지 않았어요?”

“그렇게 휙휙 바뀌는 버릇이라면 버릇이라고 부르지도 않아요. 전투 감각은 머리보단 몸으로 익히는 거고, 태세 역시 마찬가지죠. 아가씨가 그간 쌓아온 노력이 태세로 나타나는 건데, 그걸 한순간 바꿀 수 있다면 저한테 지진 않았겠죠.”

태세.

그 오묘한 단어에 밀레나는 눈을 찌푸렸다.

스콜라 시절에도 신체술과 더불어 수없이 들은 전투 이론이었다.

밀레나는 자리에 철퍼덕 앉았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태세가 뭔지, 잘 감이 안 잡혀요. 스콜라 때도 교관님들은 태세에 관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거든요.”

“애매한 거라 그래요. 누구는 태세는 버릇이라고 하고, 누군 페인트 동작의 일종이라고 하죠. 또 어떤 사람은 심리적 우위를 점하는 잔기술이라 부르고.”

“정형화되지 않은 걸 배우려 하려니 머리가 아프네요.”

호프가 옆에 앉았다.

“실전을 거듭하다 보면 아가씨도 나름의 태세를 익힐 수 있을 겁니다.”

“방금 아저씨처럼요?”

밀레나는 버클러를 바라봤다.

“분명 방패를 쳐냈을 때 아저씨 중심이 무너졌어요. 완벽한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왼발이 턱 밑에 있었죠.”

“그걸 유도한 거니까요. 아가씨 정도의 눈썰미라면 빈틈을 발견할 거라 예상했고, 버틀러를 먹잇감으로 내놨죠.”

“제대로 당했네요. 검술 대련 때 익혀왔던 모든 기술이 참 쓸모없게 느껴져요.”

호프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아가씨도 아시겠지만, 아가씨의 검은 참 듬직해요. 곁에서 호흡을 맞출 때 편하고요. 짝을 이루는 협동전에서 아가씨는 저보다 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방식이 도움이 안 돼요. 마수 사냥은 팀플레이도 중요하지만, 심도가 높아지면 결국 거병전으로 가야 하잖아요? 거병전은 개인 역량이 중요하고.”

밀레나는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사실 다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검의 대가라면 개인전이든 협동전이든 능숙하게 소화해낼 테니까.

순전히 기량이 모자라서 못 따라가는 것이다.

웃으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프가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태세에 대해 재미난 소문이 있었죠.”

“소문이요?”

“저희 용병들 사이에서 태세란 제가 보여줬듯 빈틈을 일부러 드러내고 역으로 찌르는 수법을 말합니다. 하지만 진짜 태세는 이와 다르다는 얘기가 있죠.”

“진짜 태세요?”

호프가 구불구불한 턱수염을 매만졌다.

“얘기하기 전에 아가씨께 되묻고 싶네요. 스콜라 내에서 소문 같은 거 없었나요? 태세에 관한 거요.”

“태세에 관한 잡설이야 무수히 많았죠. 하나하나 기억하기 힘들 정도고요. 아,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라 기억나는 것도 있어요.”

“어떤 거죠?”

밀레나는 목검에 손을 올렸다.

분명 수업 중에 들은 얘기였다.

기억을 되짚으며 입을 열었다.

“상대의 전투 감각을 엉망으로 만드는 힘.”

호프가 빙긋 웃었다.

“제가 들은 소문하고 일치하네요.”

“이런 소문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나 봐요?”

밀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자가 사용하는 ‘태세’는 조잡한 속임수가 아닌, 상대의 감각을 엉망으로 만든다고 들었다.

“와전된 거겠죠. 상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자세만 잡는데, 거기에 속아서 헛손질하고 자빠지고. 이런 게 될 리가 없잖아요.”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죠.”

호프가 말했다.

근데 한때는 이라니?

“아저씨, 뭔가 알고 있는 거죠?”

호프의 눈동자가 위로 향했다. 맑게 갠 하늘을 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설거지를 이 주간 해준다면…….”

“그럴 거예요? 쪼잔하게.”

“쪼잔하다뇨. 공짜를 바라는 게 더 염치없는 법입니다.”

“듣고서 별거 아닌 얘기라면요? 환불도 안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 아가씨가 결정해야죠. 궁금증을 풀고 설거지를 할 건지, 아니면 이대로 넘어갈 건지.”

“…약았어요.”

“세상은 원래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밀레나가 호프 쪽으로 몸을 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번 건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었다.

“좋아요, 설거지 제가 다 할게요. 이제 말해줘요.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2년 전쯤이었죠. 아직 이 용병단에 들어오기 전이었고, 전 작은 마수들을 사냥하고 다녔습니다.”

“혼자서요?”

“네. 몸집이 작은 것들은 덫을 놓아 잡을 만했거든요. 아무튼 그러던 어느 날, 숲길에서 두 남자와 마주쳤습니다.”

이 아저씨는 정말 말을 맛깔나게 한다니까. 밀레나는 집중해 호프의 말을 들었다.

“누구였는데요?”

“정체는 알 수 없었어요. 하지만 위험해 보였죠. 세상이 뒤바뀌고 난 후, 마수보다 인간이 더 무서워졌으니까요.”

밀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 사람과 사람 간의 신용은 정말 동화 속 보물처럼 귀한 것이 되었다.

“전 거리를 두고 그자들을 관찰했죠. 혹여나 덤벼 온다면 상대할 생각으로요.”

“그럴 땐 도망쳐야죠.”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비장의 한 수도 있었고.”

그렇게 말하며 의족을 가리키는 호프였다.

“두 남자는 말없이 다가왔어요. 전 비켜서라고 했어요. 숲길이라 옆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전 그러고 싶지 않았거든요.”

“아저씨는 은근히 자존심을 세우니까요.”

“네, 맞아요. 그자들은 멈추지 않았어요.”

“서로 자존심 대결에 들어갔네요? 그래서요?”

호프가 턱을 살짝 내밀고 인상을 썼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전 경고했죠. 이 지역에서 나만큼 유명한 사냥꾼은 없으니까 얼른 비켜서라고.”

“와, 유치해.”

“그때는 그게 나름 자랑이었어요. 마을에서도 추켜세워 줬고. 근데 그 남자들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또 걸음을 뗐죠.”

“실력 행사를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죠?”

“당연한 말씀. 살짝 놀려주려고 했어요. 위험한 놈들이라면 다리 한짝씩 잘라내고 용돈도 벌 겸.”

“아저씨도 만만치 않게 못됐네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다들 그렇게 삽니다. 야밤에 숲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서로 목숨 내놓을 각오 하는 거죠.”

호프가 목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때도 이런 식으로 위협을 했죠. 그다음…… 전 애꿎은 허공을 향해 열심히 칼을 휘둘렀죠.”

“갑자기요? 왜요?”

호프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그러고 있었어요. 전 분명 봤거든요. 앞에 서 있는 남자가 제게 달려와 공격하는 걸요. 그걸 멋지게 쳐내고 반격하려 했는데, 어라? 정신 차리고 보니 두 남자는 제 옆을 지나가고 있었어요.”

이게 무슨 말이지?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왜 그러신 거예요?”

“저도 궁금했어요. 전 분명히 봤거든요. 그 남자가 덤벼 오는 걸.”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헛것이었다?”

“맞아요. 저는 놀라서 지나쳐 간 남자를 불렀어요.”

“와, 아저씨 염치도 없네요. 공격하려 했으면서.”

“그 정도로 신기하고 궁금했거든요. 처음에는 마법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속을 뒤틀리게 하는 마나 파장은 없었죠.”

“……설마 그게 태세였다는 거예요?”

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말했어요.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줬다고. 그 순간 알게 됐죠. 이게 그 소문으로만 듣던 태세구나!”

과장된 몸짓을 섞으며 말하는 호프였다.

멍하니 얘기를 듣던 밀레나가 인상을 쓴 건 그때였다.

눈을 갸름하게 뜨고 호프를 바라봤다.

“아저씨.”

“네?”

“설거지시키려고 대충 지어낸 거죠?”

“……뭐, 알아서 판단하시죠. 그게 성인의 덕목이니까.”

호프가 왼쪽 다리에 손을 얹으며 일어섰다. 능글맞게 웃는 모습이 여지없이 사기꾼이었다.

“다시는 안 믿을 거예요. 이번엔 진짜예요.”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었죠?”

풋, 웃으며 걸어가던 호프가 돌연 멈춰 섰다.

저 멀리, 야영지를 향해 걸어오는 두 남자가 보였다.

서른 중반에서 마흔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단출한 배낭과 닳은 망토.

흔히 볼 수 있는 복장이다.

“아저씨?”

밀레나는 호프를 바라봤다. 얼굴이 경직돼 있었다.

“……저 사람입니다.”

“네?”

“저 사람이에요.”

호프가 손을 들어 다가오는 두 남자를 가리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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