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거대한 하얀색 팔이 지면을 강타하자 굉음과 함께 지층이 뒤틀렸다.
콰아앙!
비산한 돌멩이들 사이로 정체불명의 남자가 보인다.
하얀색 팔의 주인.
수십 미터 상공에서 마치 신처럼 지상을 내려다보는 남자.
필렌은 거병의 감각확장을 최고 단계까지 올리려 했다.
-감각확장 5단계 이상은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조약돌’ 오토마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유를 되묻기 전에 설명이 시작됐다.
-메인테넌스 예약 시행 및 조종사 안전을 위해 사용이 불가합니다.
올란트가 잠가놓은 거구나.
오버홀 일정이 잡혀 있으니 이해는 간다지만…….
“하필이면 이럴 때.”
강가를 향해 빠르게 치고 달렸다. 시각 정보 처리가 예상보다 늦었다. 시험기를 들고 실전에 임하는 건 역시 도박수인가.
푸우우, 액상근육에 휘감긴 실린더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테스트 때는 듣지 못했던 소리다.
좋은 징후는 아니었다.
발목 관절에 이상이 생긴 걸까?
“기체 상태 어때?”
이동 중인 하얀색 팔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상 가동 범주 안에 있습니다.
“왼발 D-1 모듈은?”
-문제없습니다.
“확실해?”
-확실이란 모호한 대답은 내놓을 수 없습니다.
“어련하시겠어.”
늘어진 신경을 다잡으며 다시 거병을 움직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늘이 점점 붉은빛으로 물들고 있고, 땅에는 거대한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되질 않았다.
필렌은 하얀색 팔을 주시하며 거리를 조금씩 좁혔다. 가까이 가서 확인해야 했다. 가능하다면 저 위에 있는 남자까지 생포하고.
“저건…….”
강 너머, 연합왕국 쪽에서 검은색 거병이 튀어나왔다. 표준 모델보다 훨씬 큰 거병이다.
하지만 하얀색 팔 앞에서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채찍처럼 휘저은 팔에 거병이 나가떨어졌다.
마법공학의 정수,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전략 병기가 1분도 버티지 못하고 고철덩이로 전락했다.
그때였다.
소리도 없었다. 경고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죽음이 코앞까지 왔다는 걸.
필렌은 온몸을 비틀었다. 신경을 공유한 거병 역시 왼쪽으로 틀어졌다.
카아앙!
붉은 줄기가 조약돌의 어깨를 쓸고 지나갔다. 외장갑이 없는 왼팔은 그 한 번의 공격으로 박살이 났다.
-좌완 파손. 신경 격리에 들어갑니다. 감각확장 3단계로 조정합니다.
시큰한 느낌이 어깨에 맴돌았다.
감각확장 단계가 낮아서 거병의 반응도 한 박자 느렸다.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는데.
“제약 사항 제거 못 해? 반응이 느려.”
-탑승자의 안전을 위해…….
앵무새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블루아이였다면 알아서 서포트해 줬을 텐데.
이 상태로 접근하는 건 위험했다.
격납고 쪽으로 방향을 틀 때였다.
강줄기를 따라 대피 중인 사람들이 보였다. 복장을 보아하니 연합왕국 쪽 군인인 것 같았다.
잠깐 고민하다가 진로를 바꿨다.
성능이 제한된 조약돌이지만 저들을 구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거병의 발이 움직였다. 점검을 막 마쳤을 때처럼 경쾌하진 않으나 문제 될 건 없었다.
연합왕국 쪽 군인들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거병을 올려다봤다.
“상류로 옮겨줄 테니까 알아서 살아남아.”
군인을 오른손에 들고 연합왕국 쪽 영토로 뛰어들었다. 갈라지는 대지를 박차고 구덩이를 넘었다.
하얗게 질린 군인을 땅에 내려놨다.
그사이 하늘이 완전히 붉게 물들어 버렸다.
“고, 고맙습니다.”
군인들이 인사를 남기고 숲 쪽으로 달려갔다. 필렌도 조약돌을 움직였다.
땅을 뚫고 나온 붉은 줄기가 사방을 휘젓고 있었다.
여기만 이런 건지, 아니면 대륙 전체가 이 꼴이 된 건지.
격납고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저 멀리 무너진 연구동과 으그러진 격납고가 보였다. 상태가 심각했다.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다.
연구동 앞에 연구원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배낭을 하나씩 메고 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필렌은 거병에서 뛰어내렸다.
책임연구원이 넋 나간 얼굴로 다가왔다.
“필렌 경. 교수와 치프께서…….”
“덴스와 올란트가 왜?”
“연구동 안으로 들어갔어요. 빼 오지 못한 자료가 있다고.”
미친놈들이 정말.
까딱하면 죽게 될 상황에서 연구 자료 챙기자고 안으로 들어가다니.
구그그그, 땅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연구동에서 연구원 한 명이 튀어나왔다.
덴스와 올란트는?
필렌은 몸에 차고 있던 무장을 모두 떼어냈다. 가벼운 차림으로 안으로 뛰어갈 준비를 마쳤다.
“필렌 경!”
책임연구원이 붙잡아 세웠다.
“위험해요.”
“알아. 그래도 잉크물만 만지고 산 애들보단 낫지 않겠어?”
지진이 멈췄다. 지금이 기회였다. 여진이 찾아오기 전에 연구동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신체술을 극한까지 사용해 지면을 박찰 때였다. 뽀얗게 솟은 먼지를 뚫고 덴스가 나왔다.
필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별 탈 없이 돌아왔구나.
마음이 놓인 것도 잠시, 불길함이 엄습했다.
덴스의 표정이 이상했다. 무엇보다 같이 나와야 할 올란트가 보이지 않았다.
필렌은 덴스에게 다가갔다. 머리에 피를 흘린 채 멍한 얼굴을 한 덴스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덴스, 올란트는?”
대답이 없었다.
필렌은 인상을 쓰며 재차 크게 말했다.
“덴스 교수! 치프는 어디에 있어?”
그러자 꿈에서 막 현실로 돌아온 사람처럼, 덴스가 맥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죽었어요.”
“뭐?”
그 순간, 연구동이 크나큰 파열음을 내며 땅 밑으로 가라앉았다.
* * *
눈을 뜬 필렌은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오랜만에 꿈을 꿨다.
그것도 기분 나쁜 꿈을.
5년 전 일이 어제처럼 느껴지는 이 더러운 감각.
필렌은 침낭을 벗어 던지고 텐트 밖으로 나왔다.
한쪽에서 불을 지펴놓고 감자를 굽던 부하가 멀건 눈으로 쳐다본다.
“대장, 웬일로 이 시간에 일어났어요?”
필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트기 전 보랏빛 대기가 침울한 기분에 박차를 가했다.
“하늘이 왜 이렇게 어두워.”
“새벽이니까요.”
“새벽에 좀 밝으면 안 돼? 시원하게 푸른색이면 좋잖아.”
“또 왜 그러세요. 악몽이라도 꿨어요? 아니지, 꿈 따위에 신경질 낼 위인이 아니신데. 음, 밀레나가 또 말을 안 들어요?”
감자를 굽던 부하, 노먼이 김이 피어오르는 감자를 휙 던졌다.
필렌은 감자를 받으며 말했다.
“걔가 말 안 듣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잖아.”
감자를 한 입 베어 문 다음 이어 말했다.
“신경질 내서 미안. 안 좋은 꿈을 꿨거든.”
“진짜 꿈 때문에 그런 거예요? 별일이 다 있네요. 대장은 그런 거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냥 꿈이 아니라 5년 전 일을 체험했어. 아주 생생하게.”
뜨뜻한 감자 덕인지 몸을 옭아매던 징그러운 꿈의 여운이 조금씩 사라진다.
“5년 전이면, 정말 더러운 꿈을 꾸셨네요.”
“그래, 맞아. 정말 끔찍한 꿈이지.”
“하나 더 드실래요?”
필렌은 노먼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물 있는 사람? 좀 줘봐.”
“스미스! 그만 퍼질러 자고 일어나서 경계 서.”
“새끼들아! 잠 좀 자자!”
주변이 시끌벅적해졌다. 하나둘씩 텐트 밖으로 기어 나와 모닥불 앞으로 모여들었다.
“대장. 왜 새벽부터 똥 씹은 표정이에요?”
“스미스, 네가 안 씻어서 그러잖아. 몸에서 개 사타구니 썩는 내가 난다고.”
“개 사타구니 썩는 냄새는 또 뭔 냄새야? 그리고 그건 또 어떻게 알고?”
하품을 쩍 내뱉으며 한마디씩 주고받는 부하들이었다.
필렌은 왼쪽에 있는 텐트를 바라봤다. 마나등이 희미하게 불을 뿜고 있었다.
다가가 안쪽을 들여다봤다.
“뭐야, 얘 어디 갔어?”
있어야 할 밀레나가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라면 한 바퀴 돈다고 나갔어요.”
스미스가 외치듯 말했다. 필렌은 혀를 차며 스위치를 내렸다.
“오늘 아침 담당은 누구야?”
“호프요.”
시선을 받은 호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주는 대로 처먹읍시다. 맛없다고 지랄하지 말고. 또 내 음식 가지고 지랄하면 나 정말 못 참아.”
“아무 말도 안 했으니까 혼자 발작하지 마.”
필렌은 호프의 이마를 툭 밀며 말했다. 호프가 이마를 문지르며 씩 웃었다.
“대장은 예외예요.”
“웃지 마, 정들어.”
뻐근한 팔을 빙빙 돌리며 거병을 모아둔 곳으로 향했다.
가시화 패드를 손에 든 채 거병을 둘러보는 얀스가 보였다.
“상태는 어때?”
“주먹구구식으로 버티는 건 이제 한계예요. 액상근육 순도도 엉망이고, 특히 하부 모듈이 위험해요. 3번, 4번. 이 두 놈은 달리다가 무릎이 앞으로 꺾여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고요.”
“그런 걸로 어찌어찌 버텼네.”
“다들 재주도 좋아요.”
얀스가 머리에 꽂아둔 드라이버를 뽑아 목덜미를 긁었다.
“수리보단 교체가 나을 거 같아요. 이번에 기가 막힌 제품이 나왔다고 하던데, 어때요?”
“기가 막히면 기가 막히게 비싸겠지?”
“싼 건 해로워요.”
“네 욕심 다 채우면 용병단 재정이 해로워져.”
“욕심이 아니라 우리 식구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런 거죠. 그리고 지원금 나오잖아요.”
“그 지원금으로 거병 하나 더 운용하려고.”
“여기서 한 기 더요?”
“어.”
얀스가 미간을 좁혔다. 주름이 깊게 잡힌다. 필렌은 손가락을 내밀어 주름진 부위를 꾹 눌렀다.
“그거 버릇 돼.”
“이미 글렀어요. 비일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얀스가 거병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추가로 하나 더 들이면 누구한테 맡기려고요? 백업용은 아닐 테고.”
“밀레나.”
“아, 정말요?”
“전용기 하나 마련할 때가 됐지. 실력이 모자란 것도 아니니.”
“실력이야 좋죠. 하지만 그 불같은 성격이…….”
얀스가 말끝을 흐렸다.
“저기, 불의 전차가 뛰어오네요.”
얀스가 바라보는 곳.
온몸에 땀을 흘리며 뛰어오는 밀레나가 있었다.
코앞에 멈춰 선 밀레나가 격하게 숨을 토해냈다.
“어머니.”
“징그럽게 왜 또 어머니라 그래.”
“어머니, 부탁할 게 있어요.”
“뭔데?”
“대련 상대해줘요.”
필렌은 눈을 찌푸렸다.
“싫어. 힘들어.”
“아, 그러지 말고요. 하나뿐인 딸이 이렇게 부탁하는데 모른 척할 거예요?”
“하나뿐인 엄마가 피곤해요.”
“엄마!”
뚱한 표정으로 노려보던 밀레나가 방향을 돌렸다. 모닥불 주변에 모여 있던 부하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한다.
“노먼 아저씨.”
“전 바쁩니다.”
“스미스 삼촌.”
“경계 시간이…….”
호프는 시선을 받기 전에 큰 냄비를 들고 일어섰다.
밀레나가 하, 코웃음을 친 다음 말했다.
“삼촌들! 이럴 거예요?”
윽박지르는 밀레나를 피해 다들 도망치기 시작했다. 필렌은 그 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거 누굴 닮아서 저러는 건지.”
옆에 있던 얀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겠어요?”
“누군데?”
“일단 전 아니에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돌아서는 얀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