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3화
“들어오세요.”
가하란은 불을 켜고 외투를 벗었다. 점멸을 반복하던 마나등이 고른 빛을 주변에 뿌렸다.
“뭐 좀 드시겠어요?”
식탁 의자에 앉은 엔엔을 보며 물었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거면 돼요. 없어도 괜찮고.”
“잠깐만요.”
찬장에서 비스킷을 꺼낸 뒤 냉장 보관함 앞으로 갔다. 마나포집 작동센서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언제 고장 난 거지?
보관함을 열자 은은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고장 난 지 얼마 안 된 건가.
보관함 안쪽을 살피다가 그대로 문을 닫았다. 먹을 만한 음식이 없었다.
“앞 가게에서 뭐 좀 사 올게요. 늦게까지 하는 곳이라 지금도 열었을 거예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거면 되니까.”
엔엔이 비스킷을 가리켰다.
“2년 만인가요?”
가하란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쯤 된 것 같네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번이랑 똑같아요. 먼 친척들을 찾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죠. 사태의 원인이야 대강 밝혀졌지만, 이 변화가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 자세히 알아봐야 했으니까요.”
가하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건넸다.
“키가 많이 컸네요.”
엔엔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키만 컸어요.”
뚝, 비스킷을 반으로 분질러 입에 가져갔다.
배가 고프거나 입이 심심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자리에 걸맞은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꼈기에 그렇게 한 것일 뿐.
“가하란은 어떻게 지냈나요?”
“열심히 살고 있어요. 이런저런 일도 많이 하고 있고요.”
피곤함을 감추기 위해 웃음을 지었다. 수척해진 몸은 옷으로 가리면 그만이니 표정만 잘 꾸며내면 된다.
가하란은 남은 비스킷도 입에 넣었다. 굵은 모래를 씹는 것 같았다. 맛도, 향도 느껴지지 않지만 의식적으로 “좀 달죠?”라고 물었다.
엔엔이 비스킷을 응시했다. 아무 말 없는 엔엔을 바라보다가, 비스킷이 담겨 있는 바구니로 손을 뻗을 때였다.
엔엔의 손이 끼어들었다.
“가하란.”
“네?”
“먹지 마요.”
엔엔이 바구니를 끌어당겼다. 그제야 흐리멍덩한 시야에 비스킷 상태가 잡혔다.
끄트머리에 흰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가하란은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웃으며 털어냈다.
“아시잖아요, 제가 뭐든 잘 먹는다는 걸.”
“가하란.”
“다른 걸 내올게요. 커피랑 어울리는 게 따로 있거든요.”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엔엔이 손목을 잡았다.
“잠은 자고 있는 거죠?”
잠.
가하란은 침실 쪽을 바라봤다.
침대에 누웠던 게 언제였더라? 책상에 엎어져 쪽잠을 잔 기억만 난다.
“그럼요. 잠 안 자고 어떻게 버텨요.”
“예전에 가하란이 나한테 말했죠. 거짓말을 잘한다고. 그땐 제법 능숙해 보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거짓말할 기력조차 없어 보이네요.”
“전 정말…….”
엔엔이 일어섰다.
“침대는 어디 있죠?”
“엔엔 님.”
“저긴가 보네요.”
붙잡은 손을 뿌리치고 싶었으나 힘이 나질 않았다. 질질 끌려가 방문 앞에 섰다.
문이 열렸다. 차분한 방 풍경이 망막에 맺혔다. 낯설다는 느낌을 단번에 받았다. 내 집인데도 정말 낯설다.
엔엔이 이불을 들췄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엔엔 님, 전 괜찮아요. 그리고 잠은 제조소 휴게실에서 자서 여긴 잘 쓰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입을 다물고 싶었으나 구차한 변명이 연이어 나왔다. 어색한 손짓을 사용해 가며 엔엔에게 말을 걸었다.
엔엔은 입을 다문 채 창가로 걸어갔다. 굳게 닫힌 창문을 열고 이불을 들었다.
“가하란은 베개를 들고 와요. 시트는 괜찮은 거 같으니.”
“엔엔 님.”
불러도 멈춰 서지 않는다. 가하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엔엔이 가하란, 하고 연이어 이름을 불렀다.
하는 수 없이 베개를 들고 나갔다.
“먼지 좀 털죠.”
엔엔이 이불을 터는 사이 가하란도 툭툭 베개를 쳤다. 뽀얗게 솟은 먼지가 밤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누워요.”
베개를 들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엔엔이 한 말이었다. 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인간족이 말하는 ‘괜찮다’는 대개 안 괜찮을 때 쓰죠.”
이번에도 우악스러운 손에 이끌려 침대에 눕게 됐다.
“잠이 안 와요.”
가하란은 솔직하게 말했다.
“안 자도 돼요. 그냥 누워 있어요.”
“손님을 모셔놓고 이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난 가하란의 손님이 아니에요. 그런 거리감이 있는 단어는 내가 싫어요.”
오래전에 작동을 멈춘 기쁨이란 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려 했다. 가하란은 움트는 감정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침착하게 짓눌러 저 밑바닥으로 보내버렸다.
“인간족 격언 중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죠. 나 역시 그 말을 믿었어요. 하지만 가하란에게는…….”
말끝을 흐린 엔엔이 오른쪽 허리에 달아둔 주머니에서 작은 인형을 꺼냈다.
그 옛날, 공방에서 작업실 정리를 돕던 인형이었다.
“얌전히 누워 있어요. 얘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딴생각하지 말고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은 인간이 썩은 음식을 먹고도 맛을 묻나요?”
“그건…….”
엔엔이 머리맡에 인형을 두었다.
“내일 아침까지는 그러고 있어요. 잠이 안 오더라고 일어나지 말고요.”
“고문 같은데요.”
엔엔이 송곳니가 보일 정도로 진하게 웃었다.
“약속을 깨고 움직이면 진짜 고문이 뭔지 보여 줄게요.”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올린 엔엔이 손을 털며 돌아섰다.
“브라인 님을 뵙고 내일 아침에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계속 누워 있어야 하나요?”
“칼랑과의 약속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체험해 보고 싶다면 움직여봐요.”
“강압적인 지시도 약속이라 할 수 있군요.”
“일방적인 약속이라 해두죠.”
침실을 나서던 엔엔이 문틀을 붙잡았다.
“카트시는 어떤가요?”
카트시. 가하란은 침실 맞은편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방에 있어요. 여전히 잠들어 있고요. 마나포집 회로를 계속 변경하며 적용해 보고 있는데, 반응이 없어요.”
“내일 아침 같이 생각해 보죠. 아, 마나포집은…….”
“비밀로 하고 있으니 염려 놓으세요.”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워요. 마나포집은 공개하기 아직 일러요. 분배소와 배터리만으로도 이런 환경이 조성됐는데, 마나포집까지 알려지면 변화를 감당할 수 없을 거예요.”
가하란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위험성은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순 없어요. 도시는 변하고 있어요. 마나포집이 적용되면 더 편리해질 거고요.”
엔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공개 시기는 가하란의 판단에 맡길게요. 애초에 원천기술은 가하란만 알고 있으니까요. 실적용 후보급까지, 모두 가하란의 손이 닿아야 할 거고요.”
“다른 사람들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과연 그럴까요?”
엔엔이 살며시 문을 닫았다.
“푹 자요. 잠이 찾아오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끌고 와요.”
“너무하시네요.”
문이 완전히 닫혔다.
발소리가 멀어진다. 가하란은 몇 분 동안 누워 있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머리맡에 있던 인형이 펄쩍 뛰어올랐다.
“커튼 좀 칠게. 그건 괜찮잖아?”
창문으로 걸어갔다. 희미한 반달이 보인다. 브라인 님도 저걸 바라보고 있겠지?
커튼을 닫고 침대로 돌아왔다.
주변은 어둠에 잠겼지만, 머릿속은 점점 더 밝아질 뿐이다.
지쳐서 기절하는 게 아니면 잠들 수 없게 된 게 언제부터였지?
가하란은 익숙하지 않은 푹신함 속에서 계속 뒤척거렸다.
* * *
“엔엔 님.”
엔엔은 반가워하는 셀베이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잘 지냈어요?”
“네. 저야 잘 지냈죠. 엔엔 님은요? 여행은 끝나신 건가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어요. 그래서 잠깐 돌아온 거고요.”
셀베이아가 안쪽을 가리켰다.
“일단 들어오세요.”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짙은 향기가 났다. 굉장히 상큼한 향이었다.
“레몬그라스 오일에서 나는 향이에요. 고집불통 대령님께서 그나마 좋아하는 향이에요.”
셀베이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깔린 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가벽마저 다 거둬내 커다란 방 하나로 이뤄진 2층 한가운데, 브라인이 있었다.
원형 탁자를 중심으로 양옆에 무수히 많은 종이 더미가 보인다.
사각사각, 만년필 굴러가는 소리가 일정한 박자감을 갖춘 채 들려왔다.
“대령님. 손님 왔어요.”
셀베이아가 브라인에게 다가가 말했다. 도톰한 천을 어깨에 두른 브라인이 고개를 돌렸다.
축 늘어진 귀.
나른해 보이는 눈.
윤기를 잃은 회색빛 털.
2년 전 둔을 떠날 때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토끼 할머니, 여전하시네요.”
물끄러미 바라보던 브라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만년필을 움직여 뭔가를 기록해 나갔다.
엔엔은 곁으로 다가가 브라인이 무얼 적는지 지켜봤다.
-칼랑족이 돌아왔다. 외형에 변화는 없다. 나에게 친근감을 보이지만 여전히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날씨에 관한 기록, 주변 소리에 관한 기록, 느끼고 있는 감정에 관한 기록.
모든 기록이 단지 쌓여 나가고만 있었다.
말없이 펜을 움직이던 브라인이 의자에서 일어나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주무시러 가시는 거예요.”
“생활 패턴은 변함이 없네요.”
“네. 5년 동안 변한 게 없어요.”
쓸쓸하게 웃는 셀베이아였다.
“식사는요? 시간이 늦었지만, 뭐라도 드실래요?”
“가하란 집에서 먹고 왔어요.”
셀베이아가 아, 하고 탄식 비슷한 소리를 냈다.
“만나셨군요.”
“곰팡이가 핀 과자를 주더라고요. 그걸 먹으면서 달다고 말하고.”
“…그랬군요.”
눈을 살짝 찡그리던 셀베이아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내일 가서 억지로라도 뭘 먹여야겠어요.”
“안 그래도 침대에 눕혀놓고 왔어요. 잠을 통 못 잔 거 같아서.”
“제니가 그러더라고요. 잠자는 걸 못 봤다고.”
2년 전보다 상태가 안 좋아진 것 같다. 엔엔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둔을 떠나지 않고 가하란 곁에 남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아니,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가하란 주변에는 좋은 인간족이 많았다. 다들 그 아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방치하지 않고 꾸준하게 말을 걸어줬을 것이다.
그럼에도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육체가 아닌 영혼에 새겨진 상처는 결국 스스로 치유해야 한다.
셀베이아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둔 정세에 대해, 기술적인 변화에 대해, 그리고 사회적인 변화에 대해.
“다른 곳도 둔보다는 느리지만 분배소와 배터리가 보급되고 있어요. 마법공학의 빛이 점점 퍼져나가는 중이죠.”
“거병 이용도 자유로워졌고,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요. 도시 바깥으로 자유롭게 나갈 날이.”
셀베이아가 희망을 담아 말했다.
엔엔은 맞장구쳐 주지 못했다.
도시 안 상황은 확실히 5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다.
어느 면은 그라운드 제로 이전보다 나아졌다.
기술발전은 이제 예측할 수 없는 속도에 진입했고, 혁신이라 부를 만한 변화가 연이어 찾아왔다.
분명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울타리를 벗어나면 여전히 지옥이었다.
둔으로 오기까지 끔찍한 마수와 몇 번이고 마주쳤다. 개중에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어 꼬리를 말고 있는 힘껏 도망치기만 했다.
거병의 힘을 빌려도 그것들을 처리할 수 있을지.
“엔엔 님?”
셀베이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엔엔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네.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