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편 썬 마늘에 올리브, 그리고 가느다란 면. 약간의 소금기가 감칠맛을 돋운다.
“어때?”
“맛있어요.”
가하란도 좋아할 맛이다.
제니는 포크에 감긴 면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가하란 말이야, 밥은 챙겨 먹고 있는 거지?”
“몰라요. 먹는지 안 먹는지.”
말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걱정이 되면서도 우울함에 잠겨 있는 그 눈을 떠올리면 스멀스멀 화가 난다.
“네가 잘 챙겨줘. 그나마 네 말은 듣는 편이잖아.”
“안 들어요. 쉬라고 해도 쉬지도 않고. 정말…….”
더 말하려다가 입 대신 손을 움직였다. 빵을 입 한가득 넣고 으적으적 씹었다.
“이 맛있는 걸 먹지도 않고. 제가 다 먹어버릴 거예요.”
맞은편에 앉은 셀베이아가 잔에 음료를 따라주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움직이는 게 나을 테니까.”
“저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땅만 보고 아무 말도 안 하는 모습보단 지금처럼 바쁘게 사는 게 낫다고. 근데 도가 지나쳐요. 자기 자신을 내팽개쳐도 정도가 있는 건데…….”
제니는 시선을 돌렸다. 천으로 덮인 작은 바구니. 안에는 가하란 몫의 음식이 들어 있었다.
“밥이라도 잘 챙겨 먹으면 그나마 덜 속상할 거예요.”
보조기구 지원 사업이 궤도에 오른 후부터, 가하란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에 매진했다.
가하란이 편히 자는 걸 대체 언제 봤더라?
죄를 지어 노역살이 하는 죄인도 가하란보다는 편히 지낼 것이다.
“저번에 얼굴 봤는데 많이 피곤해 보이더라.”
셀베이아가 말했다.
“피곤하겠죠. 아침부터 저녁, 아니 새벽까지 움직이니까요. 학회 보조연구, 공장 시설 정비, 의수 개발, 거병 모듈 점검. 이것만 해도 한 사람이 소화해낼 작업량이 아닌데, 거기에 출장까지 가요. 직접 보고 의수를 고쳐야 한다고.”
5년.
그라운드 제로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제니 역시 달라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가하란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 같지 않았다. 오늘을 잊기 위해서 무작정 몸을 굴리고 있었다.
잊기 위해 사는 삶.
제니는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너희들의 시대다, 요즘 그런 말이 자주 들리더라고요. 어른들이 사라졌으니 우리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대재앙은 모든 걸 빼앗아 갔다.
가족도, 친절했던 이웃도, 견고했던 사회도.
날뛰던 뿌리가 잠잠해진 뒤 살아남은 사람들이 목격한 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줄어든 인구수였다.
유소년보단 청년이, 청년보단 중장년이 피해를 보았다.
둔이란 거대한 도시를 굴리던 시스템이 한순간 붕괴했다. 요직을 맡았던 어른들의 공백은 혼란을 가중시켰다.
3년.
그 혼란을 잠재우고 안정기에 돌입하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들은 이전보다 더 빠르게 임무와 책임을 이해해야 했다. 보호자의 부재가 낳은 가속화된 사회였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적응하는 건 당연해요. 손 놓고 있으면 다 죽을 테니까요. 그래도, 우린 아직 어려요. 가끔은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고요.”
“그렇지.”
셀베이아가 나직하게 말했다.
“가하란을 말려줄 어른이 필요해요.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줄 어른이 있어야 해요. 근데…… 아무도 없어요. 그런 말을 해줄 사람이 이젠 없어요.”
제니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코끝이 저렸다. 여기서 감정을 통제하지 않으면 엉엉 울고 말리라.
셀베이아가 곁으로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온기가 가득 담긴 손길에 슬픔이 잦아든다.
“미안해요, 언니. 즐거운 식사 시간인데.”
“미안할 게 뭐 있어. 슬플 땐 울어야 속이 안 상하는 법이야. 가하란도 그래야 할 텐데.”
“그러니까요. 그 고집불통은 말을 안 들어서 문제예요. 예전에는 말을 너무 많이 듣고,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였는데.”
코를 문지르고 씩 웃었다.
“돌아오면 입에 밥을 쑤셔 넣을 거예요. 거부하면 줄로 칭칭 감아버릴 거고요.”
“나도 도와줄까?”
“하나보단 둘이 낫겠죠? 걔도 꼴에 남자라고 힘이 세졌어요. 어렸을 땐 제가 달리기도 더 빠르고 힘도 셌는데.”
5년 전 과거가 이렇게 아련해질 줄은 몰랐다. 5년이 아니라 더 오래된 얘기 같았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무 걱정 없이 웃고, 즐겁게 내일을 기대할 수 있었던 그때로?
제니는 어둠이 깔린 창밖을 보았다.
보수가 끝난 도로 뒤쪽으로 여전히 엉망인 채로 방치된 거리가 보인다.
풍경이 대신 대답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거대한 상처와 잔해는 영구히 남아 가슴을 쑤실 거라고.
컹, 낮은 울음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왔다.
툴이 식탁 아래로 기어와 그대로 엎어졌다. 셀베이아가 몸을 낮춰 툴의 턱 밑을 간질였다.
“얘도 심심한가 보네.”
“심심하겠죠. 주인이란 놈이 한 번을 안 놀아주는데.”
고기 한 조각을 손바닥 위에 두고 툴에게 내밀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눕혀 요령 있게 고기를 받아먹는 툴이었다.
“테리는 소식이 있어?”
“용병단을 통해 편지가 오긴 했어요. 스파우 쪽을 보고 돌아온다고 했으니, 여름이 가기 전에 얼굴 볼 수 있겠죠.”
“스파우?”
“옛 카른 쪽에 생긴 도시라고 해요. 티안가의 가주가 그곳 시장을 맡고 있다고 하고.”
“티안이라. 한때는 정말 유명했던 가문인데.”
“자세히는 모르지만, 엄청 유명한 장군이 그곳 주인이었다면서요?”
“게스할트 장군. 제국의 군부 하면 떠오르는 사람 중 하나였지. 이제는 다 옛날얘기가 됐지만.”
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 사라졌다.
1등 귀족과 거대 상인 연합, 클랜과 길드들이 새롭게 이룩한 도시만 남아 있을 뿐.
둔처럼 이름과 형태를 유지한 채 도시 국가가 된 곳도 있고, 아예 새롭게 영토를 구축해 일어선 곳도 있다.
“여기는 어떻게 될까요? 군벌하고 계속 부딪치는 거 같던데.”
현재 둔은 미묘한 정치적 대립 구도를 형성한 채 사회가 유지되고 있었다.
살아남은 디온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옛 군부 출신 파벌, 덴스 학회를 필두로 모인 지성인들의 모임, 그리고 ‘롱캣’ 상인 연합회.
“당분간은 큰 소동이 없을 거야. 덴스 학장을 중심으로 세력 구도가 재편성되는 게 그나마 낫지만, 디온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최근에 롱캣 애들을 만나봤는데, 그쪽도 욕심을 내는 것 같더라고요. 시의회 구성원을 좀 바꿔야 한다면서.”
“지겨운 반복이야. 그만큼 도시가 안정됐다는 증거기도 하지만.”
셀베이아의 말을 들으며 제니는 기지개를 켰다.
어릴 땐 열셋이 되면 여관 장부를 물려받아 제대로 된 일을 시작할 거라 생각했다.
오빠인 테리를 마음껏 부려 먹으며 ‘루드 여관’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꿈을 꿨었는데…….
여관은 사라지고 그 이름을 물려받은 기술 업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여관 이름을 제멋대로 사용한 걸 알게 된다면 아빠는 화를 낼까, 아니면 좋아할까?
물어보고 싶지만 대답해줄 아빠를 이제는 만날 수 없다.
희미하게 종소리가 들려왔다.
제니는 의아해하며 일어섰다. 가게 문 닫고 영업 종료 팻말도 걸어놨는데.
“잠깐만요.”
휴게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짧은 복도 끝, 거대한 자루를 어깨에 이고 있는 트릿족이 있었다.
“머니페니!”
예상 못 한 손님이지만 더없이 반가웠다. 한달음에 머니페니 앞으로 달려갔다.
“어쩐 일이에요?”
“이거.”
묵직한 자루가 바닥에 닿으며 맑은 쇳소리를 냈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양질의 청철이 들어 있었다.
“매입하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구한 거예요?”
“세상이 망해도 돈은 살아 있지.”
다람쥐를 닮은 얼굴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순간 만져보고 싶다는 욕구가 차올랐으나,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니 그만뒀다.
“매번 고마워요.”
“동전의 정은 오래가는 법이야. 가하란이 부탁하면 우린 들어줄 준비가 돼 있어.”
뒤따라 나온 셀베이아가 트릿족을 보며 가볍게 눈인사했다.
“들어와.”
트릿족의 손짓에 밖에 있던 다른 트릿족이 들어왔다. 볼에 난 털이 연분홍색이다. 아직 어리다는 뜻이다.
“인사해. 우리 중요 고객.”
“안녕하세요. 우름달 곤지입니다. 곤지 혹은 편하게 머니페니라 불러주세요.”
꾸벅 인사하며 다가와 손을 내미는 곤지였다. 제니는 그 손을 붙잡았다. 몽글몽글한 털이 손안 가득 차올랐다.
“반가워요, 곤지 씨. 전 제니예요.”
“기억했어요. 제니.”
인사를 끝내자 곤지 옆의 트릿족이 입을 열었다.
“난 옛 성도로 가게 돼서 이쪽 일은 앞으로 이 녀석이 맡게 될 거야. 가하란한테도 인사시키고 싶지만, 통시간이 안 맞네.”
“제가 나중에 설명할게요. 근데 자리를 오랫동안 비우시는 거예요?”
“슬슬 은행도 정상 업무를 시작해야 하니까. 결제 방식도 새롭게 개발됐고, 계좌 관리도 편해졌으니 예전보다 신용 장사가 수월해졌어. 세상은 어려워졌지만 돈 쓰기는 쉬워졌지.”
트릿족이 안쪽을 쓱 훑은 다음 입을 열었다.
“기틀이 잡혔을 때가 위험한 법이야. 잘 가꿔 나가.”
“노력해 볼게요. 아, 디글 아저씨 데려올까요?”
“그 친구하고는 이미 얘기 다 했어. 재정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학회 자금이 많다는 게 약간 거슬리긴 해도 문제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니까.”
트릿족이 잘 있으라는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곤지도 잔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제니는 문밖으로 나가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봐요, 머니페니!”
트릿족 둘이 금방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세상 모든 물건은 상회를 거쳐 머니페니 손에 떨어진다던데, 정말인가 봐요.”
“제국 시절에도 중앙은행 관리를 하던 자들이야. 그 전에도 돈과 관련된 사업이면 항상 자리를 꿰찼고.”
셀베이아가 묵직한 자루를 보며 말했다.
“머니페니 말대로 루드 팩토리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네.”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네요.”
제니는 언니를 바라봤다.
“언니도 같이 일하는 게 어때요? 저희 일손 부족해요.”
“제안은 고마워. 하지만 지금은 힘들 거 같아.”
힘들다는 말에 제니는 군말 없이 수긍했다.
“브라인 할머니는 좀 어때요?”
“똑같아. 5년 전에도 지금도, 계속 하늘만 보고 계셔.”
쓸쓸한 미소를 짓는 셀베이아였다.
“다음에 찾아갈게요. 가하란하고 같이.”
“그래 주면 좋고.”
셀베이아가 짐을 챙겨 건물 밖으로 나갔다.
“들어가.”
“언니 가는 거 보고요.”
“내가 빨리 가야겠네. 가하란 늦으면 음식은 다른 사람들하고 먹어. 불면 맛없어.”
“네, 야식으로 먹을 테니 걱정 마세요.”
셀베이아도 떠났다.
제니는 밤공기를 쐬며 진단소 옆 제작소를 바라봤다. 밝게 불이 켜져 있었다.
“우리 아저씨들, 간식이나 챙겨 줘야겠다.”
가하란만큼은 아니지만 다들 일에 열중이었다. 노는 게 마치 범죄라도 되는 듯이, 다들 미친 듯이 일만 했다.
여유가 사라진 세상.
도시 정비가 모두 끝나면, 한숨 돌릴 수 있게 될까?
제니는 제발 그렇게 되길 빌면서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아프면 꼭 찾아오시고요. 혹시 찾아오기 어려우시면 연락 주세요. 제가 올 테니.”
“아유, 선생님. 저 튼튼하니까 걱정 그만하고 얼른 가세요. 해 떨어진 지 오래예요.”
기어이 손에 쥐여 준 사과 한 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노인에게 인사했다.
가하란은 손에 든 사과를 공중으로 던지며 길을 걸었다.
이쪽 거리는 이제 끝났고, 다음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골목에 들어설 때였다.
“오랜만이에요.”
가하란은 사과를 쥔 손을 늘어트리며 옅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엔엔 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