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그럼.”
테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엘도 옷매무새를 다듬고 테리 앞에 섰다.
“정식으로 초대해 진행했어야 할 자리인데, 어쩌다 보니 이런 형태가 됐네요.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시의회 이름으로 대표님을 다시 모시고 싶습니다만.”
“아니요. 중요 사안은 다 해결했으니 따로 자리 만드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테리가 시장실 안을 훑으며 말했다.
“단출하네요. 흔한 장식품 하나 없이.”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거든요.”
테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마음에 듭니다. 제가 답사를 다닐 때면 가장 먼저 시장을 찾습니다. 상인들의 표정을 보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점포의 물건을 체크하죠. 그 사람들 다음에 확인하는 게 요직분들의 개인실입니다.”
테리가 소파에 손을 올렸다.
“손님맞이용 의자는 잘 갖춰놨지만, 그 외에 불필요한 장식품은 안 보이죠. 시장에는 생기가 넘치고 배곯아 보이는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요.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정성스럽게 만들어가는 도시의 모습이었어요.”
듣고 싶었던 얘기였다. 아리엘은 테리의 눈을 보며 말했다.
“다 같이 지옥을 이겨온 사람들이에요. 이 도시는 몇 년 후면 둔을 따라잡을 겁니다.”
“대단한 포부네요.”
“목표는 높게 잡아야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테리가 손을 내밀었다. 손을 붙잡기 직전, 테리가 목소리 톤을 낮추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게 하나 있네요. 시장 선거가 코앞이라고 했죠?”
“네, 맞아요.”
“전 아리엘 씨가 시장으로 있는 도시에 지원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안 된다면 의수 물량 건과 지원 사업, 둘 다 철회를 고려할 거고요.”
“반드시 자리를 지켜야겠네요.”
아리엘은 눈웃음 지으며 마주 잡은 손에 힘을 꽉 줬다.
“믿어주시니 고맙지만, 절 이렇게까지 신용해 주시는 이유가 있나요? 도시 상태야 모두가 협동해 이룩한 것이니 개인의 능력이라 볼 수 없고요.”
테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어느 정도 정보가 있었습니다. 사전 정보와 현지답사로 얻은 인상이 일치하니 저로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죠.”
“정보라면…….”
“여기저기서 듣게 되는 것들이요.”
하긴, 루드 팩토리의 대표쯤 되면 세상 온갖 소문이 굴러 들어올 것이다.
게다가 덴스 학회의 지원까지 받고 있으니, 이런 작은 도시의 시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량을 보유했을 것이다.
“근데 그 정보, 믿을 수 있는 건가요? 제가 꾸며낸 걸 수도 있는데.”
아리엘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럴 수도 있죠. 검소해 보이는 이 방조차 연출일 수도 있고요. 근데 꾸며진 것이라고 한들 생각은 바뀌지 않아요.”
“어째서요?”
“그것조차 못 하는 사람을 많이 봐왔으니까요. 거짓된 선행도 속내를 들키지 않고 반복하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보다야 선한 사람이죠. 그렇지 않나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네요.”
테리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몸을 돌렸던 테리가 아, 하면서 다시 아리엘을 바라봤다.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을까요? 특색 있는 메뉴가 있다면 더 좋고요.”
“큰길 쪽에 ‘쿤’이라고 쓰인 간판을 찾아가시면 만족하실 거예요.”
“거기에 가봐야겠네요. 시장님의 추천이니 맛이야 보장될 테고.”
“말이 나온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할까요?”
“저도 아름다운 시장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지만, 밥은 편하게 먹자는 주의라서요. 식사는 다음 회의가 끝나고 다 같이 먹죠.”
은은한 웃음소리를 남기고 방을 나서는 테리였다.
“차였네요.”
문 옆에서 지켜보던 율이 말했다.
“그러게. 좀 더 뜯어내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 검은 속내가 보이니까 대표도 재빨리 거절한 거죠.”
“다음에는 좀 더 사근사근 웃어볼까?”
“언니가 그렇게 웃으면 남자들 다 도망칠 거예요.”
율이 간이 계약서를 챙겼다.
“첫인상하고 너무 딴판이네요. 거병에서 막 내렸을 때는 좀 단순해 보였는데.”
“그게 테리라는 인간의 본성이겠지. 시장실 안에 들어왔을 때는 대표란 갑주를 입은 거고.”
“바지사장이라고 했지만, 전혀 아니었죠?”
“바지사장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그보다 가하란, 그 사람하고 친분이 있는 거야?”
율의 입술이 좌우로 움직였다.
“음, 어느 정도 친하냐고 물으신다면…… 동네 아는 동생?”
“안 친하단 얘기네.”
“그렇게 안 친한 것도 아니에요. 몇 번이나 놀아 줬다고요. 얼마나 질문이 많은지. 그거 상대하느라 혼났어요.”
“호기심이 많은 애였나 봐?”
“그 나이 또래가 원래 질문이 많잖아요? 근데 걔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어요. 말이 정말…….”
아리엘은 검지로 턱을 툭툭 건드렸다. 사소한 친분이라도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야 한다.
“루드 팩토리의 실질적인 대표라고 했으니 그쪽의 호감을 얻으면 득이 크겠네.”
“또 무슨 생각 하세요?”
“못된 생각.”
“네, 그러시겠죠.”
율이 서류가 든 파일을 들고 일어섰다.
“전 시장 조사 좀 하러 갈게요. 대표가 말한 것도 알아보고요.”
“고생해. 아, 그리고 짐을 싸야 할지도 몰라.”
“네? 짐이요?”
“일단은 기억만 해둬.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출장은 싫은데요.”
“그러면 관리관 자리를 내놔야지.”
“싫지만, 그래도 가겠다고 말하려 했어요.”
율이 어깨를 으쓱이며 방을 나섰다.
텅 빈 방을 둘러보다가 허공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걸었다.
“계시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은 새가 책상에 내려앉았다.
“미리 말씀은 해주셨지만, 그게 설마 오늘일 줄은 몰랐어요. 게다가 손님도 계신 자리인데.”
-나한테 중요한 건 샬롯의 기분이니까.
“알아요. 산카 님껜 이 도시의 명운도, 우리의 목표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꼭 그렇지만도 않아. 샬롯이 마음을 준 너희들은 꽤 소중하게 여겨. 너희가 사라지면 그 애는 슬퍼할 거야. 그걸 두고 볼 수는 없지.
하얀 새가 날아올라 어깨에 내려앉았다.
“언제까지 품고 살 수는 없으니 내보내야 하긴 하는데, 시기가 마땅치 않았어요.”
-그 애도 알고 있어. 그래서 얌전히 굴었던 거고. 하지만 이제는 한계야. 바람을 닮은 아이인데 한 둥지에 붙들어 둘 수는 없지.
“괜찮으시겠어요? 둥지를 벗어난 새는 위험한 것들과 마주할 텐데요.”
아리엘은 산카를 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때마다 산카 님께서 처리하면 안전하기야 하겠죠. 하지만 언제까지 날개 밑에 가두고 살 수는 없어요. 그걸 바랄 애도 아니고.”
-딸의 심상세계가 굳건해지길 기다리고 있었어. 치워야 마땅한 쓰레기였다고는 하나, 그래도 아버지였으니까. 아버지의 죽음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때 그 애가 부서지지 않도록 돌봐야 했고.
아리엘은 씁쓸한 웃음을 입에 물었다.
인간성을 포기하고 괴물이 된 살인마 실더. 샬롯에게 진실을 말하기까지 4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샬롯은 받아들였다.
몇 달간 말을 잃고 웃음도 잃었지만, 이내 이겨내고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어리광을 계속 받아준 게 지금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문제가 됐지만.
-이번 여행이 그 아이한테 많은 걸 가져다줄 거야. 내가 없이도 안전하게 살아갈 힘과 지혜를 얻게 되겠지.
“설마 떠나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발언이었다.
-대변이 이후 층과 층 사이를 오가는 게 예전보다 자유로워지긴 했지만,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법이잖아. 나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어. 그러니 준비를 해둬야지.
“오래오래 붙어 계세요. 산카 님께서 사라지면 샬롯은 죽을 때까지 울 거예요.”
산카가 날개를 폈다. 살며시 날아오른 작은 새가 작게 말했다.
-그럴까 봐 준비하는 거야. 인간족은 인간족 사이에 녹아들어야지. 보통은 그래야 행복하더라고.
아리엘은 시계 쪽으로 날아간 산카를 바라봤다.
“우리 쪽에서도 사람을 한 명 보내긴 할 거예요. 전 율이 적임자라고 생각하고요. 루드 팩토리 대표와 함께 둔으로 갈 건데, 거기에 샬롯도 끼워 넣을 생각이에요.”
-나쁘진 않네.
“근데 산페르라고 하셨죠? 위험한 분인가요?”
-이 층에 격변이 일어날 때면 매번 찾아가 관찰하는 놈이야. 주변에 있으면 온갖 일에 휘말리지.
“그래서 걱정하신 거군요. 그러면 샬롯은 이번 일에서 제외하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까요?”
-아니. 괜찮아. 보내도록 해.
“생각보다 크게 신경 쓰시진 않네요.”
산카가 작게 웃었다.
-존재 자체로 악영향을 끼치는 놈은 아니니까.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낸 건, 그래야 샬롯이 반기를 들고 가겠다며 떼쓸 테니까. 요즘 내가 하지 말라는 것만 하고 있거든.
“대표를 위협한 것조차 계산된 거네요.”
-샬롯한테는 미리 말해놨어. 물론 서로 추구하는 바가 약간 다르지만.
“샬롯을 위해서라면 귀찮은 일도 마다하지 않으시는군요.”
-당연한 거 아니야?
마지막 대답을 끝으로 산카가 모습을 감췄다.
아리엘은 닫아뒀던 창문을 열었다.
“루드 팩토리 가하란. 얼굴조차 모르는 사람이지만, 일단 사과를 해야 하나?”
한동안 골칫덩이를 맡아줄 사람이니까.
“그나저나 샬롯이 꿈에서 봤다는 건…….”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무언가 있었던 것이리라.
분위기상 산카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뭐, 생각이 있으시겠지.”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으니까.
아리엘은 힘껏 기지개를 켠 다음 다시 책상에 앉았다.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서류와 전쟁을 치러야 한다.
* * *
“어서.”
다그치는 목소리에 루일은 싫은 티를 냈다.
“싫어. 아프단 말이야.”
“계속 내버려 두면 더 아프게 돼. 엄마 말 들어.”
버텨도 결국 끌고 가겠지?
루일은 한숨을 쉬며 왼손을 보았다. 낡아도 잘만 움직이는 의수인데.
“교체할 때 너무 아파.”
“그래도 해야 해.”
“나중에 바꾸면 안 돼?”
“작은 선생님이 겨우 시간을 내주셨어. 오늘 아니면 한참 뒤에나 볼 수 있고.”
“싫단 말야.”
루일이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손을 잡아당겼다.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지나 건물 앞에 도착했다. 보기만 해도 왼손이 아프다.
의수를 갈아 낄 때면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온몸으로 퍼진다. 울면서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으니 참으라고만 하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건물 안에 들어설 때였다. 덩치 큰 개가 보였다.
놀라서 움츠렸는데, 눈을 보니 되게 순해 보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그 개를 만져줬다.
루일도 슬며시 다가가 개를 만졌다. 털이 보들보들했다. 용기를 내 살짝 끌어안았다.
“얼른 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일은 개에게 손을 흔들어 줬다.
엄청 무섭게 생긴 아저씨를 따라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닫힌 문이 열리자, 엄마가 안쪽을 보며 생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서 오세요. 근데 선생님이란 호칭은 너무 부담스럽네요.”
“맞아요, 맞아. 작은 선생님. 이러면 괜찮죠?”
“그것도 좀…….”
엄마가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루일은 머뭇거리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네가 루일이구나.”
“…선생님 맞아요? 너무 어려 보이는데. 나보다 몇 살 더 많은 거 아니에요?”
“아마 맞을 거야.”
끽해야 열셋? 아니면 열다섯? 그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동네 형만 한 이 사람이 선생님?
엄마가 등을 때리며 손을 당겼다.
“버릇없게 굴지 말고 빨리 앉아.”
“알았어.”
자리에 앉을 때였다. 작은 선생의 오른발이 보인다. 바지에 가려져 있지만 형태만 봐도 알 수 있다.
의족이다.
“교체할 때 많이 아팠지?”
작은 선생이 말을 걸어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