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39화 (212/558)

제239화

“샬롯.”

아리엘이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흥분하던 샬롯이 자리에 도로 앉았다.

“가하란을 알고 있다고요?”

테리가 되물었다.

“네. 몇 번이나 꿈에서 만났어요. 되게 신기한 꿈인데, 거기서 매번 나오는 꼬마애 이름이 가하란이에요.”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율은 멋쩍게 웃으며 샬롯의 팔을 붙잡았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언니, 신기하지 않아? 내가 꿈에서 본 애 이름이 가하란이라니까.”

“참 신기한 우연이네. 그러니까 그만 좀 해.”

왼쪽 눈을 씰룩이며 눈치를 줬다. 예의 없게 구는 것도 정도가 있다.

“전 괜찮으니까 얘기를 더 들어보죠. 꿈에서 몇 번이나 봤다는 것도 재미있고.”

테리가 말했다. 배려심이 많은 대표라 다행이었다. 불쾌하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도 모자랄 판에, 재차 샬롯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사죄의 의미를 담아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테리의 허락을 받은 샬롯이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거대한 바위가 쿵쿵 굴러다니는 이상한 곳이었어요. 저 혼자 거기 서 있었고요.”

“신기한 곳이네요.”

“네, 그러니까요.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 왜 거기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굴러다니는 돌들을 보며 서 있었어요.”

개꿈이니까 그런 거겠지.

율은 입술 안쪽까지 치고 올라온 말을 웃음으로 무마하며 샬롯을 바라봤다.

이렇게 된 거, 샬롯의 꿈 얘기가 얼른 끝나길 기도하는 수밖에.

“꿈에서 전 굴러오는 돌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어요. 움직일 생각도 못 했죠. 집보다 더 큰 돌이 눈앞까지 와 깔리기 직전이었어요. 그 애가 나타났죠.”

“걔가 가하란인가요?”

“네! 절 구해주고는 자기 이름이 가하란이라고 알려줬어요. 그 옆에는 날개 달린 사슴도 있었고요. 뭔가 얘기를 더 했던 거 같은데, 기억은 잘 안 나요. 그리고 꿈이 끝나죠.”

개꿈 맞네.

율은 미소를 머금고 테리를 바라봤다.

“가하란이 샬롯을 구해주다니, 이것도 인연인가 봐요.”

쓸데없는 꿈이지만 대화를 이어 나가기에 나쁘지 않은 주제였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꿔 계약을 마무리 지으면…….

“눈동자 색. 다른 건 꿈에서 깨어나면 흐릿해지는데, 이름하고 눈동자 색깔만은 계속 기억에 남아요.”

쉴 틈 없이 말하는 샬롯이었다.

눈동자 색이라. 율은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5년 전 일이라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걔 눈이 무슨 색이었더라?

“탁한 하늘색.”

샬롯이 말하는 순간 뿌연 장막 너머에 있던 가하란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율도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맞아, 좀 어두운 하늘색이었지.”

근데 잠깐만.

율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샬롯을 바라봤다.

분명 꿈 얘기였다.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을 텐데, 어떻게 눈동자 색을 맞춘 거지?

테리 역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하란을 현실에서 만난 적이 없나요? 실제로 만난 기억이 꿈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어요.”

“전 그 애를 직접 본 적이 없어요. 꿈에서만 몇 번 만났지. 근데 정말로 하늘색 눈을 가졌어요?”

“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잘 들어맞네요. 그냥 하늘색도 아니고 탁한 하늘색이라고 말한 것까지.”

“뭔가 있는 게 아닐까요? 네?”

샬롯이 호들갑을 떨 때였다. 초롱초롱하던 샬롯의 눈이 스르륵 감기기 시작했다.

“언니, 나 졸려.”

갑작스러운 기면증.

율은 샬롯의 머리를 끌어당겨 어깨에 기대도록 했다.

“나 더 얘기하고 싶은데.”

“그러게 힘을 적당히 쓰라니까.”

“아, 진짜…… 산카는…… 내 말을…….”

샬롯의 몸이 축 늘어졌다.

여유롭게 샬롯을 상대하던 테리도 이번만큼은 당황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왔다.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종종 이럴 때가 있거든요.”

샬롯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할 때였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왔다. 늘어트린 샬롯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율은 샬롯의 머리 위를 바라봤다.

날개 한쪽이 없는 하얀 새.

‘산카’가 그곳에 있었다.

-너.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산카가 나타난 것도 놀라운데, 그 산카가 테리를 응시하며 말을 걸었다.

-산페르, 그 망할 놈과 무슨 관계야?

방 안이 갑자기 건조해진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산카가 역정을 내고 있었다.

샬롯에 이어 산카까지.

손님을 모셔다 놓고 이 무슨 실례인가. 율은 산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산카 님.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앞에 계신 분은…….”

-율.

“네.”

-난 너한테 질문한 적 없어.

입이 다물어졌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입이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안간힘을 써도 입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여간 제멋대로인 정령이다.

-다시 한번 물을게. 인간족 꼬마야, 산페르와 어떤 관계지?

위압감이 커졌다. 산카와 처음 마주하는 인간이라면 몸을 짓누르는 존재감에 고개조차 들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테리는 긴장한 낯빛이었으나 주눅 들지는 않았다.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처음 들어? 그럴 리가. 네 몸에서 그놈 냄새가 나. 아주 짙게 말이야.

“제가 이곳저곳 여행을 많이 다닙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그 중에 산페르란 사람도 섞여 있을 수 있겠죠.”

그렇게 말하며 소매 끝을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는 테리였다.

“물론 지금은 잘 씻어 냄새가 나진 않지만.”

-심상세계가 단단하네. 내 앞에서도 여유를 부리고.

“잘못한 게 없으니까요. 비굴하게 굴 이유도 없고요.”

-자꾸 말대답하면 찢어버릴 수도 있어.

“그러면 잠깐 입을 다물도록 하죠. 전 해야 할 일 많아서 지금 죽을 순 없으니까요.”

산카와 마주 보며 꾸역꾸역 대답하는 테리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혼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인데.

-거짓은 없네. 넌 산페르를 몰라.

“거짓말은 대가가 비싸니까요. 쓸데없이 할 필요가 없죠.”

-하지만 네 주변에 그 망할 놈이 있다는 건 변함 없어. 그러니 내 딸 옆에 접근하지 마. 그놈하고 얽히면 문제만 생기니까.

“새겨듣겠습니다. 하지만, 따님의 의사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족 꼬마가 날 가르치겠다? 재미있네. 이런 건방진 꼬마는 오랜만이야.

산카가 한쪽 날개를 들어올렸다.

테리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그대로 벽으로 밀려났다.

“산카 님!”

아리엘이 일어서서 테리 앞을 막았다. 하지만 아리엘조차 바람에 쓸려 옆으로 밀려났다.

-인간족 꼬마야.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야. 세상은 불합리하다는 걸. 별거 아닌 일에도 너희 같은 가벼운 존재는 사라질 수 있어. 알겠니?

“추, 충고 고맙습니다. 근데 전 의외로 질겨서요.”

벽에 처박힌 상태로 기어이 대답하는 테리였다. 율은 산카를 바라보며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지금도 큰 문제였다. 이걸 무마하려면 루드 팩토리에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지만 산카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잊고 있었다.

샬롯의 보호자는 인간의 도덕관으로 설득할 수 없다는 걸. 보편적인 미덕 따윈 저 위대한 존재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산카가 바라는 건 샬롯의 안전뿐. 다른 건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긴장감이 한없이 치솟을 때였다.

샬롯이 눈을 번쩍 떴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더니 하얀 색을 잡아버렸다.

“산카!”

외침과 동시에 벽에 붙어 있던 테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터질 듯이 모여들던 바람도 흩어졌고, 율의 입을 틀어막았던 힘도 사라졌다.

“하지 말라고 했지!”

샬롯이 산카를 사정없이 뒤흔들며 말했다. 손아귀에 잡힌 산카는 맥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말했다.

-널 위해서야.

“날 외딴섬에 처박아 두려고 이러는 거겠지. 산카가 자꾸 그러면 다들 내 곁을 떠나간다고!”

-산페르의 냄새가 났어. 그놈은 해로워. 이 층에 관심을 갖고 드나드는 놈이야.

“산카보단 안 위험할걸?”

-샬롯. 난 그저…….

“한 마디만 더 해봐. 나 그때는 진짜 산카 안 볼 거야. 아니, 그냥 콱 죽어버릴 거야!”

매섭게 테리를 노려보던 산카가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시무룩해졌다.

-알겠어. 안 그럴게.

손에서 빠져나온 산카가 총총 뛰어올라 다시 샬롯 머리 위에 자리를 틀었다.

“괜찮으세요?”

율은 테리에게 다가갔다. 벽에 처박혀 압박을 받았다. 몸에 문제가 생겼으면 얼른 치료해야 했다.

테리가 어깨 쪽을 매만진 다음 웃으며 말했다.

“던져진 것치고는 아픈 곳이 없네요. 멍든 곳도 없을 거 같고요.”

테리가 시원스레 웃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희 쪽에서 숙소를 잡아 드릴게요. 오늘은 편히 쉬시고 내일 다시 얘기하시죠.”

자리가 불편해졌으니 일단 돌려보내야 했다. 하지만 테리는 괜찮다며 자리에 앉았다.

아까처럼 샬롯과 마주 보는 자리였다.

뚝심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질겁하며 도망쳐도 이해할 텐데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정령술사를 몇몇 만나봤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령은 이번이 두 번째예요.”

-난 정령이…….

산카가 말하려 했지만, 샬롯의 손이 산카의 부리를 붙잡았다.

발성 기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부리를 붙잡혀도 의지만 있으면 말할 수 있을 텐데, 산카는 그대로 침묵해 버렸다.

샬롯을 끔찍하게 아끼는 건 변함이 없다.

“재미난 경험을 해서 좋았습니다.”

-원한다면 또 해줄 수 있어. 이번엔 창밖으로…….

또 부리를 붙잡혔다. 샬롯이 생긋 웃으며 테리를 바라본다.

“이제 괜찮아요. 산카도 얌전히 있을 거예요.”

“네, 그래 보이네요. 아무튼 아까 얘기했던 계약 건을 마무리 짓죠. 제가 원하는 건 스파우에 보조기구 지원 시설을 만드는 겁니다.”

“사업 확장에 도움이 안 되는 조건이네요. 저희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좋고요.”

“뭐, 그렇죠. 돈 벌자고 하는 건 아니니까요. 지원 시설에 필요한 인력과 정비 기술은 루드 팩토리에서 제공할 겁니다. 기초를 잡을 수 있도록 지원팀이 올 거고, 어느 정도 자리 잡으면 현지 인원에게 모든 걸 넘기고 철수할 거고요.”

“정말 남는 게 없는 장사네요.”

“돈 대신 편리가 남죠. 의수와 의족을 보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고요.”

빙긋 웃는 테리였다.

“어떤가요? 이 조건은.”

“거부할 이유가 없는 조건이죠. 오히려 저희가 부탁드려야 할 사안이고요.”

“여기 온 보람이 있네요.”

“세부 내용은…….”

아리엘이 책상을 톡톡 치며 물었다.

“지금 당장 정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지원팀과 함께 견적을 봐야 하거든요. 분배소 용량도 점검해야 하고, 배터리 보급 정도도 봐야 하거든요.”

“단순한 의수가 아니니 봐야 할 게 많겠네요.”

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가 둔으로 돌아가서 지원팀과 함께 오겠습니다. 자세한 건 그때 결정짓도록 하죠.”

“정말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지만, 비용 문제가 저희 예상을 벗어나면 진행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러니 어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할지, 대충이라도 알려주시면…….”

“기부금으로 충당하면 되니까 비용은 걱정하지 마세요. 기반 시설이 어느 정도 갖춰진 곳에 지원팀을 보내는 게 저의 목적이니까요.”

아리엘이 눈을 깜빡거렸다. 대화를 듣고 있던 율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부금이 대체 얼마나 들어오기에 이토록 쉽게 얘기하는 것인가.

“덴스 학회에서 설립한 재단이 저희 후원자입니다. 의수, 의족 사업에 한해서 막대한 기부금이 들어오고 있어서 정말 괜찮아요.”

“마에스트로께서 정말 뜻깊은 사업을 진행 중이시군요.”

“좋은 분이시죠. 덕분에 저희도 활동하기 편하고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잘 마무리돼 가는 것 같았다.

얌전히 앉아 있던 샬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나가 있을게요. 이젠 정말로 방해 안 할 테니 안심하세요.”

꾸벅 인사를 하더니 방문을 열고 나섰다.

“재미있는 친구네요.”

테리가 닫힌 문을 보며 말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율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문을 등진 샬롯은 손에 붙들린 산카를 보며 작게 말했다.

“어때? 된 거 같아?”

-아마도.

“너무 세게 던진 거 아니야?”

-푸딩도 으깨지지 않을 정도로 조심해서 던졌어.

“그래? 잘했어.”

산카가 삐뚜름하게 쳐다본다.

-이런 짓 하지 말고 그냥 말을 하면…….

“안 돼! 아리엘은 절대 허락 안 할 거야. 무엇보다 구치 아저씨가 안 된다고 할 거고. 하지만 산카를 빌미로 삼으면 괜찮지 않겠어?”

샬롯은 복도에 난 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지긋지긋한 곳, 탈출해 보겠어.”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