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잘 지내고 있다’와 ‘열심히 살고 있다’.
문장이 일궈낸 미묘한 간극에 율은 침묵을 입에 물어야 했다.
그라운드 제로.
세상을 바꾼 격변 속에서 평탄한 삶을 누린 자가 몇이나 될까?
순박하기만 했던 그 아이 역시 몇 마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을 경험했을 것이다.
테리가 말한 ‘열심히’라는 말 안에 얼마만큼의 슬픔이 담겨 있을지, 묻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기회가 되면 만나러 와주세요.”
테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야겠네요.”
무덤덤하게 넘기기에는 가깝고, 그렇다고 진중하게 묻기에는 어색한 거리감.
율은 밀레나를 떠올렸다. 그 애라면 가하란에 대해 더 자세히 물을 수 있었을 텐데.
“에단 돌아온 거 맞아? 안 보이는데.”
시장실 창문이 벌컥 열리며 샬롯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리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샬롯.”
샬롯이 뚱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테리를 발견했는지 아차 싶은 얼굴로 말했다.
“미안, 언니. 손님이 있는 줄 몰랐어. 정말이야.”
“저번에 약속했지? 계단으로 다니겠다고.”
“하긴 했는데…….”
샬롯이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율은 작은 목소리로 테리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저희 쪽에서 돌보는 애인데, 워낙 말을 안 들어서요.”
“애들은 원래 말을 안 들어요.”
다행히 언짢아하지는 않았다.
그때였다. 샬롯이 성큼 다가오더니 테리 앞에 섰다.
“나 그렇게 애 아니에요.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오빠도 나랑 몇 살 차이 안 나는 거 같은데.”
“그 말도 맞아요. 그렇게 많이 차이 나는 건 아니죠.”
테리가 빙긋 웃었다. 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샬롯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일단 나가자. 어른들 얘기하는 데 방해하지 말고.”
“나도 어른이야. 열두 살이면 다 큰 거라고.”
또 칭얼거린다. 율은 테리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여준 뒤, 샬롯을 끌고 나왔다.
“너 정말 이럴 거야?”
문을 닫고 작게 말했다.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그래. 계단으로 안 다니는 게 그렇게 죽을죄야?”
“지금 그게 문제야? 안에 손님이 와 있잖아.”
“손님이 온 걸 나한테 알려줬어? 알려주지도 않고 언니들끼리만 얘기하잖아.”
“너 오늘 왜 그래? 대체 뭐가 불만인데.”
“내가 뭐만 하면 매번 그 소리더라? 나 불만 없어! 근데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불만이 생겨. 나 그렇게 어린애 아니고, 생각할 줄도 알아. 근데 왜 매번 혼내? 왜 매번 하지 말라고만 해? 어?”
잔뜩 뿔이 난 모습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신나서 시장 쪽으로 뛰어가던 애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뭘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조용히 해.”
“뭘 알아? 언니는 하나도 몰라.”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율은 닫힌 문을 흘깃 바라봤다.
중요한 손님이 안에 있었다. 투정 부리는 샬롯과 계속 놀아줄 시간이 없다.
“이따가 얘기하자, 응?”
샬롯이 쌍심지를 켰다. 얌전히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너 정말…….”
인상을 쓰기 직전이었다. 시장실 문이 열렸다.
“두 분, 싸우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시죠.”
테리가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상 못 한 행동에 일단 아리엘을 바라봤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안에서 어떤 얘기가 오간 듯했다.
갑작스러운 초대에 되레 당황했는지, 샬롯이 눈치를 살폈다.
“들어와요, 의견을 좀 들어보게.”
“의견이요?”
“네.”
테리가 재차 권유하자 경계심을 풀고 당당하게 소파에 앉는 샬롯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테리가 샬롯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네요. 테리라고 해요. 루드 팩토리의 대표고요.”
“루드 팩토리요?”
“네. 아시나요?”
“어느 정도는요.”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설명이 필요했다. 곁눈질로 아리엘을 바라봤다. 아리엘은 싱긋 웃을 뿐 별다른 눈치를 주지 않았다.
내버려 둬도 된다는 건가?
율은 개입하지 않고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제 소개는 끝난 것 같은데.”
“아, 전 샬롯이에요.”
“따로 직함은 없나요?”
“…전 그냥 샬롯인데요.”
“그렇군요. 좋아요, 샬롯 씨. 다름이 아니라 샬롯 씨한테 자문을 구하려고요.”
“네? 저한테요?”
샬롯이 불안한 눈길로 이쪽을 바라본다. 율은 모른 척 찻잔을 들었다.
아리엘과 테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저희 쪽에서 제작하는 의수와 의족을 스파우에 먼저 납품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좋은 거래 아닌가요?”
“이해관계만 맞아떨어진다면요. 하지만 생산 물량에 한계가 있어요. 이 도시에 우선적으로 물량을 대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데…….”
“루드 팩토리 의수는 돈이 아깝지 않다고 들었어요.”
“좋게 봐주시니 고맙네요.”
“그러니 돈을 더 지불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물건이 적으면 비싸지는 게 당연하니까요.”
“그렇군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시의회에서는 저희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나요?”
“현재 가격의 2배는 어때요?”
그렇게 말하면서 아리엘을 쓱 바라보는 샬롯이었다. 아리엘 역시 책상만 바라볼 뿐 샬롯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니, 2배는 너무 많으니까 1.5배?”
“1.5배란 수치는 어떻게 계산된 건가요? 잉여 예산에서 수치를 매긴 건가요?”
“그렇게 되묻지 말고 원하는 가격을 말씀해 보세요.”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희는 기존 가격에서 4배를 받고 싶은데요.”
“네? 그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런가요? 그러면 3배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많아요. 그냥 2배로 해요. 아까 제가 말했던 대로.”
“타협안 제시하는 게 참 빠르시네요. 시원시원하고 좋아요. 마음에 들었습니다. 샬롯 씨 말대로 2배로 결정하죠.”
“정말요?”
“네. 아주 성공적인 거래라고 생각해요.”
샬롯이 율과 아리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어때? 내가 이 문제를 해결했어. 잘됐지?”
철없이 좋아하는 모습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율은 넌지시 말했다.
“그래, 잘됐네.”
“거봐! 나도 애 아니고, 하면 할 수 있어.”
“그래. 그러면 끝까지 마무리 지어봐.”
“계약서만 쓰면 끝이잖아? 그 정도야 뭐.”
샬롯이 활짝 편 얼굴로 테리를 바라봤다. 기다렸다는 듯이 테리가 말을 꺼냈다.
“공증인은 차후에 부르기로 하고, 일단 약식이나마 계약서를 받고 싶은데요.”
“네! 얼마든지 써드릴게요.”
“좋네요. 그럼 주세요, 계약서.”
당차게 굴던 샬롯이 계약서를 달라는 말에 아리엘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리엘이 무시하자 시선이 자연스럽게 이쪽을 향한다.
이 소꿉장난을 계속해야 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일단은 장단에 맞춰줬다.
“왜 날 봐?”
“계약서.”
“그게 왜?”
“언니가 써줘야지.”
“내가? 계약 주체는 내가 아닌데?”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다 말해놨잖아. 성공시켜 놨는데 왜 계약을 안 해?”
“너 시의회 분기 예산 알고 있어?”
“…아니.”
“그러면 뭘 근거로 2배를 제시한 거야?”
“좋은 물건이잖아. 필요한 물건이잖아. 그러면 약간 비싸더라도 가져와야지.”
“2배는 약간 비싼 게 아닌데.”
지켜보던 테리가 끼어들었다.
“샬롯 씨.”
“네?”
“책임지실 수 있는 거죠? 구두 계약이라고는 하나 약조를 받아 놨습니다. 어기시면 곤란해요. 이건 신용도에 영향을 끼치는 일입니다. 루드 팩토리와 스파우, 원만한 거래를 위해 계약 조건은 꼭 지켜 주셨으면 하네요.”
샬롯의 눈이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곧이어 입술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꽉 맞물렸다.
“샬롯 씨?”
테리가 말을 걸자마자, 샬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나 놀리는 거죠? 셋이서 다 짠 거죠?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여요?”
씩씩거리는 샬롯 주변으로 바람이 몰려들었다. 닫아놓은 창문이 덜컹거리고, 찻잔 안의 물이 출렁거렸다.
내버려 뒀다간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샬롯의 팔을 붙잡으며 멈추라고 말하기 직전이었다.
“샬롯 씨. 어른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테리가 말했다.
“동등한 자격으로 입회했으면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셔야죠. 그걸 원했던 거 아닌가요? 아니면 책임은 뒷전이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람인가요?”
샬롯 주변에서 휘몰아치던 바람이 서서히 흩어졌다.
율은 테리를 바라봤다.
대기가 요동치는 건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겁내고 놀라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테리는 수없이 경험해 봤다는 듯, 차분하게 샬롯만 응시했다.
“전 예의 따질 생각 없습니다. 샬롯 씨는 책임을 아는 어른이니까요. 실수했으면 대가를 치르면 될 뿐이죠. 그렇지 않나요?”
“그게…….”
“물론 다른 방법도 있어요. 번거로운 책임 따윈 양옆에 계신 분들에게 던져버리고, 가볍게 사과하는 거예요.”
침묵을 고수하던 아리엘이 한마디 툭 던졌다.
“난 샬롯 의견에 따를게. 예산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봉급을 깎고 모아둔 사비를 털어내고, 그것도 안 되면 의회 자리를 내놓는 것으로 대금을 충당할 수 있어. 직함을 내걸고 한 약속이란 건 그런 거니까.”
짧은 침묵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샬롯이 고개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자격도 없는데 나섰어요. 그러니 없던 일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리엘 언니한테 시장 자리는 정말 소중해요.”
“진중한 사과, 감사드려요. 흔쾌히 받죠.”
“정말요?”
“네. 책임을 아는 어른다운 행동이었어요. 옆에 계신 분들이 샬롯 씨를 보고 어린애 취급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요.”
“그렇죠? 저 되게 어른스럽죠?”
금방 헤실헤실 웃는 샬롯이었다.
“계약 건, 마저 얘기하시죠.”
테리가 아리엘 쪽으로 고개를 틀며 말했다.
“샬롯이 여기 있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예의를 아는 분이시니까요.”
치켜세우는 말에 샬롯이 입을 꾹 다무는 게 보였다. 애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의수 쪽 사업은 기부금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이건 어떨까요? 루드 팩토리에 기부금을 대죠. 대신 물량을…….”
“아쉽게도 기부금은 더 받지 않을 생각이에요.”
“어째서죠?”
“보조기구 사업은 당분간 덩치를 키우지 않을 겁니다. 유지 관리만으로도 벅찬 상황이거든요. 업체에 직접 찾아오는 분들의 의수, 의족 상태를 가하란이 하나하나 봐주고 있는 실정이라…….”
“생산에만 몰두하기 어렵다는 거군요.”
“그런 거죠.”
“그러면 계약을 언급하신 이유가 뭐죠? 따로 바라는 게 있는 건가요?”
“보조기구 업체 유치. 이걸 고려 중이라고 하셨죠?”
아리엘의 눈이 반짝일 때였다.
샬롯이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보였다. 입술도 꿈틀대고 있었다.
테리가 한 ‘어른스럽다’는 말 때문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것 같다.
“샬롯 씨, 할 얘기가 있는 건가요?”
애쓰고 있는 샬롯이 눈에 들어왔는지, 테리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샬롯의 입이 금세 열렸다.
“가하란! 혹시 꼬마 앤가요? 아니지, 이제는 저만큼 컸으려나요? 아무튼 저 그 이름을 알아요!”
신기한 장난감을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신나 하는 샬롯이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율은 그저 멍하니 샬롯만 바라봤다.
얘가 또 왜 이러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