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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37화 (210/558)

제237화

“시각 정보는 어디로 받는 거지? 얼굴 모듈이 없는데.”

“체임버 위쪽에 달아놓은 거 아닐까요?”

둥근 거병 앞으로 다가가서 손을 들었다. 거병이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체임버 덮개가 열리고 안에서 뚱한 표정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과 청년, 그 사이를 오가는 얼굴. 검갈색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있었다.

“저기요. 그렇게 갑자기 막으시면 위험해요.”

남자가 말했다.

“미안해요.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랬어요.”

“물어볼 거요?”

남자가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를 닦았다. 율은 한 걸음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루드 팩토리에서 일하는 분인가요? 거병 외장갑에 표식이 그려져 있던데.”

“예, 뭐. 일하는 사람이긴 하죠.”

역시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스파우 시의회에서 이번에 의수를 대량 주문했었는데, 알고 계시나요?”

“알고 있어요. 근데 저희 쪽에서 물량 맞추기 어렵다고 거절했을 텐데요.”

“예, 그랬죠. 그래서 예상보다 적은 수량만 사들여 오기로 했는데, 그마저도 분실해 버렸어요. 몬스터 때문에.”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거리를 돌아다녀 보니까 의수와 의족을 교체해야 할 분이 많던데. 이 도시에는 보조공학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없나 봐요?”

“겨우 자리 잡은 도시예요. 분배소가 정상 가동한 지 2년이 채 안 됐고요. 전문 업체가 자리 잡기엔 위험성이 높으니 아직 유치하지 못했어요.”

남자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안 좋은 소문이 많이 들리긴 하더라고요. 그나저나, 시에서 돈 받으시나 봐요?”

“소개가 늦었네요. 전 관리관으로 일하고 있는 율이에요. 이것저것 잡무를 보고 있죠. 그리고 이분은…….”

율이 옆을 바라봤다. 아리엘이 연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스파우 시장직을 맡은 아리엘이에요.”

“아, 티안의 아리엘 씨가 그쪽이었군요.”

말을 툭 내뱉던 남자가 머쓱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툭 때렸다.

“그쪽이라 한 건 실수예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귀족이란 허울 좋은 껍데기는 예전에 버렸으니까. 요즘은 이름뿐인 귀족보다 클랜과 상인, 그리고 지식인들의 시대죠. 당신처럼.”

남자가 거병에서 내려왔다.

“루드 팩토리에서 일하고 있는 테리입니다. 잘 몰라서 그러는데, 악수 신청해도 괜찮은 거죠?”

“오히려 제가 부탁드려야죠.”

아리엘과 테리가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그사이 율은 입 안에서 ‘테리’란 이름을 연신 굴려보았다.

잠깐만.

“혹시 루드 팩토리 대표님 아니신가요?”

잘못된 기억이 아니라면 분명 루드 팩토리 대표의 이름이 테리였다. 흔한 이름이니 동명이인일 수도 있으나, 일단 확인해야 했다.

“예. 일단 대표이긴 합니다.”

율은 입을 살짝 오므렸다.

십 대 중후반. 어디를 가든 성인 취급해 준다지만, 그래도 한 업체의 대표라기엔 너무나도 젊다.

게다가 루드 팩토리라면 ‘기업도시 둔’ 내에서도 이름깨나 알린 보조기구 생산 업체였다.

거병 모듈 제작에도 참여할 정도로 기반이 튼실한 사업체인데.

“제가 대표라고 하면 다들 어색해하시더라고요. 나이 좀 들어 보이려고 수염도 기르는 중인데, 이게 또 잘 안 나서.”

하하, 경쾌하게 웃는 테리였다.

“젊은 나이에 성공하셨네요. 저희가 보고 배워야겠어요.”

안 좋은 인상을 남길 순 없었다. 율은 재빨리 표정을 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저한테 배울 건 없어요. 전 이름뿐인 대표거든요. 저도 율 씨처럼 잡무를 보고 있어요.”

“예?”

“한마디로 바지사장이에요. 실질적인 대표는 따로 있어요. 근데 그 녀석이 자기는 이런 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제가 억지로 맡게 된 거예요.”

테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근데 시장님께서 무슨 일로 절 불러 세우신 건가요?”

“인사를 나누고 싶었어요.”

“그러면 볼일은 다 본 것 같은데, 다시 타도 될까요?”

짓궂게 웃는 테리였다. 아리엘이 거병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곤란한데요. 바쁘시지 않으면 시간 좀 내주시죠.”

“바지사장이 뭐가 바쁘겠어요.”

테리가 손목에 감긴 시동키를 매만졌다. 거병이 주저앉으며 체임버 덮개가 닫혔다.

“서서 얘기하는 것도 좋지만, 뭐 좀 마시면서 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사실 제가 목이 말라서.”

“공관으로 가시죠. 그리 멀지 않으니.”

테리와 함께 공관으로 이동했다.

율은 멀어지는 거병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렇게 방치해놔도 되는 건가요? 치안이 엉망은 아니지만, 그래도 욕심에 눈먼 사람이 있을 텐데요.”

“괜찮아요. 외장갑 마감을 기가 막히게 해놨거든요. 툴로 뜯어내려 해도 한참 걸릴 거예요. 무엇보다 외부 충격이 연이어 가해지면 방어 모드가 켜져요.”

“방어 모드요?”

테리가 양팔을 옆으로 뻗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 혼자 움직여요.”

“재미있네요. 오토마타에게 어느 정도 제어권이 있나 봐요?”

“예. 동생이 이것저것 건드려 놓아서 아주 재미난 기계가 됐어요.”

동생. 루드 팩토리의 실질적인 주인. 누구인지 묻고 싶었지만 걸으면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공관에 도착해서 시장실로 테리를 안내했다. 아리엘이 자리를 권하자 테리가 털썩 앉았다.

“이거 엄청 푹신하네요.”

“저희 쪽에도 손재주 좋은 장인이 계시거든요.”

“어딜 가나 그런 분들이 계시죠.”

율은 차갑게 내린 차를 아리엘과 테리에게 가져다주었다. 테리는 코를 몇 번 킁킁거리다가 단숨에 차를 마셨다.

“덕분에 한숨 돌렸어요. 거병 안이 워낙 찜통이라.”

“냉방 시스템을 해놓지 않았나요?”

“불필요한 건 전부 떼어냈어요. 경량화의 극치죠.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만 남겨둔 상태예요.”

율은 둥그스름했던 거병을 떠올렸다.

“얼굴 모듈까지 제거한 건 처음 봤어요.”

“장거리를 이동하려면 마나 효율을 끌어올려야 하니까요. 그리고 사실 얼굴 모듈은 없어도 그만이에요. 감각장치 몇 개 덜어낸다고 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난 발상이네요. 근데 전투 시에는 위험하지 않아요? 시각화 장치가 체임버 정면에 붙어 있던 것 같은데.”

율의 질문에 테리가 짙은 웃음을 보였다.

“경량화의 목적은 재빠른 도망을 위해서예요. 거병 조종하는 솜씨가 별로라 전투는 못 하거든요. 대신 도망 하나는 기깔나게 치죠.”

사업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건 신속, 그리고 생존일 테니.

“덕분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고 한 번 난 적이 없어요. 몬스터가 보인다 싶으면 바로 튀었거든요.”

테리가 코끝을 매만졌다.

“예전에는 몸을 던져 마수와 싸우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멋져 보이기도 했고. 근데 책임이란 걸 배운 후부터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죠. 전 살아서 열심히 돌아다녀야 해요. 꿈꾸던 낭만적인 모험가는 아니지만, 지금은 이런 생활에 불만 없어요.”

말을 끝낸 테리가 머쓱한 시선으로 찻잔을 내려다봤다.

“혼자 주절주절 재미없는 소리를 늘어놨네요. 혼자서 다니다 보니 외로웠나 봐요.”

“재미없지 않았어요. 콧대 높여 자랑만 했다면 질렸겠지만, 대표님 얘기는 들을 가치가 있었어요.”

아리엘이 말문을 열었다.

“가치라니.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전 원 없이 떠들었으니, 이제 시장님의 얘기를 들어볼까요?”

“더 하셔도 상관없어요.”

“그럼 사양하지 않고…….”

테리가 눈치를 쓱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다 손을 내저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농담입니다. 그렇게 눈치가 없지는 않아요. 말씀해 보세요. 저한테 뭘 바라는지.”

“꼭 바라는 게 있어서 초대한 건 아니에요.”

“그 말, 반만 믿을게요.”

아리엘이 손깍지를 꼈다.

“좋아요. 겉치레로 빙빙 돌려봤자 시간만 아까울 뿐이죠. 제가 바라는 건 하나예요. 루드 팩토리에서 생산되는 의수와 의족을 우리 시에서 먼저 받아보는 거.”

“음, 알고 계시겠지만 생산 물량이 한정적이에요. 그라운드 제로 이후 손과 발을 못 쓰게 된 분들이 많잖아요?”

“네, 마나 침식 때문에 신체의 자유를 잃으신 분들이 많죠.”

“둔도 상황은 다르지 않아요. 특히 어린애들이 문제죠. 몸이 금방 자라는데 의족 사이즈가 맞지 않으면 걷는 것부터 불편하니까요.”

“성인 물량이 부족한 건…….”

테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불편함부터 해결하자는 게 저희 목표거든요. 그나마 다행인 건 마나 침식에 희생당한 아이들이 적다는 거겠죠.”

“성인들 위주로 문제가 생기긴 했죠.”

루드 팩토리의 의수는 정밀한 마나 회로 덕에 신경 연결이 원활했다.

배터리로 마나 공급만 제대로 해주면 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동작은 어려움 없이 수행 가능했다.

불편함 없이 컵을 들 수 있는 거,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잡을 수 있는 거.

멀쩡한 손을 가진 사람한테는 아무런 제약이 없는 그 행동이, 오래된 의수를 달고 사는 사람한테는 힘겹기만 한 육체 노동이 될 수도 있다.

그 문제를, 루드 팩토리의 의수는 저렴한 가격으로 해결해주는 것이다.

“사실 저희 의수, 의족 쪽 사업은 계속 적자인 상태예요. 기부금으로 겨우겨우 돌아가는 실정이죠.”

“가격 대비 성능이 월등하긴 하죠. 구매 비용을 높이지 않는 건…….”

“우리 대표가, 그러니까 제 동생의 신념이 아주 확고하거든요. ‘이걸로 돈 벌지는 말자.’ 물론 저 역시도 같은 생각이고요.”

“멋지네요.”

“사실 저는 폼만 잡는 거예요. 대단한 건 동생 놈이죠. 제가 그런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진즉에 비싸게 팔아서 부자가 됐을 겁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데, 안 하고 계시잖아요.”

테리가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대화를 듣고 있던 율이 넌지시 끼어들었다.

“그 동생분께서 의수 회로를 개발하신 건가요?”

“네. 의수뿐만 아니라 루드 팩토리에서 제작되는 마법공학품은 대부분 그놈의 작품이에요.”

테리가 동생이라 칭하는 걸 보면 더 어리다는 뜻인데.

대체 얼마나 뛰어난 머리를 갖고 있기에 의수의 회로는 물론, 거병 모듈까지 건드리는 걸까?

“동생분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루드 팩토리 하면 대표님 이름 외에는 드러난 게 없어서요.”

“이름이야 얼마든지 알려드릴 수 있죠. 가하란. 둔에서는 제법 유명해진 이름이에요.”

가하란?

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 애는 아니겠지?

율은 5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꺼냈다.

“저도 가하란이란 이름의 아이를 알고 있어요. 5년 전 둔에서 만났죠.”

“그래요?”

“당시에 일곱, 여덟 정도 됐을 거예요. 브라인 특무대령과 함께…….”

테리가 손뼉을 쳤다.

“맞아요, 그 가하란.”

“정말인가요? 그 애가 루드 팩토리에서 개발을 맡고 있어요?”

“예. 근데 대륙 땅이 좁긴 하네요. 이런 곳에서 가하란의 지인분을 만나고. 많이 친했나요?”

“특무대령님의 부탁을 받고 가하란을 잠깐 보호하기도 했어요. 그때 얘기도 많이 나눴죠. 성도로 떠난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러시구나.”

주억거리는 테리였다.

가하란.

추억에 잠겨 있던 이름이 부상했다. 율은 질문이 참 많았던 그 애를 기억하며 입술을 뗐다.

“가하란은 잘 지내고 있나요?”

안부를 묻는 가벼운 말이었다.

하지만 대답까지 꽤 긴 침묵이 있었다.

테리가 머리를 쓸어 올린 다음 말했다.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다기보단…… 열심히 살고 있어요. 네, 정말 열심히 살고 있죠.”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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