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36화 (209/558)

제236화

머리가 지끈거린다. 명세서를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용병단 단장을 바라봤다.

“심각하네요.”

율의 시선을 받은 용병단장이 긴 한숨을 내뿜었다.

일이 원만하게 처리됐다면 피차 얼굴 볼 사이가 아니었다. 담당자가 물품 확인서를 작성해 넘기면 끝날 일이니까.

“정말로 몬스터한테 습격을 당한 거겠죠?”

“이 정도 물건으로 시의회와 척질 정도로 멍청하지 않수다. 팔다리 잘려 누워 있는 동료들을 봐야 속이 시원하겠다면 내 직접 데려오겠지만.”

단장의 말에 율은 손을 저었다.

“절차상 확인은 해야 하니까 물어본 거예요. 아시다시피 세상이 이렇게 바뀌고 나서 사람 간의 신용이란 게 참 얄팍해졌잖아요.”

단장이 씁쓸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율은 명세서를 재차 확인했다.

“배터리 분실이 뼈아프네요. 의수도 마찬가지고. 분배소 관련 물자라도 들어와서 다행이긴 하지만…….”

일반인이 마법공학품을 이용하려면 배터리가 필요하다. 배터리는 소모품이라 꾸준히 공급받아야 하는데, 이번 사태로 배터리 수급에 차질이 생겼다.

“피해보상 절차랑 대금 관련 서류는 이따가 담당자를 통해 처리하고, 우선 중요한 건 물자 보급이에요.”

“인원을 다시 꾸려서 갈 테니 시간을 좀 주쇼.”

“언제쯤 정리가 될 것 같아요?”

“그게…… 나 혼자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네 개의 용병단이 연합해 물자 이동을 도왔으니 혼자서 결정할 순 없겠지.

“피해 정도가 심한가요?”

“거병 두 개를 현장에 버리고 온 상태요. 상황이 워낙 안 좋아서 챙길 여력도 없었지. 지금쯤이면 갈기갈기 찢겨 고철덩이로 변했겠지만.”

“이번에도 군집이었나요?”

용병단장의 손이 잘게 떨렸다. 조끼 안으로 손을 넣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미안하지만 여긴 금연이에요.”

“거, 서럽게 담배도 못 피우게 하는 거요?”

“피우는 거야 자유지만, 뒷감당도 본인이 하셔야 하는데.”

“뒷감당이랄 게 뭐……”

용병단장이 보급형 라이터로 담배 끝에 불을 붙일 때였다.

발갛게 타오르던 담배가 싹둑 잘렸다. 용병단장이 입술로 담배를 문 채 아래로 떨어지는 담배 끝을 바라본다.

“다음에는 그 목이 떨어질 수도 있어요.”

“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요?”

“알려고 하지 마세요. 모르는 편이 나을 테니.”

잔잔하게 감돌던 바람이 사라졌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진 거였다. 경고해주고 한 번은 참아주는 산카라니.

3년 전만 해도 샬롯 앞에서 담배를 물던 여자의 머리카락이 죄다 잘려 나갔다.

용병단장이 반토막 난 담배를 손으로 구겼다.

“하여간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더 무섭다니까. 희한한 마법을 제멋대로 쓰고.”

“마법은 아니고, 제가 한 것도 아니지만 뭐 그렇다 치자고요. 마수와 조우했을 때 변이체도 있었나요?”

“군집이었지만 변이체는 없었소. 전투가 길지 않아 확실한 건 아니지만, 만약 변이체가 있었다면 생존자가 더 줄었겠지.”

용병단장이 식은 차를 단숨에 마셨다.

“날아다니는 놈들도 주변에 있었는데 다행히 다가오진 않더군. 영역 싸움을 하는 건지, 아니면 관심이 없었던 건지.”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영상 기록자가 죽었소. 최대한 살려보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은 놈을 챙길 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아서.”

율은 가만히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배신이 미덕이 된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용병단장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단장 말대로 장난질 칠 정도로 고가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향후 일정은 회의한 다음에 말씀드리도록 하죠.”

“계약을 끊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배터리 여유분이 당장 필요해요. 손실률이 높아진 배터리를 계속 쓰라고 할 수도 없고요. 기반 시설조차 관리하지 못하는 시장이 어떻게 될지, 잘 아시죠?”

“우리가 비용을 감당하고 최대한 빠르게 사람들을 꾸려볼 테니…….”

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로 최선을 다해보죠. 단장님께서 먼저 준비를 마친다면 일을 맡길게요. 하지만 우리가 대타를 먼저 구하면…….”

뒷말을 흐렸지만 뜻은 제대로 전달됐으리라.

씁쓸하게 바라보던 용병단장이 무릎을 짚으며 몸을 세웠다.

“사람들하고 얘기해 보겠소.”

“알겠어요. 그리고, 부상자들에게 위로의 말도 전해주세요.”

“위로는 말보다 계약으로 해줬으면 하는데.”

“그건 제 권한 밖이에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용병단장이 방을 나섰다.

율은 명세서를 힐긋 바라봤다. 종이에 적힌 글자들이 눈을 어지럽게 만든다.

“일단 공문부터 띄워야 하나.”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두통이 머리 정중앙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작은 괴물이 꼬챙이를 들고 머릿속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스콜라 생도 시절에는 두통을 모르고 살았다. 그땐 몸이 힘들었지, 머리가 힘들지는 않았으니까.

명세서를 들고 시장실로 향했다. 아랫선에서 해결해보고 싶었지만, 이건 아리엘의 결정이 필요한 문제였다.

문을 두 번 두드리고 기다렸다.

조용하다. 다시 두 번.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설마하며 문을 살짝 열었다.

아리엘은 여전히 책상에 엎어진 채 새근새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난 거 같은데.

율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하긴, 요 며칠 동안 아리엘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일주일간 총 수면 시간이 열 시간도 안 될 것이다.

도시 개발이 궤도에 오르면서 누구보다 바빠진 게 아리엘이었다.

급변의 시대였다. 멍청하게 있으면 뒤로 밀려 사라지고 만다. 그걸 잘 알기에 아리엘은 자신을 향한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아리엘만 그런 건 아니었다.

시장직을 노리는 다른 시의회 구성원들도 비슷한 상황이리라.

그렇기에 한가로이 잠을 잘 수도 없는 거고.

깨워서 상담해야 하지만, 조금만 더 쉬게 내버려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방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문을 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있는 아리엘이 보였다.

“괜찮아요?”

“괜찮냐고? 어, 괜찮아. 아니, 안 괜찮은 건가?”

횡설수설하던 아리엘이 눈을 크게 떴다.

“나 몇 시간 잔 거야?”

“두 시간 정도요.”

“세상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에요. 사람 몸이란 게 무리하면 반작용이 크게 오잖아요.”

“너무 오래 잤어.”

“언니 자는 동안 세상 안 무너졌으니까 괜찮아요.”

다가가서 아리엘을 일으켜 세웠다.

“재수 없는 꿈을 꿨어.”

의자에 앉은 아리엘이 퀭한 눈으로 빈 책상을 내려다봤다.

“투표용지를 하나하나 확인하는데 내 이름이 나오질 않는 거야. 단 한 표도. 믿을 수 없어서 투표함으로 달려가다가 잠에서 깼어.”

“최악이네요.”

“그러니까.”

“그 꿈에 비하면 이번 일은 좀 낫긴 하네요.”

율은 명세서를 내밀었다. 아리엘이 확인하는 동안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잠시 후.

“들여오기로 한 물자 중 반 이상이 날아갔네?”

“한 표도 못 받는 것보단 낫죠?”

“그래, 그것보단 낫네.”

아리엘이 명세서에 손을 올렸다.

“여유분 소진 시기에 맞춰 배터리 확보 못 하면 내 지지율은 여기서 더 낮아질 거야.”

“이번 일을 담당한 용병단 측에서 인원 확보한 후 다시 출발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기다리는 거와 우리가 다시 뽑는 거, 어느 쪽이 빨라?”

“아무래도 뽑는 거겠죠? 거병 두 기를 잃어버렸으니 그쪽도 여력이 없을 거고요.”

“도시방위군에서 인원을 차출하는 건…….”

“여론이 안 좋아질걸요. 겨우 군 체제를 잡고 지금에 이르렀는데, 의회가 방위군 쪽에 손을 벌리면 군벌이 득세할 수도 있어요.”

“왜 이렇게 꼬이는 걸까.”

“그라운드 제로 이후 일이 쉽게 풀린 적이 있어요?”

“없지. 단 한 번도.”

작금 도시는 참정권을 얻은 시민들에 의해 지도자가 결정된다.

참정권은 방위군에 참여한 인원에게만 주어지며 지위 고하, 성별에 관계없이 한 표씩 소유하게 된다.

연합왕국의 도시유지법을 기초로 만든 거라 큰 문제 없이 굴러가고 있긴 하지만, 최근 들어 이변이 발생하고 있었다.

의회의 관리 감독하에 놓인 방위군 쪽에서 파벌이 생겨난 것이다.

아리엘의 입지가 좁아진 것 역시 방위군 문제가 시초였다.

“예상은 했지만 결국 제국 시절 군부처럼 자리를 잡겠지?”

“아마 그렇게 되겠죠. 참정권이 모두에게 주어진 이상 세력이 규합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니까요. 도시 안정화 이전에는 정치 분쟁할 여력이 없어서 다들 합심했지만, 지금은 나눠 먹을 게 생겼으니.”

아리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 도시에 들어와 있는 용병단 수가 어떻게 되지?”

“정식으로 신고한 곳은 열두 곳이지만, 더 있을 수도 있어요. 공고를 낼까요?”

“하루만 기다려보자.”

아리엘이 외투를 챙겼다.

“분배소 좀 다녀와야겠어.”

“같이 가요.”

아리엘과 함께 공관을 나섰다. 클랜 밀집구를 지나 분배소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대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마나 완충까지 여전히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지?”

“네. 이번에 둔에서 온 부품으로 교체하면 10분 정도 단축될 거라고 하는데, 실적용해본 다음에 수치를 확인해봐야 해요.”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탑 아래로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배터리를 커넥터에 연결한 채 주변인들과 대화 중이다.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가정용 배터리이다.

“배터리 사이즈를 더 못 키우는 건가?”

“둔에서 시제품이 만들어지고 있다고는 하는데, 아직은 소문에 불과해요.”

마나 충전을 끝낸 사람들이 가방에 배터리를 담아 자리를 떠났다.

율은 팔짱을 낀 채 분배소를 바라봤다.

마수가 날뛰는 세상이 됐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이 위대한 발명품 덕분이었다.

마나 분배소와 배터리.

‘마에스트로 덴스’의 역작.

“만 명의 노동력보다 한 명의 천재가 더 가치 있는 시대가 됐네요. 덴스 교수 같은 분을 영입해야 이 도시도 더 성장할 텐데.”

이야기를 듣던 아리엘이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런 거물은 바라지도 않아. 실수 없이 일 처리 잘해주는 사람이면 만족할 수 있어.”

“하긴,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거물급 인사가 이런 중소도시로 올 리 없겠죠.”

분배소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시화 패드 앞에 있던 담당자가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안정화 작업은 순조롭나요?”

아리엘이 질문했다.

“예. 출력이 예상보다 낮은 건 조금 아쉽습니다만, 분배 장치에 과부하가 걸려 멈추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이번에 들어온 회로 기판으로 교체하면 출력 문제도 해결 가능하니 당분간 괜찮을 겁니다.”

“마나 공급에 문제가 없다는 거죠?”

“네.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만…… 배터리 교체 요구가 최근 들어 늘어나고 있습니다. 슬슬 전량 수거해서 새로운 것으로 나눠주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여유분을 준비해 볼게요. 그때까지만 고생해줘요.”

분배소 밖으로 나온 아리엘이 눈을 찌푸렸다.

“율, 바로 공고 올려. 하루 기다리다가 또 문제 생길 거 같아.”

“알겠어요.”

“시 운영 자금 말고 내 사비로 대금 지급할 테니까 숫자 상관없이 최대한 구해봐. 군집과 마주치더라도 뚫고 나올 정도로.”

율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맞은편에서 거병 한 기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전체적으로 둥그스름한 모양에 일반적인 거병과 달리 얼굴 모듈이 없었다.

제작비를 극단적으로 줄인 모델인가.

“어, 저 표식.”

체임버 덮개 오른쪽.

눈이 큰 귀여운 거북이가 그려져 있었다.

“저거 루드 팩토리 아니야?”

아리엘도 알아봤는지 입을 열었다.

“맞는 거 같아요. 따로 신고된 게 없는 걸 보면 개인적인 일로 여길 찾은 거 같네요.”

“루드 팩토리 쪽 의수도 챙겨 와야 하잖아.”

“그렇죠. 거기 의수가 가격 대비 가장 좋으니.”

율은 아리엘 앞으로 나섰다.

“인사 좀 하고 올게요. 알아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나도 같이 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아리엘과 함께 거병 옆으로 걸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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