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병공 진군가-235화 (208/558)

제235화

“고엘 클랜 쪽하고는 얘기가 끝난 건가요?”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확정표가 하나 더 늘어났으니…….”

율은 메모 보드 왼쪽에 붙어 있던 쪽지를 떼서 오른쪽으로 옮겼다. 고엘도 이쪽으로 넘어오긴 했네.

시선을 보드 중앙으로 이동시켰다.

“필 상회 쪽은 어때요?”

“잠시만요.”

보좌관이 빠르게 다이어리를 넘겼다.

“다음 주 수요일에 약속을 잡아놓긴 했는데, 저번처럼 미룰 가능성이 있어요.”

“여전히 확답은 없는 거네요?”

“네.”

“피슨 쪽에 붙으면 골치 아픈데.”

율은 뻐근한 목을 주물렀다. 앞으로 3개월은 더 고생해야 하는데.

“좀 쉬었다가 하죠.”

“알겠습니다. 30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요.”

보좌관이 묵례와 함께 방을 나섰다. 율은 창문을 활짝 열고 커피를 내렸다.

은은한 커피 향을 맡으며 북적이는 시장을 내려다봤다.

한때는 노점 몇 개만 듬성듬성 자리한 거리였지만 지금은 인근 마을에서 몰려들 정도로 기틀을 잡았다.

물류량의 증가는 도시의 성장을 야기한다. 피와 영양분이 원활하게 돌고 있으니 이 도시는 몸집을 더 키워 나갈 것이다.

“경쟁자가 느는 건 어쩔 수 없나.”

시의회 내에서도 파벌이 갈렸다.

아리엘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은근슬쩍 간을 보기 시작했다.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이번 선거는 위험할지도 모른다.

“마법공학으로 몸을 대체한다는 게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그 위험한 기계에 의지하다가는 언젠가 몸도, 영혼도 잃고 말 겁니다. 쇳덩어리는 쇳덩어리다울 때 가장 보기 좋습니다. 기계에 의지를 담으려는 그 패악을…….”

공관 앞 발언대. 오늘도 단골손님이 찾아왔다. 벌써 3개월째인가?

율은 창틀에 몸을 기댄 채 열렬히 외치는 남자를 바라봤다. 나무로 된 의수를 단 남자는 마법공학의 위험성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지난 5년간, 정말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마법공학이 발전했으니까.

그라운드 제로가 체제를 파괴했다면, 마법공학은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교두보가 됐다.

마나와 친숙해진 신세대들에게는 기회와 편의를,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난해함과 공포심만 가중시킨 마법공학.

“지금 좌판에 늘어져 있는 기계 인형을 보십시오! 언젠가 저것들이 영혼을 모방하며 인간을 공격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늦습니다. 지금이라도 인간 본연의 모습을, 자연 그대로의 우리를…….”

남자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율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옅게 웃었다.

“마법공학을 혐오하는 분이 마법공학을 이용한 확성기 앞에서 얘기한다라.”

귀족 또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마법공학은 이제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기본 시스템이 됐다.

당장 마법등만 해도 5년 전에는 귀족 거주지에만 설치돼 있었으며, 그것만 전담으로 관리하는 마법사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분배소에서 보급받을 수 있는 마나로 간편하게 마법등을 작동시킨다.

어려운 수식을 이해해야 하거나, 회로 설계를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딸깍, 버튼 한 번이면 마법등을 켤 수 있게 됐다.

제작 과정은 여전히 난해하나, 이용에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레일 위를 달리는 자동수레의 마나 회로를 설명하라고 하면 백이면 백 입을 다물 것이다.

하지만 사용은 할 수 있다. 어린애도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사용법만 익히면 누구나 다 자동수레를 움직일 수 있다.

5년 전만 해도 마법공학품을 다룬 다는 건, 마법공학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지금은 제작과 사용이 완벽하게 분리됐다.

마법공학을 몰라도, 마나를 몰라도 의지만 있다면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격변의 시대였다.

목 놓아 외치던 남자가 발언대에서 내려왔다. 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남자였다.

다음에 올라선 건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한번 올라와 보고 싶어서 신청했는데, 이렇게 당첨이 됐네요. 근데 막상 올라와 보니까 되게 떨려요. 아까 그분은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지…….”

수줍은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전파됐다.

그 때문일까?

심드렁하게 쳐다보며 지나치던 사람들이 발언대 앞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율도 커피 잔을 내리고 귀를 열었다.

보통 발언대에 올라서는 사람들은 열성적이기 마련이다.

주제를 짧은 시간 안에 쏟아내야 하니 말도 빨라지고 목소리도 커진다.

폭풍 같은 연설이 쭉 이어져 오다가 산들바람이 불어오니 관심이 쏠릴 수밖에.

“전 마법 사용에 대해 말해보고 싶어요. 아시다시피 그라운드 제로 이후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었잖아요? 그에 발맞춰 각종 제재도 늘어났고요. 근데 가끔은 생각해요. 개인에게 주어진 능력일 텐데 너무 억압하는 게 아닐까…….”

목소리에 집중할 때였다.

밑에서 불쑥 얼굴이 솟아올랐다.

여긴 3층이다. 코앞에 사람 얼굴이 있어선 안 될 높이다.

“샬롯.”

율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샬롯이 눈웃음 지으며 창틀을 넘어왔다. 샬롯의 몸을 감싸던 푸근한 바람이 방 안을 한 바퀴 휘감고 사라졌다.

“계단을 이용했으면 하는데.”

“이게 더 편해.”

“편하기야 하겠지.”

샬롯이 보드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가 불리한 거야?”

은색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묻는 샬롯이었다. 율은 샬롯에게 걸어가 어깨를 붙들고 보드 앞에서 떼어냈다.

“어린애는 알 필요 없어요.”

“열두 살이 어떻게 어린애야?”

“하는 행동이 어리면 어린애지.”

“그렇게 말하면 율도 어린애 맞지?”

툴툴대는 샬롯이었다.

“심심하면 타챠 씨한테 가서 놀아달라고 해.”

“싫어. 그 아저씨 요즘 신경질이 부쩍 늘었어. 이게 다 아리엘이 괴롭혀서 그래. 일을 잔뜩 시키니까 화가 날 수밖에 없지.”

몸을 살짝 숙여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간 샬롯이 다시 보드 앞에 섰다.

“아리엘한테 투표 안 하면 조용한 곳에 가둬둘 거라고 협박하면 안 돼?”

“그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거야?”

“타챠 아저씨. 인간족은 너무 어렵게 산대. 힘의 논리가 오히려 공정할 때도 있는데 그걸 애써 무시한다고.”

“안 되겠다. 너 타챠 씨하고 당분간 만나지 마. 대화도 금지.”

도마뱀 양반이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커피 잔을 치우고 창문을 닫을 때였다. 샬롯이 바짝 다가왔다.

“율.”

“왜?”

“도시 밖으로 나가면 안 될까?”

“된다고 생각해?”

샬롯이 인상을 썼다.

방 안 공기가 샬롯 쪽으로 끌려가는 게 느껴진다. 율은 눈을 찡그렸다.

“샬롯.”

“응?”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뭘?”

“너 정말…….”

샬롯의 몸이 떠올랐다. 애써 정리해 놓은 서류가 바람에 휩쓸려 책상 아래로 떨어졌다.

보드에 붙여놓은 쪽지도 팔랑거리다가 맥없이 추락했다.

“샬롯!”

기어이 목소리를 높였다. 샬롯이 움찔하면서 바닥으로 내려왔다. 휘몰아치던 바람도 한순간 멎었다.

“심심하면 에단을 찾아가. 돌아왔으니까.”

“정말?”

“그래.”

샬롯이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계단.”

율은 문을 가리킨 다음 힘주어 말했다. 눈치를 보던 샬롯이 몸을 돌렸다.

“알았어. 계단으로 갈게.”

“몇 번을 말하지만, 그 힘은 되도록 쓰지 마. 너한테 무리가 가는 거니까.”

“‘산카’가 빌려준 거 아니야. 이건 내가 한 거라고.”

“네 심상세계가 망가질 수도 있어. 편리하다고 막 쓰다간 위험해질 수 있다고 말한 거, 잊지 않았지?”

“알았어, 알겠다고. 율은 내 엄마도 아니면서 잔소리가 너무 심해.”

“잔소리 듣기 싫으면 약속한 걸 지켜. 알겠어?”

“알았어.”

시무룩한 얼굴로 작게 대꾸하는 샬롯이었다. 문을 열고 나서려던 샬롯이 엉망이 된 바닥을 쓱 본다.

“…이건 치우고 갈게.”

주섬주섬 떨어진 메모와 서류를 줍기 시작했다. 율은 픽 웃으면서 발치에 떨어진 종이를 주웠다.

“됐지?”

아주 당당한 표정으로 양손에 모은 서류를 내민다. 율은 한 소리 하려다가 안으로 삼켰다.

샬롯이 문을 닫고 나갔다.

“구치 아저씨가 그립네. 아저씨 말은 잘 들었는데.”

메모 보드에 쪽지를 다시 붙일 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또 왜?”

얼굴만 들이민 샬롯을 보며 물었다.

“둔에서 상단이 온다며? 언제야?”

“조만간. 확실한 날짜는 몰라. 그쪽에서 준비한 뒤에 이리로 오는 거니까.”

“율은 아는 게 없네.”

“너 진짜…….”

“농담, 농담. 그러니까 무서운 표정 금지.”

방긋 웃던 샬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기 저거.”

손가락을 들어 창문 너머를 가리킨다. 율도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 시장 끝자락에 줄지어 오는 거병 세 기가 보였다.

“둔에서 온 거다!”

샬롯이 외치면서 창문으로 뛰어갔다. 문을 활짝 열고 그대로 밖으로 뛰어내렸다.

강한 바람이 다시금 방 안에 휘몰아쳤다. 율은 멍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낙엽처럼 나뒹구는 서류를 3초 정도 지켜보다가, 냅다 창가로 뛰어가 외쳤다.

“너 돌아오기만 해봐!”

지면을 향해 천천히 내려간 샬롯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장을 향해 뛰어갔다.

똑똑, 노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조금 더 쉴까요?”

방 안 몰골을 살피던 보좌관이 헤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 *

샬롯은 등을 밀어주는 바람을 날려 보낸 후 두 다리에 힘을 줬다.

땅을 힘차게 차며 시장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북적거리는 시장은 언제 와도 즐겁다. 바글거리는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다음 앞으로 쭉 달려 나갔다.

“맞네!”

눈앞에 거병이 있었다.

가슴팍에 그려진 태엽 문양.

저번에도 저 문양이 새겨진 거병이 둔의 상단을 이끌고 스파우에 왔었다.

오늘은 어떤 재미난 물건이 있을까?

기대감이 부풀어 오를 때였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당했다던데.”

“용병단이 넷이나 붙었잖아. 그런데도 타격이 있는 거야?”

“어째 요즘 들어 상행이 더 위험해진 거 같아.”

안 좋은 이야기였다.

샬롯은 까치발을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훌쩍 날아올라 위에서 내려다보고 싶지만, 거리에서 허가 없이 위험 마법을 쓰는 건 위법행위였다.

솔직히 이 힘은 마법이 아닌데.

그렇다고 마법과 무엇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으면 마땅히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정령의 힘과 마법의 힘.

발현된 현상은 어쨌든 비슷하니까.

“잠깐만요, 앞으로 좀 갈게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거병과 함께 걸어오는 사람들이 그제야 보였다. 하나같이 피곤한 얼굴이었다. 몇몇은 심한 상처를 입었는지 거병이 든 들것에 실려 있었다.

뒤따르는 자동수레가 있긴 했지만, 물건이 많아 보이진 않았다.

거병들이 공관을 향해 걸어간다.

떠들썩해야 할 시장이 조용해졌다.

샬롯은 입을 꾹 다문 채 저 멀리, 도시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뭉게구름 아래로 날개를 가진 마수가 천천히 날아가는 게 보인다.

“하여간 저것들이 문제지.”

몬스터.

샬롯은 쀼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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