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4화
쿵, 쿵, 쿵.
왼쪽 팔이 없는 거병이 길목을 따라 움직였다.
에단은 옆으로 비켜서며 거병을 올려다봤다. 높이 4m에 어깨에는 도끼 세 자루가 그려져 있었다.
“쏜 용병단이 돌아왔나 보네요. 근데 팔 한짝은 어디다 팔아먹은 걸까요?”
에단은 몸을 빙글 돌려 멀어지는 거병을 바라봤다. 거병이 길 한가운데서 멈추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체임버 덮개가 열렸다.
안에서 튀어나온 남자가 욕설을 퍼부으며 거병의 몸체를 발로 찼다.
“망가진 거 같은데요?”
“신경 끄고 빨리 와라. 배고프니까.”
타챠가 길게 하품하며 말했다.
“밥 잔뜩 먹었잖아요.”
“밥이 아니라 간식.”
“그게 간식이라니.”
다 큰 돼지 반쪽을 먹어치웠다. 간식이라 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지 않나?
에단은 픽 웃으며 걷다가 오른쪽에 있는 과일 가게를 바라봤다. 조잡한 고철을 뭉쳐 만들어 놓은 기계 인형이 사과 하나를 들고 춤추고 있었다.
“아줌마. 이거 하나만 먹을게요.”
에단은 썩어서 끝이 새까맣게 변한 사과를 하나 쥐었다.
“그거 말고 옆에 있는 거 먹어. 그런 거 먹으면 속 버려.”
“잘라내고 먹으면 돼요. 잘 먹을게요.”
칼로 썩은 부위를 도려낸 후 반으로 갈랐다.
“아저씨.”
앞서가는 타챠에게 사과를 던졌다.
바닥을 쓸던 꼬리가 사과를 툭 쳤다.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떠오른 사과가 타챠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남은 사과를 잘게 쪼갠 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쏜살같이 날아온 다오가 사과를 낚아채 갔다.
“비켜요, 비켜!”
자동 수레가 레일 위를 지나갔다. 마수의 사체가 몇 구 쌓여 있었다. 멀어지는 수레를 보며 말했다.
“몬스터들이 다시 기웃거리는 거 같죠? 한동안 도시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는데.”
“적응한 거겠지. 2년 전처럼 몰려들지도 모른다.”
2년 전이란 말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방벽을 세우고 도시 안정화를 이룩했다고 자축하던 그날, 새벽녘에 마수 떼가 나타났다.
개별 행동만 하던 놈들이 어디서 팀워크를 배워 왔는지, 인간이 공성전을 치르듯 전술적으로 방벽을 때리고 넘어왔다.
용병단과 각 클랜의 거병을 투입해 어찌어찌 막긴 했지만, 그날 새벽을 떠올리면 지금도 오싹했다.
“주변을 탐사해도 큰 문제점은 없어 보이는데, 이거 참 골치 아프네요.”
3개월 후면 아리엘이 시장직을 내려놓는다. 선거가 시작되는 것이다.
별문제가 없다면 연임하겠지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시의회 수장 자리를 놓치게 된다면 이래저래 곤란하겠죠?”
“누가 감투를 쓰든 별 상관 없다. 난 강자와 싸울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으니까.”
“아저씨. 아리엘이 시의회 바깥으로 밀려나면 제일 먼저 식비부터 절감할 텐데, 그래도 괜찮아요?”
“……사냥하면 된다.”
“한참 뜸들이다가 말씀하시네요.”
킥킥 웃으며 타챠 옆에 섰다.
“그러고 보니 슬슬 ‘둔’에서 상인들이 올 시기네요.”
“벌써 그렇게 됐나?”
“4월이니까 조만간 오겠죠. 용병단 네 곳이 연합해서 보호 중이라고 하니까 중간에 문제 생길 일은 없겠죠?”
“그건 알 수 없다. 지랄맞은 몬스터가 나타나면 출력이 낮은 거병으론 상대할 수 없으니까.”
“두 달 전에 봤던 그 괴물 같은 놈이 생각나네요. 아니지, 괴물 같은 놈이 아니라 그냥 괴물이지.”
도시 서쪽.
다른 도시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그놈’이 발견됐다.
15m는 가뿐하게 넘을 크기.
생긴 건 말라비틀어진 매미를 닮았는데, 다행히 날지는 못했다.
대신 징그럽게 많이 달린 다리로 주변을 휩쓸며 이동했다. 덩치에 걸맞지 않게 속도도 제법 빨라서 용병단 거병이 손도 못 대고 반파당했다.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다들 한숨 돌리고 있지만, 언제 또 나타나 도시를 헤집어 놓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저씨라면 그걸 처리할 수 있을까요?”
“본 적 없는 상대를 가늠할 순 없다. 하지만 만난다면 도망치진 않겠지.”
“만나지 않길 빌어야겠네요. 전 아저씨가 죽는 걸 보고 싶진 않거든요.”
산의 전사라고 해도 그 괴물을 죽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커도 적당히 커야지.
그라운드 제로 이전의 거병만큼이나 큰 마수. 그걸 단독으로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였다.
“여러분! 진실을 보십시오! 마수는 미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튼튼한 육신을 가지고 있고, 지성 역시 겸비하고 있습니다.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소통 창구를 만들어 함께 공생해야 할…….”
거리 한복판에서 목 놓아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노란색과 붉은색이 섞인 깃발을 흘깃 본 다음 말했다.
“지겹지도 않나 봐요. 또 저러고 있네요.”
“그만큼 동조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거겠지.”
에단은 깃발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절박한 표정으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몬스터 앞에서도 저럴 수 있다면 인정이라도 할 텐데, 직접 가서 대면해 보라고 하면 입 꾹 다물잖아요.”
“흔한 인간족인데 뭘 그렇게 열을 내냐.”
“흔하진 않죠. 저렇게 미친 인간이 또 있다고요?”
타챠가 거리를 쓱 훑은 다음 말했다.
“내 눈에는 다 거기서 거기다. 각자 다른 욕망에 미쳐 있을 뿐. 적극적으로 발산하느냐, 감추느냐의 차이다.”
“예, 고매하신 타린족 전사님께서 보시기엔 인간들이 참 우매해 보이겠죠. 이해합니다.”
타챠가 멈춰 서더니 징그러운 웃음을 짓는다.
“고매와 우매. 제법 괜찮은 말장난이었다. 내가 가르친 보람이 있군.”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꼬리를 흔드는 타챠였다. 에단은 한마디 하려다가 꾹 참았다.
말해봤자 손해니까. 이 아저씨는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거에 도가 텄다.
“무사히 돌아왔네.”
공관 앞에서 제켄을 만났다.
“몇몇 자잘한 사고가 있었지만 무사히 돌아오긴 했네요. 시장님은요?”
“안에 계신다.”
타챠는 제켄과 눈짓으로 인사한 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제켄이 타챠를 바라보며 물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아니요. 그냥 배고파서 저러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여기서 일한 지 반년 정도 됐지만 여전히 저분의 표정은 읽어낼 수가 없네.”
“좀 언짢아 보이면 대개 배고픈 거예요. 기분 좋아 보이면 배부르거나, 주변에 쥐어팰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고요.”
가느다란 미소를 짓던 제켄이 주머니에서 작은 조각상을 꺼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개였다.
“이게 뭐예요?”
“선물. 쓸데없긴 하지만.”
“이런 취미가 있으셨어요? 몰랐네요.”
제켄이 건넨 조각상을 받았다. 제법 정교하게 만들었다. 귀엽기도 하고.
“다음 주에 여길 떠나게 됐다.”
갑자기 선물이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 에단은 조각상을 흔들며 말했다.
“용병단하고 얘기가 잘된 거예요?”
“예상했던 것보다 좋은 조건이었어. 여기서 계속 일하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너무 오래 머물다 보면 녹슬어 버릴 것 같아서.”
“이제 막 정들었는데, 아쉽네요. 그래서 어느 용병단이에요?”
제켄이 눈웃음 지으며 품 안에 손을 넣었다. 손가락 끝에 용병단 증명패가 붙들려 나왔다.
개구리 문양 아래에 그려져 있는 사과 하나.
“‘르완’이라. 거기 사람 안 받기로 유명하잖아요.”
“운이 좋았지.”
“에이, 아저씨 실력이죠. 르완이라……. 거점이 따로 없는 용병단이었죠?”
“이곳 ‘스파우’를 중심으로 한동안 활동하긴 했는데, 네 말대로 거점이라 할 곳은 없지.”
르완.
마수 토벌을 전문으로 하는 용병단으로 유명해진 곳이었다.
“르완 소속이 되면 그 사람을 볼 수 있겠네요. 아니, 이미 만나셨나요?”
“아직 못 봤어. 대장은 개인행동 할 때가 많아서 총회의 때도 잘 못 본다고 하네.”
“소문대로네요. 르완의 필렌 경, 워낙 유명인이라 저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한솥밥 먹게 됐으니 언젠가는 얼굴 볼 수 있겠지.”
에단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른 곳으로 가도 저 잊지 마세요. 그리고, 유능한 랍파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주시고요. 저렴한 가격으로 모실 테니.”
“생각해볼게.”
“생각만 하지 말고 꼭 연락해 주세요. 르완하고 안면 터놓으면 저도 좋으니까요.”
제켄과 인사를 나눈 후 공관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구시대의 산물이라며 넥타이를 제거하자는 의견이 잠깐 나왔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들 넥타이를 두르고 다니게 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상징은 탐나는 법이니까.
마주 오는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2층으로 올라갔다.
때마침 굳게 닫혀 있던 시장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안에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들 씩씩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간다.
“또 저질렀나 보네.”
에단은 조심스럽게 시장실 안을 들여다봤다.
아리엘이 이마에 손을 얹고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럴 땐 얌전히 도망쳐야 한다. 뒷걸음질 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뒤에서 붙잡는 손이 있었다.
“어딜 가려고?”
땀이 삐질 난다.
썩은 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봤다.
“갑자기 일이 생각나서 가봐야 할 것 같아.”
“무슨 일?”
에단은 눈을 얇게 뜨는 율을 바라봤다. 모든 변명을 논파하고야 마는 율 앞에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무슨 일이냐니까?”
“하, 하늘의 부름?”
“헛소리 말고 따라와.”
율한테 붙들려 시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리엘이 흘깃 쳐다본다.
“에단.”
“예!”
낮게 깔리는 아리엘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경어를 사용했다.
“보고해봐.”
“도시 남동쪽 3km 구간을 조사해 봤지만 이렇다 할 정황은 없었습니다. 마수와 7번 조우했지만, 모두 잔챙이였고요.”
“방벽으로 접근하는 몬스터들이 점점 늘고 있어. 징조일지도 몰라. 무리를 이루기 전에 토벌해야 우리가 산다는 거 알고 있지?”
“그럼요. 그래서 타챠 아저씨랑 열심히 조사 중이고요.”
“그래, 알면 됐어.”
아리엘의 눈길이 책상에 놓인 서류로 떨어졌다.
휴, 공적인 업무 보고를 끝냈으니 이제 사라져도 되겠지?
저기압인 아리엘 곁에 있으면 불똥이 튈 테니 얼른 벗어나야 했다.
“그럼 전 이만.”
아리엘과 율에게 살짝 웃어 보인 다음 밖으로 나왔다. 활짝 열린 문을 친절하게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닫힌 문에 기대 짧게 숨을 토해냈다.
“예민해, 예민해. 너무 예민해.”
능력을 입증 못 하는 귀족은 살아남을 수 없게 된 세상.
혈통이 농담거리로 전락한 시대이니 아리엘이 예민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샬롯이나 찾아봐야겠다.”
이럴 땐 세상 근심 없이 사는 샬롯 곁이 제일 속 편했다.
에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건물 주변 어딘가에 숨어 있을 샬롯을 찾아 나섰다.
* * *
“이 건은 그렇게 처리하도록 할게요.”
“응, 부탁할게.”
율은 서류를 챙긴 다음 아리엘을 바라봤다. 여전히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다.
“시장님, 아니, 언니. 좀 쉬는 게 어때요?”
“그러고 싶지. 하지만 쉴 틈이 없네. 선거가 코앞이라 쉬면 안 되기도 하고.”
“시의회에서 계속 압박이 들어올 텐데, 그거 버티려면 체력이 중요해요. 이 건 마무리는 제가 할 테니까 눈 좀 붙여요.”
아리엘이 옅게 웃었다.
“그래도 될까?”
“네, 그렇게 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책상에 엎어지는 아리엘이었다.
“율.”
“네.”
“고마워.”
“뭘요.”
숨을 고르던 아리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루드 팩토리’에서 물건 들어오는 거 언제라고 했지?”
“언니.”
“응?”
“쉬라니까요.”
“……그래.”
다시 엎어진다. 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물건은 곧 도착할 거예요. 사고 없이 온다면 말이죠.”
“무사히 오길 빌어야지. 개선된 배터리가 필요해. 분배소 커넥터도 갈아야 하고. 루드 팩토리표 의수를 기다리는 사람도…….”
“안 잘 거예요?”
중얼거리던 아리엘이 조용해졌다.
율은 문 옆에 달린 전등 스위치에 손을 올렸다.
“한 시간 뒤에 올게요. 푹 쉬세요.”
딸깍, 불을 끄고 밖으로 나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