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
하아암, 맥 빠지는 하품이 길게 나왔다.
햇볕은 나른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간지럽고. 나무에 기대 늘어지게 한숨 자고 싶었다.
할 일이 없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에단.”
나무 아래쪽에서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은 고개를 쓱 내밀어 밑을 바라봤다.
“왜요?”
“다오한테 저쪽을 둘러보라고 해라.”
비늘 돋친 손가락이 북서쪽을 가리켰다. 가시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시야 확보가 어려운 곳이다.
“뭔가 있어요?”
“냄새가 나. 썩은 내가.”
“아저씨가 그런 말 할 때마다 안 좋은 일이 벌어지더라.”
“잔말 말고 다오나 불러. 아니면 직접 다녀오든가.”
“말투 좀 고치라고 아리엘이 몇 년 동안 말하고 있는 거 아시죠?”
“내 말투가 뭐 어때서?”
도마뱀 아저씨, 타챠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쳐들었다. 에단은 어깨를 으쓱거린 다음 입술 양 끝단에 손가락을 걸었다.
삐이이익!
손 피리를 불고 왼손을 위로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에단은 고개를 들었다.
나뭇잎을 헤치며 단짝이 나타났다. 길게 편 날개를 접고 왼손에 내려앉는다.
부리 밑을 살짝 긁어준 다음 타챠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다오. 저쪽도 한번 살펴보고 올래? 우리 도마뱀 아저씨가 뭔가 있다고 하네.”
눈을 한 번 깜빡거린 다오가 날개를 접은 채 밑으로 떨어졌다.
모닥불을 쬐고 있던 타챠의 머리를 콕 찍은 후, 재빨리 하늘로 날아올랐다.
타챠가 꼬리로 지면을 툭툭 치며 말했다.
“주인을 닮아 점점 예의가 없어지는군.”
“애교 부리는 거잖아요. 다오는 아저씨를 좋아한다고요.”
몸을 빙글 돌려 나뭇가지에 매달린 후 손을 놓았다. 밑에 있던 타챠가 오른손으로 에단을 받아줬다.
“주변에 뭐 없는 거 같아요. 아저씨가 말한 곳에도 별거 없으면 일단 돌아가죠?”
“사냥꾼이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저기요, 아저씨.”
에단은 타챠 옆에 앉으며 건빵을 꺼냈다.
“우린 사냥꾼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조사.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만 전투. 잊으신 거 아니죠?”
“전사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아까는 사냥꾼이라면서.”
“그게 그거다. 우리한테는.”
“타린족 전사들은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요.”
구시렁거리고 있자 딱딱한 물건이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윽,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봤다. 타챠의 꼬리가 비웃듯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실수다.”
타챠가 말했다.
“퍽이나 실수겠네요.”
쓰라린 등을 매만질 때였다. 달콤한 냄새가 모닥불 안쪽에서 피어올랐다.
“고구마예요?”
“아니. 은제나무 열매다. 고구마하고 향은 비슷하지만 맛은 다르지.”
“저도 하나 먹을래요. 익은 거 맞죠?”
타챠가 모닥불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불 안쪽을 뒤적거리던 타챠가 검게 탄 열매를 꺼냈다.
“매번 보는 거지만 매번 묻게 되네요. 정말 안 뜨거워요?”
“인간족의 육신이 놀라울 정도로 허약한 거다.”
타챠가 열매를 던졌다. 에단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재빨리 열매를 받았다.
냄새는 의심할 바 없이 군고구마였다. 맛은 어떨까? 기대하며 열매에 손을 뻗었다.
껍질이 단단했다. 더럽게 비싼 호두처럼 단단한 껍질 안에 과육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지?
“저기요, 아저씨.”
“왜?”
타챠를 바라보는 순간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아저씨는 바싹 익은 열매를 입 안에 때려 넣고 으적으적 씹고 있었다.
돌멩이 씹는 소리가 강철 같은 턱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뭐?”
열매를 꿀꺽 삼킨 후 타챠가 말했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알아서 먹을 게요.”
“입에 넣고 씹어라. 그 간단한 걸 왜 못 하는 거지?”
“…할 말이 참 많지만 안 할게요. 예, 하면 제가 지는 거니까 꾹 참을 거예요.”
물끄러미 바라보던 타챠가 픽 웃더니 열매를 가져갔다. 타챠가 손을 한번 움켜쥐자 단단한 껍질이 바스러졌다.
“먹어라.”
검붉은 알맹이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음, 달다. 기가 막히게 달면서도 고소하다.
“이 열매, 이렇게 먹는 거였네요. 왜 몰랐을까요?”
꽤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 열매인데.
“인간족은 시야가 좁으니까.”
열매를 으적으적 씹던 타챠가 고개를 홱 돌렸다. 경계하는 눈빛이다.
에단은 모자를 눌러쓰고 나무 위로 올라갔다.
“온다.”
“저도 들었어요.”
발소리다. 저 멀리 날아갔던 다오가 곁으로 돌아왔다.
에단은 나뭇잎에 몸을 숨긴 채 발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봤다. 모닥불을 피워놓은 상태라 상대방 역시 이쪽을 발견했을 것이다.
몬스터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발소리의 간격이 짧아진다. 다급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후 나무 사이에서 사람 셋이 빠져나왔다. 온몸에 가시나무의 잔가시가 박혀 있었다.
타챠를 발견했는지 셋 다 얼어붙었다. 하긴, 거대한 창을 들고 서 있는 도마뱀 전사를 마주하면 누구라도 긴장할 것이다.
“타, 타린족 무승이십니까?”
“산의 전사는 맞지만 무승은 아니다. 그보다 인간족이 여길 왜 드나들고 있지?”
창끝이 세 사람을 향해 갔다.
선두에 선 남자는 금방이라도 울 기세였다.
에단은 나무 밑으로 폴짝 내려가 타챠의 앞을 가로막았다.
“산적도 아저씨보단 친절할 거예요. 그 제구 좀 내려놔요. 사람들 겁먹었잖아요.”
“별걸 다 겁내는군.”
타챠가 창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적의라고는 새의 깃털만큼도 없는 자들이었다. 도적 떼였다면 이미 칼부림이 났을 것이다.
“저기, 이런 곳에 어쩐 일이세요?”
에단은 긴장한 사람들한테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앞에선 남자가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네? 길이요?”
“예. 저흰 보따리상인데 옆 도시로 가보려고 나섰다가…….”
“아이구야, 겁도 없으시네. 요즘 시대에 용병단도 안 끼고 단 세 명이서 돌아다니시다니. 그러다 몬스터 만나면 점심밥 된다는 거 알고 있죠?”
뒤쪽에 서 있는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마수를 만나면 위험하다는 걸. 하지만 용병단을 끼고 상행에 나서는 건 손해가 막심해요. 상로를 새로 개척하기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들어서 한번 도전해본 건데…….”
“용기는 대단하네요. 근데 돈이 아무리 좋아도 죽으면 끝이라는 거 아시죠?”
케에에엑, 저 멀리서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세 사람이 목을 움츠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이런 소리에 놀랄 정도면 초짜인 거 같은데, 이곳 지리 아는 사람 있어요?”
앞에 선 남자가 살며시 손을 올렸다.
“아는 용병한테 설명을 들어서…….”
“사기당하셨네. 여긴 위험한 곳이에요. 용병단도 비켜 가는 숲인데.”
“이쪽으로 가면 안전 루트가 있다고…….”
“없을걸요? 아저씨, 이 근방에 안전한 곳이 있어요?”
뒤돌아보며 타챠에게 물었다. 타챠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없다네요.”
앞에선 남자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였다. 타챠가 창을 들고 일어섰다.
다오의 높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에단은 세 사람한테 손짓했다.
“대충 감이 잡히네요.”
“그게 무슨 소리죠?”
“이쪽으로 와요. 여러분은 운이 정말 좋은 거예요.”
세 사람이 주춤거리다가 다가왔다. 에단은 모닥불 옆에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뒤 나무 위로 올라갔다.
“꼬마야.”
“예, 아저씨. 보여요. 다오가 알려줄 거예요. 그리고 저 꼬마 아니에요. 열다섯 먹은 인간한테 꼬마라니, 너무하시네.”
창공을 헤엄치던 다오가 방향을 틀어 날아갔다. 세 사람이 걸어온 방향이었다.
“사람 장사가 편하고 좋죠. ‘그라운드 제로’ 이후엔 더더욱.”
에단은 빙긋 웃으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사람 장사란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잠시 후.
“…불편하네.”
무장한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용감이 느껴지는 검과 단창. 숙련자들이었다.
용병단 마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걸 달고 돌아다닐 정도로 멍청하진 않겠지.
“헤, 헤일스.”
상인 남자가 반대편에서 등장한 용병을 가리켰다. 헤일스란 이름의 남자가 아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산의 전사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헤일스가 너털웃음을 짓더니 뒤따르는 용병들을 바라본다.
“우린 이대로 얌전히 돌아가고 싶은데, 괜찮을까? 싫으면 어쩔 수 없고.”
헤일스가 손도끼를 움켜쥐며 물었다.
에단은 곧바로 타챠의 얼굴을 바라봤다. 심드렁한 표정이다.
여기선 내가 나서야지.
“저기요, 형님들. 세상 살기 팍팍해졌는데 서로 좀 돕고 살아요.”
헤일스가 고개를 들어 에단을 바라본다.
“그러고 싶은데 머저리들이 너무 많아서. 돈을 공짜로 주겠다는데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좀 착하게 살아요.”
코웃음 친 용병이 도끼를 아래로 내렸다.
“노력해보지. 아무튼 서로 열심히 살자고. 그리고 루안 씨! 거 다음부턴 조심하쇼. 사람 너무 믿지 말고.”
용병단이 조용히 물러났다.
소란스러웠던 숲이 금방 고요를 되찾았다. 상인들은 멀거니 용병단을 바라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에단은 그런 상인들을 보며 말했다.
“그라운드 제로 이후 가장 무서운 게 뭔지 알아요? 사람이에요. 갑자기 늘어난 몬스터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고요. 다 아실 만한 분들이, 참.”
끔찍했던 대재앙도 어느덧 5년 전 얘기가 됐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기만 했다.
대체 언제쯤이면 그라운드 제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이미 불가능한가?
용병단을 따라 움직였던 다오가 돌아왔다. 허튼짓하지 않고 얌전히 물러난 모양이다.
낙담한 얼굴로 앉아 있는 상인들을 바라보다가, 타챠에게 조용히 물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죠? 이분들도 데려다줄 겸.”
“더 건질 것도 없으니 그래야겠군.”
타챠가 창을 들고 일어섰다.
에단은 상인들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상심한 건 알겠는데 일단 돌아가죠. 아니면 계속 가볼 생각이에요?”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에단은 빙긋 웃은 다음 손을 내밀었다.
“구조 활동에는 약간의 비용이 포함돼요.”
“그, 그렇지.”
“큰 거 바라진 않고, 정말 성의만 보이면 돼요.”
그때였다.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허벅지를 때렸다. 인상을 쓰면서 타챠를 바라봤다.
“용돈은 나중에 벌어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벌어요. 요즘 아리엘도 재정 빡빡하다고 난리인데.”
“돈에 구애되지 마라. 돈에 사로잡히면 썩기 마련이다.”
“사람은 언젠간 썩어요.”
타챠가 콧김을 내뱉은 다음 몸을 돌렸다. 에단은 한숨을 내쉬었다.
“돈 얘기는 농담이고, 그냥 이것만 기억해 주세요.”
에단은 빙긋 웃은 다음 말했다.
“티안의 아리엘이 여러분을 구했다. 나중에 시의원 선거 때 소중한 한 표 던져주세요. 아시겠죠?”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돌아가죠. 정겨운 우리 도시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