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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병공 진군가-232화 (205/558)

제232화

“오늘 우리는 신으로부터 독립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운명이란 것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획득할 것이고, 스스로 판단할 것이며, 스스로 결말을 지을 것입니다.”

대주교가 하얀 예복을 벗어 발밑에 놓았다.

“그라운드 제로. 이 대재앙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마스터 아낙스가 자기희생을 통해 만들어낸 위대한 희망. 여러분, 더는 신에게 의지하지 마십시오. 더는 신을 찾지 마십시오. 아니, 감히 말하건대 이제는 우리가 신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신을 죽여야 할 순간이 온 것입니다.”

파격적인 발언에 군중이 침묵했다. 하지만 적막은 길지 않았다.

메마른 짚단에 떨어진 불티처럼 환호성이 퍼져 나갔다. 곳곳에서 인간 찬가가 울려 퍼졌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마스터 아낙스가 이어준 이 목숨으로, 우리가 해내야 합니다!”

아낙스의 이름이 땅을 흔들고 저 멀리 뻗어 나갔다.

밀레나가 연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였다.

“성교회가 끝나고 신이 죽었네. 하지만 또 다른 종교와 또 다른 신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왜 다들 모른 척할까?”

옆에 서 있던 율이 말했다. 그 옆에 있는 미엔도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또 다른 종교와 또 다른 신.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성교회의 예복을 벗어 던진 저 대주교는 정말로 신을 버린 걸까?

어쩌면 몇 년 뒤 다른 예복을 입고 대중 앞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나 먼저 간다.”

미엔이 돌아섰다. 로운도 같이 움직였다.

“어디 가게?”

밀레나가 질문했다.

“준비해야지. 너도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이미 시작됐으니까.”

미엔과 로운이 사라졌다. 율과 이리엘데도 나중에 보자며 자리를 비켰다.

마지막까지 곁에 있던 건 브리테였다.

“넌?”

“나도 가봐야지. 빈센달 의회장을 중심으로 시민연대가 꾸려질 테니까.”

“겨우 하루야.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이야. 근데 다들…….”

“모든 게 바뀔 거야. 정치도, 계급도, 땅의 주인도. 지금이야 다들 울고 있지. 하지만 이게 며칠이나 갈까?”

브리테가 손가락을 들어 대주교를 가리켰다.

“세상이 무너졌지만, 그마저도 누군가한테는 기회야. 바로 저런 인간들이 그런 기회를 붙잡을 거고.”

“대단들 하다, 정말로.”

브리테가 팔짱을 꼈다.

“피해 규모가 너무 커. 황가도, 의회도 이 정도일 줄 몰랐을 거야. 공고했던 정치 구도가 한순간에 무너졌어. 제국이 앞으로 어떻게 변모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됐어.”

밀레나는 브리테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의회에 공석이 많이 생겼다고 하던데.”

“나야 시민이라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하지 못했지만, 최고어른 중에 살아남은 자들이 손에 꼽는다고 하네. 그 노인네들조차 이번 일은 대비하지 못한 모양이야.”

“최고어른의 부재라. 당분간 대의회는 안 돌아가겠어.”

“그렇겠지.”

대꾸하던 브리테가 곁눈질로 밀레나를 바라본다.

“근데 엔첸세면서 왜 나보다도 정보가 없어.”

“알잖아. 나 이런 쪽에 연줄이 전혀 없다는 걸. 실버룻에서 인맥을 좀 넓혀보려 했는데, 그것도 물 건너간 거 같고.”

“그러고 보니 실버룻이 있었지.”

브리테가 작게 웃었다.

“취소하겠지?”

성도가 뒤집혔다. 아니, 온 세상이 난리가 났다. 젊은 귀족들이 모여 하하호호 웃을 시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브리테는 생각이 다른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 오히려 연령대를 좀 더 넓혀서 진행할걸? 내가 젊은 귀족이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거야.”

밀레나는 입을 다문 채 잠깐 고민했다.

“네 말대로 취소하진 않겠네. 새로운 파벌을 만들 절호의 기회니까.”

브리테가 턱짓을 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민을 향해서.

청년들과 어린아이들이 유독 많아 보였다.

“사망자들의 연령대가 높아. 당장 광장에 모인 사람들만 봐도 중장년층이 거의 안 보여.”

“붉은빛에 노출된 노인들은 대부분 일어나지 못했지.”

“스콜라 동기들 상태를 확인해 봤는데, 동기 중 사망자는 4명뿐이었어.”

“교관 쪽은?”

“정확히 알아본 건 아니지만, 붉은빛 때문에 죽은 교관은 없는 거 같아. 실족사한 교관은 몇 명 있는 거 같지만.”

“마나 감각 수준과 사용 빈도가 생존에 영향을 미친 걸까?”

브리테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마나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이지만, 아닐 수도 있어. 조사가 시작되고 나면 그제야 알게 되겠지.”

“갈 길이 머네.”

“어쩌면 진짜 재난은 지금부터 시작일지도 몰라.”

“이미 지옥 밑바닥 아니야?”

“누가 그러더라. 추락은 끝이 없다고.”

“무서운 말이네.”

대주교가 양손을 치켜들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토해냈다.

설교가 이어졌지만 함성에 파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설교 내용은 아무래도 좋은지, 사람들은 더욱 열광했다.

밀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황제의 임시 거처가 저 멀리 보인다.

어제, 저 위에서 광휘가 터져 나왔다. 마스터 아낙스가 목숨을 대가로 이뤄낸 기적.

“서쪽 하늘에 나타났던 그 검, 그것도 아낙스 님이 만들어낸 걸까?”

밀레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법의 출처는 중요하지 않아. 기적이 필요할 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만이 중요하지. 너도 알고 있잖아?”

“정치적인 문제 말고, 그냥 순수한 호기심이야.”

브리테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사실 나도 궁금하긴 해. 하지만 그 질문에 대답해줄 사람은 이제 존재하지 않잖아. 남은 건 어떻게 해서든 기적을 이용하려는 장사치뿐이지.”

말을 마친 브리테가 몸을 돌렸다.

“가게?”

“가야지. 장사 준비하려면 바쁘거든.”

“너도 장사치가 되려고?”

“멍청하게 빼앗길 수는 없으니까. 세상이 뒤집혔어. 계급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없잖아? 누가 알아? 귀족보다, 정치인보다 상인이 우대받는 세계가 될지도.”

나중에 보자, 짧은 인사와 함께 브리테마저 자리를 떠났다.

“정치… 장사라.”

정치권에 생긴 공백을 채우는 건 누가 될까? 그 과정에서 흘릴 피는 또 얼마나 될까?

재난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브리테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더는…….”

대주교의 설교를 조금 더 듣다가 광장을 벗어났다.

폐허가 된 길을 따라 헐벗은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게 보였다. 손에 온갖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무너진 건물 밑으로 들어가 물건을 빼 오고, 나뒹구는 시체 곁으로 다가가 옷을 벗긴다.

아이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빤히 쳐다보던 아이가 주변에 손짓했다.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밀레나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치안이 엉망이 됐다. 무정부나 다름없는 상황이 장기화될수록 체제는 옛 모습을 잃어갈 것이다.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확립했을 때 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밀레나는 신체술을 끌어올렸다.

몸에 달라붙는 마나의 양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몸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 하지만 신체술을 반복 사용해본 결과 이상이 생긴 건 몸이 아닌 세상임을 깨달았다.

마나의 밀도가 하루 만에 높아졌다.

가시화돼 물리적인 피해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밀도였다.

하지만 마나는 난폭하게 굴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밀도가 높은데 안정돼 있었다.

사용하기 편하게 정제된 응축로의 마나처럼.

가볍게 발을 굴렀다. 예전보다 1m는 높게 뛰어오를 수 있게 됐다.

반으로 똑 부러진 시계탑 위로 올라갔다. 반파됐다고 한들 여전히 높았다.

폐허가 된 성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도 곳곳에 생겼던 큰 구멍의 지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균열 역시 느리지만 메워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모든 틈새가 닫힐 것이다. 하지만 그날이 온다고 한들,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지형이 크게 변했다.

지대가 기이할 정도로 높아진 곳도 있고, 푹 꺼져 거대한 골짜기로 변한 곳도 있다.

어디로 가든 쭉 뻗고 평탄한 성도의 도로였는데.

지형 변화는 성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저 멀리 시선을 던졌다. 성벽 바깥, 해자 너머 성도를 이루는 마을이 보인다.

그곳 역시 지반이 들쭉날쭉, 난리도 아니었다.

여행 마차들이 다니던 길목에는 높이가 낮은 절벽이 들어섰다. 가을엔 황금빛으로 물들어야 할 평야에는 작은 동산이 생겨났다.

성도 정비가 끝나는 대로 주변 일대의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것이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

엄마가 있는 곳도 전쟁터처럼 변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엄마라면 설령 그곳이 지옥이라 한들 무사히 빠져나올 테니까.

오히려 본가로 대피한 식솔들이 걱정이다.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본가가 있을 방향을 바라보다가 문득 둔이 떠올랐다.

오밀조밀 지어놓은 건물들.

대지진이 훑고 지나간 도시는 지금 어떤 몰골일까.

아마 성도보다 피해가 심하리라.

밀레나는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새를 보며 중얼거렸다.

“가하란, 툴.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그렇지?”

강렬한 인상을 남긴 올란트와의 체스 대국이 떠오른다. 일류 제과점 못지않게 맛있는 잼을 만들던 룽네도 생각난다.

머리 뒤쪽으로 손을 뻗어 가하란이 선물해준 스카프를 매만졌다.

스카프를 쓰다듬고 있으면 긴장감이 풀린다. 조급함도 사라지고 여유가 생긴다.

마법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닌데.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둔을 찾아가 봐야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신체술로 예민해진 눈이 기괴하게 생긴 동물을 잡아냈다. 기울어진 성벽 위쪽이었다.

팔이 여섯 개인 그놈이 성벽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제법 빠르다.

테러를 일으켰던 놈들인가?

설마 이 와중에 공격을 감행하는 건가?

얼굴을 구기며 그 괴물을 응시할 때였다. 성벽 위를 기웃거리던 그놈이 폴짝 뛰어내려 숲속으로 사라졌다.

뭐지?

정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엉성했다. 경계심만 높이는 정찰이라니.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을 왜 하겠는가?

사라졌던 그놈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두 마리였다.

유심히 행동을 관찰할 때였다.

성벽 쪽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보였다. 거리가 멀어서 경고할 방법이 없었다.

괴물 두 마리가 성벽으로 다가온 인간을 붙잡더니, 그대로 찢어버렸다.

너덜대는 팔다리를 들고는 춤추듯 뛰어다니는 괴물들이었다.

근처에서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뛰어갔다. 괴물들은 다시 성벽을 넘어 숲으로 사라졌다.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밀레나는 불길함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너진 성벽 바깥쪽, 우거진 숲 사이사이에 기괴하게 생긴 동물들이 보였다.

몇몇은 이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대체 저것들은 무엇인가?

“마수다!”

누군가의 외침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마수.

혹은 몬스터.

밀레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숲을 바라봤다.

기적 끝에 맞이한 세상은 또 다른 기적이 필요할 정도로 망가진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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